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29년 10월 8일 경평전의 시작
근대화에서 일본에 뒤처지고 끝내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조선인들에게는 한 가지 활로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몸으로 하는 스포츠에서는 일본을 꺾을 수 있다는 희망이자 즐거움이었다. '자전거왕' 엄복동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자전거 배달꾼이던 그가 트랙에서 날렵한 몸놀림으로 페달을 밟으며 그 엉덩이를 들어올릴 때 조선인 관중들은 "올라간다! 올라간다!"를 부르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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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0월 8일 경평전의 시작
근대화에서 일본에 뒤처지고 끝내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조선인들에게는 한 가지 활로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몸으로 하는 스포츠에서는 일본을 꺾을 수 있다는 희망이자 즐거움이었다. '자전거왕' 엄복동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자전거 배달꾼이던 그가 트랙에서 날렵한 몸놀림으로 페달을 밟으며 그 엉덩이를 들어올릴 때 조선인 관중들은 "올라간다! 올라간다!"를 부르짖
으며 열광했고 일본인들이 부리는 야료에 엄복동이 흥분하여 우승기를 꺾어 버리고 두들겨 맞자, 일제히 왜놈들이 엄복동 죽인다고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올려다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는 조선인들의 많지 않은 자긍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1920년대는 내려다볼 것이 더 많아진 시기였다.
요즘이야 프로야구가 거의 국민스포츠가 되었지만 약간 기죽은 듯한 축구 관계자가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다. "아무리 그래 봐야 야구는 축구 못 따라가. 한국 사람들이 결국 미치는 건 축구라고." 그 볼멘 소리에 신빙성이나 근거를 요구하지는 말자.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DNA에는 축구에 대한 관심이 꽤 유구하게 결합되어 있다. 우선 우리가 문약함 때문에, 강고한 체력과 전투력의 부재 때문에 허무하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성찰을 했던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를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종목이 축구였다.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 1920년 잡지 개벽에 실린 논설의 제목이다. 이 기사 내용인즉슨 조선 사람들은 허구헌날 업혀 길러져서 다리가 짧고 양복 바지도 테가 안나는데 축구를 하면 그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건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 천정환 저, 푸른역사> 참조.
이미 1920년대 축구는 장안의 화제였다.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의 원조라 할 수 있을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축구 대결은 그때도 유명했고 격렬했다. 축구 경기를 하다가 선수들, 급기야 응원단까지 치고받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보성 출신 인맥과 연희 출신 인맥이 축구 인맥의 중심이 되어 서로를 끌어주고 견제하기도 했다니 어떻게 이런 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어쨌건 당시 서울에는 '조선 축구단'이 그 최고의 명성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에 맞서는 또 하나의 산맥이 대동강변에서 융기하고 있었다. 바로 평양의 축구팀이었다. 이미 1918년 무오년에 무오 축구단이라는 축구팀이 창단한 바 있고 서울에 경성운동장과 때맞춰 기림리 공설운동장 (후일의 김일성 운동장)까지 건립해 놨던 평양 지역의 축구 열기는 대단했다. 평양의 숭실학교 축구팀은 일본 최강이었다는 와세다 대학 팀을 7대0이라는 엽기적인 스코어로 뭉개놓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한 우물에 두 용이 살 수는 없는 법, 조선의 양대 도시는 축구로 진검승부를 내기로 한다. 주최는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 하니 눈살 찡그리지 마시기 바란다. 이때의 1920년대의 조선일보는 요즘과는 차원이 달리 할 말을 하는 신문이었다.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은 "이는 경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량을 과시하는 기회"라고 기염을 토했다. 1929년 10월 8일이었다.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7천여명의 관중이 열광하는 가운데 열린 3판 양승 경기에서 승자는 평양팀이었다. 스코어는 2승 1무. 명색이 서울팀으로 으스대던 경성팀은 콧대가 여러 마디로 분절되고 말았다. "갱성 갱성 하드만 별 것이 아니더구마니." 평양 시민들은 열광했다.
