산하의 오역
1964년 10월 9일 아바이 잘 가오
60년대를 대표하는 추억의 아나운서가 둘 있다고들 한다. 하나가 가수 손지창과 임재범의 아버지인 임택근씨고, 또 하나가 이광재 아나운서라는 분이다. 특히 이분은 스포츠 중계에 발군의 실력을 드러낸 분인데 라디오 중계를 들으면서 이분의 멘트를 듣다보면 숨 막혀서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런 식이었다고 하는데...... “아무개 선수 슈우웃.... 5미터 4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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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0월 9일 아바이 잘 가오
60년대를 대표하는 추억의 아나운서가 둘 있다고들 한다. 하나가 가수 손지창과 임재범의 아버지인 임택근씨고, 또 하나가 이광재 아나운서라는 분이다. 특히 이분은 스포츠 중계에 발군의 실력을 드러낸 분인데 라디오 중계를 들으면서 이분의 멘트를 듣다보면 숨 막혀서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런 식이었다고 하는데...... “아무개 선수 슈우웃.... 5미터 4미터
3미터 2미터.... 아 아깝습니다.” TV 위성중계 같은 것이 없던 시절 라디오에만 의지하던 사람들은 듣다가 뒤집어질 밖에.
그는 스포츠 중계 말고 또 다른 어떤 상황을 중계하면서 4천만의 가슴을 울린 바 있다. 그건 1964년 10월 9일 동경 올림픽 당시 벌어졌던 가슴 아픈 신금단 신문준 부녀의 상봉과 이별 현장이었다. 신금단은 1962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400미터, 800미터 2관왕을 차지했는데 1963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신생국 경기대회’ (GANEPO)에 출전해서도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했다. 아시아 여성으로는 초유의 일이었고 기록 또한 경이적이어서 일각에서는 그가 “여자가 아니다.”라는 쑥덕거림까지 나왔다. 그래서 심판진이 “신금단의 몸을 살펴 봤는데 가슴이 평평해서 그렇지, 분명히 여자다.”라고 해명할 정도였다. 그녀가 여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에서도 나왔다. 가네포 대회 직후 “신금단은 내 딸이오.”하는 남자가 한국의 언론에 제 발로 나타났던 것이다. 신문준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함경남도에서 1.4후퇴 때 피난 나온 월남민이었다. 주변의 함경도 사람들과 비슷하게 ‘잠시 피난 내려오겠다’고 집을 떠난 것이 그 뒤로 생이별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13년밖에 안되었을 때니 언제고 만날 희망이야 있었겠지만, 어려서 달음박질 잘하고 선머슴애같은 딸이 갑자기 세계적인 육상 선수로 떠올랐을 때 아버지의 심경은 남달랐으리라. 그러던 중 북한 선수단이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의 문을 두드렸다. 1964년 동경 올림픽에 출전한 것이다. 당연히 신금단도 그 일원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IOC는 북한에 'North Korea'라는 국호를 쓸 것을 결정했는데 (한국은 Korea) 북한으로서는 이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DPRK,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고집했지만 IOC 역시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것까지는 어찌 어찌 북한이 넘어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는데 또 하나의 청천벽력같은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것은 신금단이 출전했던 가네포 경기대회, 즉 신생국 경기대회였다. IOC는 이런 류의 대회가 올림픽의 존립 가치를 위협한다고 여겼고,이 대회에 출전한 이들에 대해 올림픽 참가를 불허한 것이다. 금메달 0순위였던 신금단 또한 거기에 포함돼 있었다.
북한은 여기에 격노했다. “못해 묵갔어 철수하자우.” 기껏 동경까지 왔던 선수단은 다시 보따리를 싼다. 이 소식에 하늘이 무너진 듯 낭패감을 경험한 이가 있었다. 바로 신금단의 아버지 신문준이었다. 그는 신금단을 만나러 동경에 와 있었다. 재일 올림픽 후원회장 이유천은 동경올림픽 위원회 사무차장 무라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무라이는 북한 선수단에게 사정을 전달했다. “금단이가 만나갔다면 만나게 해 주갔소.”
한국 취재진이 북한 선수단에 카메라를 들이밀었을 때 카메라를 뺏겠다고 달려들던 험악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던 데다가 북한 입장에서 볼 때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IOC에 항의하여 선수단을 철수하는 입장이라 그 만남 자체가 기적적일 수 밖에 없었다. 장소는 일본 동경의 ‘조선 회관’ 조련(조총련) 계열의 젊은이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신문준은 딸 신금단을 만난다. 오후 4시 55분. 북한 올림픽 선수단장 김종항, 조련 의장 한덕수 등이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처음에 부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울었다. 그 서러운 상봉에 올림픽 조직위 일본인 관계자들도 눈물을 흘렸고 지켜보던 북한 선수단도 하늘색 단복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자리의 부녀에도 휴전선이 그어져 있었음은 동아일보 1964년 10월 10일자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자유대한에서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한 아버지와 “15년 내에 통일이 될 테니 그때는 온 가족이 모여서 살 테니 양심적으로 사시오.”라고 답한 딸. 그들이 정말 이렇게 얘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사가 윤색됐다 하더라도 그 시절의 현실을 반영한 일일 것이다. 7분여 만난 뒤 신금단은 건장한 재일 조련 청년들과 저쪽으로 사라졌고 미칠 것 같은 아버지는 북한 선수단이 타고 갈 기차가 기다리는 역으로 향했다. 신금단은 그 역장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깐의 해후 후 신금단은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고 아버지와 이별한다. “아바이 잘 가오.”
