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28년 10월 10일 조명하 의사의 죽음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간단하지만 간단하지만은 않은 역사적 상식에 대한 질문들이 있다. 이를테면 “왜 누구는 의사(義士)고 왜 누구는 열사(烈士)냐?” 같은 것이다. 사실 의사가 무엇이고 열사는 또 누구냐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국가보훈처에서도 그를 따로 분류하지 않으며 쓰는 사람에 따라, 또 주장에 따라 의사와 열사는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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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0월 10일 조명하 의사의 죽음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간단하지만 간단하지만은 않은 역사적 상식에 대한 질문들이 있다. 이를테면 “왜 누구는 의사(義士)고 왜 누구는 열사(烈士)냐?” 같은 것이다. 사실 의사가 무엇이고 열사는 또 누구냐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국가보훈처에서도 그를 따로 분류하지 않으며 쓰는 사람에 따라, 또 주장에 따라 의사와 열사는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향용
쓰이는 대중적인, 그야말로 대중적인 분류를 가져오자면 의사는 ‘성공한 의거의 주인공’이고 열사는 ‘열렬히 시도하였으나 아쉬움을 남기고 실패한 분들’ 쯤 되겠다. 그래서 안중근 윤봉길 두 분 뒤에는 의사가 붙고, 이봉창 선생 뒤에는 열사가 붙는 것이다. (반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차피 다른 설이 있다고 얘기했다 ㅋ ) 오늘은 조명하 의사에 대해 얘기해 보자.
1928년 10월 10일 나이 스물 넷의 식민지 조선 청년이 타이완의 어느 교도소 사형대 위에 선다. 이름은 조명하. 사진으로 봐도 그 총기가 세월을 넘어 전달되고, 그 외모 또한 수려하다 할 만큼 반듯한 젊은이였다. 이미 장가를 가서 고향에는 처자도 있었다. 마지막 말을 묻는 간수에게 그는 일갈한다. “나는 대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오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단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리라.”
“인물 많기로 황해도와 충청도”라는 말이 있는데 (물론 이승만과 김종필은 예외로 하고) 조명하 역시 황해도 출신이다.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그의 초년 인생은 여느 조선인들처럼 순탄치 않았다. 가난하여 보통학교를 중퇴한 그는 군청의 서기로 취직해서야 약간의 안정을 찾는다. 장가를 들어 한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웬만한 눈치와 아양떨기로 일본 관헌을 만족시키며 살았더라면 그는 조선 농민들에게 쥐꼬리일망정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면서기’로서, 또는 모모 군청의 간부로서 한평생 잘 살았을지도 모르고 그 아들 역시 호의호식하고 일본 유학쯤 다녀와서 후일 대한민국의 ‘인재’로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명하의 눈에는 그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순종의 장례식 때 조문 오는 사이토 총독을 노려, 그 일행으로 예상되는 차에 뛰어들어 칼을 휘둘러 차에 탔던 모두를 단숨에 죽였던 송학선의 거사 (불행히도 다른 일본인들이었지만)와 나석주, 김상옥 등 연이어 경향 각지를 들썩였던 의열단의 의거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 또한 그 길로 나설 것을 결심한다. 80년대와 90년대 대학가와 노동 현장에서 불리운 노래 가운데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라는 노래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노래를 목메어 불렀지만 사실 이 노래는 ‘거짓말’이다. 사실 그 주변에 그 길을 가는 것이 옳다고 깨우치고 독촉하고 행동을 통해 보여 준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런데 이 노래는 정말로 조명하에게 어울리는 노래다. 그가 고향을 떠나기 전으로도 후로도 그는 어떤 조직에 속한 적이 없었고,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했던 희귀한 ‘의사’였다.
그는 아내가 아들을 낳은 후 친정에서 몸조리하던 때에 돌아오지 않을 걸음을 떠났다. 마음이 흐트러질까봐 그랬는지 부인과 아들도 만나지 않은 채였다. “큰 볼일이 있어 떠나야겠습니다.” 아들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만류도 뿌리친 채 그는 일본으로 떠났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일본을 알아야겠다는 의도였다. 그의 조카는 삼촌의 마지막 말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야 일본놈들에게 속지 않는다.”
일본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또 식민지 출신으로서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그의 의지는 돌처럼 굳어 갔다. 하지만 일본에서 단독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려고 했지만 그 여정이 만만치 않자 일단 대만으로 들어갔다가 상해로 향하는 방책을 세운다. 대만에 도착하여 점원으로 일하던 그는 중국인에게서 칼 쓰는 법을 배우는데 상해로 건너가기 전, 뜻밖의 목표물이 대만으로 온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대만 주둔 일본군 특명 검열단장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1928년 5월 14일 황족이며 국구 (임금의 장인)였던 구니노미야가 탄 차량이 타이쭈우 도서관을 지나는 길에서 조명하는 날쌔게 무개차 뒤로 올라탔다. 그리고 독을 바른 칼을 던졌는데 구니노미야의 목덜미를 스쳐 상처를 내고는 운전사의 어깨에 꽂혀 버렸다. 실패인가 싶었지만 구니노미야는 결국 이 상처가 원인이 되어 패혈증으로 죽는다. 조명하의 회심을 담은 칼날이 마침내 일본 육군 대장을 쓰러뜨린 것이다. 의열단도 아니고 한인애국단도 아니고, 꽤 흔했던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관도 없이 혼자만의 결심으로, 혼자만의 의지로 그 일을 해 냈다. 글머리의 정의에 따르면 그는 조명하 ‘의사’의 반열에 오른다.