경성의 축구팀들은 칼을 갈았다. 다음 해 설욕의 기회가 왔다. 이때 경성팀에는 뜻밖의 선수가 하나 끼어 있었다. 고교야구에서 가장 우수한 타율을 기록한 이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이라는 상이 있는데 그 이름 이영민, 경성운동장 야구장 1호 홈런을 기록했던 야구선수 이영민, 나아가 일본 대표로 선발되어 베이브 루스와도 경기하는 영광을 누렸던 이영민이 축구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었다. 그는 야구 천재이면서 배재고보 시절부터 축구에도 발군이었으며 육상대회에 나가서도 무려 5관왕을 차지했던 스포츠의 달인이었다. 경성운동장에서 거하게 열린 2차전에서 이 이영민은 1차전에서 결승골을 넣는다 3대2. 아마 평양 선수들 황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저 선수레 방망이나 후두를 것이디 여기 와서 와 저러는 거이가."
야구와 축구를 넘나드는 천재 이영민의 활약 속에 경성팀은 3차전에서 5대1이라는 무참한 스코어로 평양팀을 밟아버린다. 경기가 끝난 후 망연한 평양팀에게 서울내기들은 "봤지? 풋뽈은 이렇게 차는 거야."라고 등을 두드렸을지도 모르겠다. 관중들 중에도 비슷하게 말하다가 평양 박치기에 코가 깨지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간간이 관중들끼리 또는 선수들끼리 치고받는 불상사가 있었고, 대규모 관중들이 모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던 총독부의 견제도 있었고 하여 경평전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경성축구단, 평양축구단으로 발전적으로 정립된 뒤 경기가 재개되기도 했고, 축구 열기가 전국으로 퍼진 뒤에는 서울과 평양, 함흥과 광주까지 가세한 도시 대항전으로 발전했다. 조선 축구는 1935년 일본 천황배 (이 대회는 지금까지도 열리고 있다)에서 경성 축구단이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의 속을 후련하게 한다. 조선의 싸나이거든 풋볼을 차야지!
언젠가 박원순 서울 시장이 경평전의 부활을 제안한 바 있다. 하긴 1990년의 경평전(?)은 일종의 남북 친선전이었지 도시대항 경평전이 아니었다. 한 번 조기축구연합회든 서울시 고교축구 연합회든, FC 서울이든 민간 차원에서 평양의 해당팀들과 축구 시합으로 자웅을 겨루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옛날 평양팀처럼 유니폼에 '평'자 매달고 서울팀은 '서울' 꼬리표를 달고, 태극기와 인공기에 대한 부담감 없이 도시 대 도시로 한 번 붙고, '코리아'의 역량을 과시해 봤으면 좋겠다.
요즘이야 프로야구가 거의 국민스포츠가 되었지만 약간 기죽은 듯한 축구 관계자가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다. "아무리 그래 봐야 야구는 축구 못 따라가. 한국 사람들이 결국 미치는 건 축구라고." 그 볼멘 소리에 신빙성이나 근거를 요구하지는 말자.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DNA에는 축구에 대한 관심이 꽤 유구하게 결합되어 있다. 우선 우리가 문약함 때문에, 강고한 체력과 전투력의 부재 때문에 허무하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성찰을 했던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를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종목이 축구였다.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 1920년 잡지 개벽에 실린 논설의 제목이다. 이 기사 내용인즉슨 조선 사람들은 허구헌날 업혀 길러져서 다리가 짧고 양복 바지도 테가 안나는데 축구를 하면 그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건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 천정환 저, 푸른역사> 참조.