함경도 사투리가 웬만큼 귀에 익은 나는 그 ‘잘’의 발음을 잘 안다. 이남의 ‘잘’과는 확연히 다른, ‘자르’에 가까운 그 장음.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나더라 “학교 자르 갔다 오너라.” 하던 그 ‘자르’. 신금단 부녀는 그 말과 함께 남북분단의 아픔을 드러내는 산 역사가 됐다. 그리고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15년 내에 통일이 되지도 않았고 아버지는 그 한맺힌 만남이 있은 19년 뒤에 세상을 떴다. 그 후로도 오랫 동안 부녀의 슬픈 만남조차 정치적으로 계산되던 시대가 계속됐다. 남한은 짧은 만남만을 허용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궐기대회’가 연이어 열렸고 신금단의 아버지 신문준은 그 연단에 올라가서 자신의 아픔을 대중적으로 폭로(?)해야 했다. 또 북한은 판문점 정전위 회의에서 10분이 안되는 만남은 ‘미국 사람들’ 때문이라며 언성을 높였고, 이후 삿포로 동계 올림픽 때 북한 선수로 출전한 한필화 선수의 오빠 한필성이 만남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했다. 1964년의 만남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는지.
남북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둘이 똑같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정치 도덕적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은 그 어느 쪽으로든 새빨간 거짓말이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고 책상 위에 줄 긋고 넘어오면 뭐든 해코지하던 아이들 장난보다 더 못한 자존심 싸움으로 서로를 갉아먹었다. 그리고 최근의 5년은 역시 “둘이 똑같이” 그나마 나아갔던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 자리로 돌려 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정권이나 김정일 정권이나 50년 전에나 하던 자존심 싸움과 대결의식으로 결국 모든 것을 잃어 갔으니까.
이 사건 이후 잽싸게 누군가가 지어 부른 노래 <아바이 잘 가오>의 가사다
운명이냐 비극이냐 이국의 하늘아래
아바이에 몸을 안고 울었나이다
자유의 몸이라면 어데라도 가려만은
조국의 이슬픔 그 누가 만들었나
아바이 아바이 아바이 잘가오
"운명인가요 비극인가요 눈물도 말라붙어
울수없는 이역 땅 그 누가 그런 원 부녀의 정이더냐
아바이 잘가기요 살아생전 언젠가는 또 만날끼요 아바이"
눈물이냐 서름이냐 만나도 소용없는
그리움에 몸무림에 울다 지쳐서
금단의 이 발길이 기약없는 길이라면
부녀의 이눈물을 그 누가 만들었나
아바이 아바이 아바이 잘가오.
고 신문준씨는 딸 이름을 잘못 지었다. 금단이라니...... 하필이면 금단이었나 그래.
그는 스포츠 중계 말고 또 다른 어떤 상황을 중계하면서 4천만의 가슴을 울린 바 있다. 그건 1964년 10월 9일 동경 올림픽 당시 벌어졌던 가슴 아픈 신금단 신문준 부녀의 상봉과 이별 현장이었다. 신금단은 1962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400미터, 800미터 2관왕을 차지했는데 1963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신생국 경기대회’ (GANEPO)에 출전해서도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했다. 아시아 여성으로는 초유의 일이었고 기록 또한 경이적이어서 일각에서는 그가 “여자가 아니다.”라는 쑥덕거림까지 나왔다. 그래서 심판진이 “신금단의 몸을 살펴 봤는데 가슴이 평평해서 그렇지, 분명히 여자다.”라고 해명할 정도였다. 그녀가 여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에서도 나왔다. 가네포 대회 직후 “신금단은 내 딸이오.”하는 남자가 한국의 언론에 제 발로 나타났던 것이다. 신문준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함경남도에서 1.4후퇴 때 피난 나온 월남민이었다. 주변의 함경도 사람들과 비슷하게 ‘잠시 피난 내려오겠다’고 집을 떠난 것이 그 뒤로 생이별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13년밖에 안되었을 때니 언제고 만날 희망이야 있었겠지만, 어려서 달음박질 잘하고 선머슴애같은 딸이 갑자기 세계적인 육상 선수로 떠올랐을 때 아버지의 심경은 남달랐으리라. 그러던 중 북한 선수단이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의 문을 두드렸다. 1964년 동경 올림픽에 출전한 것이다. 당연히 신금단도 그 일원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IOC는 북한에 'North Korea'라는 국호를 쓸 것을 결정했는데 (한국은 Korea) 북한으로서는 이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DPRK,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고집했지만 IOC 역시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것까지는 어찌 어찌 북한이 넘어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는데 또 하나의 청천벽력같은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것은 신금단이 출전했던 가네포 경기대회, 즉 신생국 경기대회였다. IOC는 이런 류의 대회가 올림픽의 존립 가치를 위협한다고 여겼고,이 대회에 출전한 이들에 대해 올림픽 참가를 불허한 것이다. 금메달 0순위였던 신금단 또한 거기에 포함돼 있었다.