일제 강점기 36년은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몇몇 사건들로만 점철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압제에 맞섰고 우리가 아는 이름들보다는 모르는 이름이 백 배 천 배는 많다. 그들은 꽃도 십자가에 없는 무덤에 묻혔고 빛도 이름도 없이 만주벌판 어딘가에서 또는 조명하처럼 대만에서, 조선의 산자락에서, 일본의 형무소에서, 현해탄 바닷 속에서 사그라들었다. 그 중 하나인 조명하가 1928년 10월 10일 사형을 당했다. 그나마 운이 좋은 그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그의 유택을 마련하고 있다.
1928년 10월 10일 나이 스물 넷의 식민지 조선 청년이 타이완의 어느 교도소 사형대 위에 선다. 이름은 조명하. 사진으로 봐도 그 총기가 세월을 넘어 전달되고, 그 외모 또한 수려하다 할 만큼 반듯한 젊은이였다. 이미 장가를 가서 고향에는 처자도 있었다. 마지막 말을 묻는 간수에게 그는 일갈한다. “나는 대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오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단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리라.”
“인물 많기로 황해도와 충청도”라는 말이 있는데 (물론 이승만과 김종필은 예외로 하고) 조명하 역시 황해도 출신이다.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그의 초년 인생은 여느 조선인들처럼 순탄치 않았다. 가난하여 보통학교를 중퇴한 그는 군청의 서기로 취직해서야 약간의 안정을 찾는다. 장가를 들어 한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웬만한 눈치와 아양떨기로 일본 관헌을 만족시키며 살았더라면 그는 조선 농민들에게 쥐꼬리일망정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면서기’로서, 또는 모모 군청의 간부로서 한평생 잘 살았을지도 모르고 그 아들 역시 호의호식하고 일본 유학쯤 다녀와서 후일 대한민국의 ‘인재’로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명하의 눈에는 그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순종의 장례식 때 조문 오는 사이토 총독을 노려, 그 일행으로 예상되는 차에 뛰어들어 칼을 휘둘러 차에 탔던 모두를 단숨에 죽였던 송학선의 거사 (불행히도 다른 일본인들이었지만)와 나석주, 김상옥 등 연이어 경향 각지를 들썩였던 의열단의 의거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 또한 그 길로 나설 것을 결심한다. 80년대와 90년대 대학가와 노동 현장에서 불리운 노래 가운데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라는 노래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노래를 목메어 불렀지만 사실 이 노래는 ‘거짓말’이다. 사실 그 주변에 그 길을 가는 것이 옳다고 깨우치고 독촉하고 행동을 통해 보여 준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런데 이 노래는 정말로 조명하에게 어울리는 노래다. 그가 고향을 떠나기 전으로도 후로도 그는 어떤 조직에 속한 적이 없었고,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했던 희귀한 ‘의사’였다.
그는 아내가 아들을 낳은 후 친정에서 몸조리하던 때에 돌아오지 않을 걸음을 떠났다. 마음이 흐트러질까봐 그랬는지 부인과 아들도 만나지 않은 채였다. “큰 볼일이 있어 떠나야겠습니다.” 아들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만류도 뿌리친 채 그는 일본으로 떠났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일본을 알아야겠다는 의도였다. 그의 조카는 삼촌의 마지막 말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야 일본놈들에게 속지 않는다.”
일본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또 식민지 출신으로서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그의 의지는 돌처럼 굳어 갔다. 하지만 일본에서 단독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려고 했지만 그 여정이 만만치 않자 일단 대만으로 들어갔다가 상해로 향하는 방책을 세운다. 대만에 도착하여 점원으로 일하던 그는 중국인에게서 칼 쓰는 법을 배우는데 상해로 건너가기 전, 뜻밖의 목표물이 대만으로 온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대만 주둔 일본군 특명 검열단장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1928년 5월 14일 황족이며 국구 (임금의 장인)였던 구니노미야가 탄 차량이 타이쭈우 도서관을 지나는 길에서 조명하는 날쌔게 무개차 뒤로 올라탔다. 그리고 독을 바른 칼을 던졌는데 구니노미야의 목덜미를 스쳐 상처를 내고는 운전사의 어깨에 꽂혀 버렸다. 실패인가 싶었지만 구니노미야는 결국 이 상처가 원인이 되어 패혈증으로 죽는다. 조명하의 회심을 담은 칼날이 마침내 일본 육군 대장을 쓰러뜨린 것이다. 의열단도 아니고 한인애국단도 아니고, 꽤 흔했던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관도 없이 혼자만의 결심으로, 혼자만의 의지로 그 일을 해 냈다. 글머리의 정의에 따르면 그는 조명하 ‘의사’의 반열에 오른다.
일제 강점기 36년은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몇몇 사건들로만 점철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압제에 맞섰고 우리가 아는 이름들보다는 모르는 이름이 백 배 천 배는 많다. 그들은 꽃도 십자가에 없는 무덤에 묻혔고 빛도 이름도 없이 만주벌판 어딘가에서 또는 조명하처럼 대만에서, 조선의 산자락에서, 일본의 형무소에서, 현해탄 바닷 속에서 사그라들었다. 그 중 하나인 조명하가 1928년 10월 10일 사형을 당했다. 그나마 운이 좋은 그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그의 유택을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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