이미 1920년대 축구는 장안의 화제였다.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의 원조라 할 수 있을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축구 대결은 그때도 유명했고 격렬했다. 축구 경기를 하다가 선수들, 급기야 응원단까지 치고받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보성 출신 인맥과 연희 출신 인맥이 축구 인맥의 중심이 되어 서로를 끌어주고 견제하기도 했다니 어떻게 이런 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어쨌건 당시 서울에는 '조선 축구단'이 그 최고의 명성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에 맞서는 또 하나의 산맥이 대동강변에서 융기하고 있었다. 바로 평양의 축구팀이었다. 이미 1918년 무오년에 무오 축구단이라는 축구팀이 창단한 바 있고 서울에 경성운동장과 때맞춰 기림리 공설운동장 (후일의 김일성 운동장)까지 건립해 놨던 평양 지역의 축구 열기는 대단했다. 평양의 숭실학교 축구팀은 일본 최강이었다는 와세다 대학 팀을 7대0이라는 엽기적인 스코어로 뭉개놓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한 우물에 두 용이 살 수는 없는 법, 조선의 양대 도시는 축구로 진검승부를 내기로 한다. 주최는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 하니 눈살 찡그리지 마시기 바란다. 이때의 1920년대의 조선일보는 요즘과는 차원이 달리 할 말을 하는 신문이었다.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은 "이는 경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량을 과시하는 기회"라고 기염을 토했다. 1929년 10월 8일이었다.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7천여명의 관중이 열광하는 가운데 열린 3판 양승 경기에서 승자는 평양팀이었다. 스코어는 2승 1무. 명색이 서울팀으로 으스대던 경성팀은 콧대가 여러 마디로 분절되고 말았다. "갱성 갱성 하드만 별 것이 아니더구마니." 평양 시민들은 열광했다.
경성의 축구팀들은 칼을 갈았다. 다음 해 설욕의 기회가 왔다. 이때 경성팀에는 뜻밖의 선수가 하나 끼어 있었다. 고교야구에서 가장 우수한 타율을 기록한 이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이라는 상이 있는데 그 이름 이영민, 경성운동장 야구장 1호 홈런을 기록했던 야구선수 이영민, 나아가 일본 대표로 선발되어 베이브 루스와도 경기하는 영광을 누렸던 이영민이 축구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었다. 그는 야구 천재이면서 배재고보 시절부터 축구에도 발군이었으며 육상대회에 나가서도 무려 5관왕을 차지했던 스포츠의 달인이었다. 경성운동장에서 거하게 열린 2차전에서 이 이영민은 1차전에서 결승골을 넣는다 3대2. 아마 평양 선수들 황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저 선수레 방망이나 후두를 것이디 여기 와서 와 저러는 거이가."
야구와 축구를 넘나드는 천재 이영민의 활약 속에 경성팀은 3차전에서 5대1이라는 무참한 스코어로 평양팀을 밟아버린다. 경기가 끝난 후 망연한 평양팀에게 서울내기들은 "봤지? 풋뽈은 이렇게 차는 거야."라고 등을 두드렸을지도 모르겠다. 관중들 중에도 비슷하게 말하다가 평양 박치기에 코가 깨지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간간이 관중들끼리 또는 선수들끼리 치고받는 불상사가 있었고, 대규모 관중들이 모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던 총독부의 견제도 있었고 하여 경평전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경성축구단, 평양축구단으로 발전적으로 정립된 뒤 경기가 재개되기도 했고, 축구 열기가 전국으로 퍼진 뒤에는 서울과 평양, 함흥과 광주까지 가세한 도시 대항전으로 발전했다. 조선 축구는 1935년 일본 천황배 (이 대회는 지금까지도 열리고 있다)에서 경성 축구단이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의 속을 후련하게 한다. 조선의 싸나이거든 풋볼을 차야지!
언젠가 박원순 서울 시장이 경평전의 부활을 제안한 바 있다. 하긴 1990년의 경평전(?)은 일종의 남북 친선전이었지 도시대항 경평전이 아니었다. 한 번 조기축구연합회든 서울시 고교축구 연합회든, FC 서울이든 민간 차원에서 평양의 해당팀들과 축구 시합으로 자웅을 겨루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옛날 평양팀처럼 유니폼에 '평'자 매달고 서울팀은 '서울' 꼬리표를 달고, 태극기와 인공기에 대한 부담감 없이 도시 대 도시로 한 번 붙고, '코리아'의 역량을 과시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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