북한은 여기에 격노했다. “못해 묵갔어 철수하자우.” 기껏 동경까지 왔던 선수단은 다시 보따리를 싼다. 이 소식에 하늘이 무너진 듯 낭패감을 경험한 이가 있었다. 바로 신금단의 아버지 신문준이었다. 그는 신금단을 만나러 동경에 와 있었다. 재일 올림픽 후원회장 이유천은 동경올림픽 위원회 사무차장 무라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무라이는 북한 선수단에게 사정을 전달했다. “금단이가 만나갔다면 만나게 해 주갔소.”
한국 취재진이 북한 선수단에 카메라를 들이밀었을 때 카메라를 뺏겠다고 달려들던 험악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던 데다가 북한 입장에서 볼 때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IOC에 항의하여 선수단을 철수하는 입장이라 그 만남 자체가 기적적일 수 밖에 없었다. 장소는 일본 동경의 ‘조선 회관’ 조련(조총련) 계열의 젊은이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신문준은 딸 신금단을 만난다. 오후 4시 55분. 북한 올림픽 선수단장 김종항, 조련 의장 한덕수 등이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처음에 부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울었다. 그 서러운 상봉에 올림픽 조직위 일본인 관계자들도 눈물을 흘렸고 지켜보던 북한 선수단도 하늘색 단복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자리의 부녀에도 휴전선이 그어져 있었음은 동아일보 1964년 10월 10일자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자유대한에서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한 아버지와 “15년 내에 통일이 될 테니 그때는 온 가족이 모여서 살 테니 양심적으로 사시오.”라고 답한 딸. 그들이 정말 이렇게 얘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사가 윤색됐다 하더라도 그 시절의 현실을 반영한 일일 것이다. 7분여 만난 뒤 신금단은 건장한 재일 조련 청년들과 저쪽으로 사라졌고 미칠 것 같은 아버지는 북한 선수단이 타고 갈 기차가 기다리는 역으로 향했다. 신금단은 그 역장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깐의 해후 후 신금단은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고 아버지와 이별한다. “아바이 잘 가오.”
함경도 사투리가 웬만큼 귀에 익은 나는 그 ‘잘’의 발음을 잘 안다. 이남의 ‘잘’과는 확연히 다른, ‘자르’에 가까운 그 장음.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나더라 “학교 자르 갔다 오너라.” 하던 그 ‘자르’. 신금단 부녀는 그 말과 함께 남북분단의 아픔을 드러내는 산 역사가 됐다. 그리고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15년 내에 통일이 되지도 않았고 아버지는 그 한맺힌 만남이 있은 19년 뒤에 세상을 떴다. 그 후로도 오랫 동안 부녀의 슬픈 만남조차 정치적으로 계산되던 시대가 계속됐다. 남한은 짧은 만남만을 허용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궐기대회’가 연이어 열렸고 신금단의 아버지 신문준은 그 연단에 올라가서 자신의 아픔을 대중적으로 폭로(?)해야 했다. 또 북한은 판문점 정전위 회의에서 10분이 안되는 만남은 ‘미국 사람들’ 때문이라며 언성을 높였고, 이후 삿포로 동계 올림픽 때 북한 선수로 출전한 한필화 선수의 오빠 한필성이 만남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했다. 1964년의 만남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는지.
남북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둘이 똑같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정치 도덕적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은 그 어느 쪽으로든 새빨간 거짓말이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고 책상 위에 줄 긋고 넘어오면 뭐든 해코지하던 아이들 장난보다 더 못한 자존심 싸움으로 서로를 갉아먹었다. 그리고 최근의 5년은 역시 “둘이 똑같이” 그나마 나아갔던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 자리로 돌려 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정권이나 김정일 정권이나 50년 전에나 하던 자존심 싸움과 대결의식으로 결국 모든 것을 잃어 갔으니까.
이 사건 이후 잽싸게 누군가가 지어 부른 노래 <아바이 잘 가오>의 가사다
운명이냐 비극이냐 이국의 하늘아래
아바이에 몸을 안고 울었나이다
자유의 몸이라면 어데라도 가려만은
조국의 이슬픔 그 누가 만들었나
아바이 아바이 아바이 잘가오
"운명인가요 비극인가요 눈물도 말라붙어
울수없는 이역 땅 그 누가 그런 원 부녀의 정이더냐
아바이 잘가기요 살아생전 언젠가는 또 만날끼요 아바이"
눈물이냐 서름이냐 만나도 소용없는
그리움에 몸무림에 울다 지쳐서
금단의 이 발길이 기약없는 길이라면
부녀의 이눈물을 그 누가 만들었나
아바이 아바이 아바이 잘가오.
고 신문준씨는 딸 이름을 잘못 지었다. 금단이라니...... 하필이면 금단이었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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