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0.12.6 우리시대의 큰바위 얼굴 가다
교도소에 들어간 적이 있다. 나는 전과가 없으니 죄를 짓거나 독재에 항거해서 그곳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고 취재차 육중한 철문을 통과했던 것이다. 취재의 주 내용 아닌 뒷담화 가운데 단연 으뜸의 화제는 사형수 이야기였다.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 사형을 집행한 사람, 사형수를 교화하는 사람 등등의 이야기는 식사 시간을 까먹고 넘길만큼 흥미로왔다. 그 가운데 들은 얘기. "아무리 흉악한 사람들도 사형이란 단어 앞에서는 어린애가 되더라." 구형을 통해 그 단어에 접할 때이든 선고를 들었을 때이든 또는 교수대가 닥쳤을 때이든 적어도 한 번씩은 평정을 잃고 어린애같은 행동을 하더라는 것이다.
...
부인의 자서전에서 "무척 겁많은 사람"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목숨을 걸고 독재와 맞섰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의 입이 '사'자로 벌어지는가 무기징역의 '무'자로 입술이 튀어나오는가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지 않은가. 살려 주소서 빌면서. 뉘라서 이제 네 목숨은 시한부이며 그것도 어느 날 새벽 바둥거리며 매달릴지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의 재판정. 후일 국회의원과 청와대 핵심 등으로 출세하는 인사들을 비롯한 몇몇 젊은이들이 수의를 입고 일어섰다. 검찰의 구형이 내려질 참이었다.
“피고인 이철, 동 유인태, 동 여정남, 동 정문화, 동 황인성, 동 나병식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검사의 목소리조차 떨려 나오고 있었다. 검찰의 구형량이 그대로 판결로 이어지는 '정찰제'가 유행하던 시절, 사형 구형은 관뚜껑을 진 저승사자의 목소리였다. 사형. 데모 몇 번 하고 정권 타도 유인물 좀 만들었기로서니 사형. 재판정은 그 순간 남극점이었다. 생명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한 침묵과 살을 가르는 냉기가 눈처럼 대판정을 뒤덮었다. 재판장 역시 상기된 어조로 피고들의 진술을 허락했다. 피고인들은 당연히 침착을 잃고 있었다. 수배자를 놓친 파출소장 이마에 중앙정보부원이 권총을 디밀며 협박할만큼 '거물' 수배자였던 이철도 그랬다. "유신타도를 위해서 내 이 한 목숨을 바쳐 아까울 게 없노라. 그러니 터무니없는 누명은 씌우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충격과 공포의 색깔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30년 뒤의 청와대 왕수석 유인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 청년의 목소리가 징처럼 재판정을 울렸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청년은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사형 구형이라는 준 사형 선고를 받은 이가 얼굴이 새파래지기는커녕 봄같이 싱글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 있었다. 우렁우렁한 목청이 재판정을 흔들었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런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1992, 180 ~181쪽)
공포를 녹여버리는 웃음. 그 넉넉한 웃음을 죽음 앞에 선보인 사람이 김병곤이다. 1952년생 용띠 청년이었으니 그의 나이 스물 둘. 요즘으로 치면 '애'로 취급받는 나이였다. 그 젊음에 정권은 죽음읕 제시했고 그는 그를 영광이라 받아쳤다.
객기가 아니었다. 같이 재판을 받았던 여정남은 현재 여당의 유력한 다음 대선 후보의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숨을 멈췄다. 그런 분위기에서 객기부리는 자 있다면 나와 봐라.
다행히 그는 죽음은 면했다. 그러나 그에게 죽음은 수시로 방문했다. 박정희가 죽은 뒤도 마찬가지였다. 평온한 삶을 살 기회도 있었다. 좋은 직장도 가졌고 결혼도 했고 두 딸도 거느렸다. 딸 둔 아버지들은 안다. 그 재롱이 주는 행복에서 벗어나기 얼마나 힘든지를. 하지만 그는 거기서 돌아왔다.
그가 출중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만큼 출중한 살인마였다. 그 살인마를 놓아 둘만한 깜냥이 못된 것이 그의 불운이었고 우리의 행운이었다. 기억하자. 산업화고 지랄이고 독재자들에게 저항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못나가면 북한처럼 굶어죽었을지도 모르고 필리핀처럼 한때 아시아의 선진국이었다가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김병곤은 그 투쟁의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최후의 옥살이는 1987년 부정투표함 의혹이 불거진 구로구청 농성 사건 때였다. 부정투표가 맞다고 해도 대세는 결정됐을 테지만 보아 넘기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사태에서 그는 현장에 남기로 결정한다. 출소한지 얼마 안되었던 그였다.
그 옥살이에서 김병곤은 병을 얻는다. 위암이었다. 계속 소화가 안되고 배에서 뭔가 잡혀지는데도 교도소 의사는 뤠스탈만 줬다. 병의 정체를 알았을때 그는 이미 늦어 있었다. 한때 죽음을 영광이라던 사내는 암세포와 피어린 싸움을 하다가 눈을 감는다. 1990년 12월 6일이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이영희 교수가 비분강개했다. "전두환 같은 놈 남겨두고 김병곤 데려가는 하느님 같은 거 없어!" 그때 문익환 목사가 말을 받는다. "전두환 같은 게 있으니까 김병곤이 빛나는 거야," 정확한 멘트는 이게 아니었을 수 있지만 그런 뉘앙스였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역사는 대제국이었던 적도 없고 세계를 호령한 영웅을 보유한 적도 없다. 하지만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것은 있다. 자기의 이익과 인생과 안락을 희생하여 더 큰 자신(그게 민족이든 민중이든 어떤 이름이든) 을 위해 바친 사람들은 무지하게 많다. 그 가운데 김병곤이 있었다.
1990.12.6 우리시대의 큰바위 얼굴 가다
교도소에 들어간 적이 있다. 나는 전과가 없으니 죄를 짓거나 독재에 항거해서 그곳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고 취재차 육중한 철문을 통과했던 것이다. 취재의 주 내용 아닌 뒷담화 가운데 단연 으뜸의 화제는 사형수 이야기였다.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 사형을 집행한 사람, 사형수를 교화하는 사람 등등의 이야기는 식사 시간을 까먹고 넘길만큼 흥미로왔다. 그 가운데 들은 얘기. "아무리 흉악한 사람들도 사형이란 단어 앞에서는 어린애가 되더라." 구형을 통해 그 단어에 접할 때이든 선고를 들었을 때이든 또는 교수대가 닥쳤을 때이든 적어도 한 번씩은 평정을 잃고 어린애같은 행동을 하더라는 것이다.
...
부인의 자서전에서 "무척 겁많은 사람"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목숨을 걸고 독재와 맞섰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의 입이 '사'자로 벌어지는가 무기징역의 '무'자로 입술이 튀어나오는가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지 않은가. 살려 주소서 빌면서. 뉘라서 이제 네 목숨은 시한부이며 그것도 어느 날 새벽 바둥거리며 매달릴지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의 재판정. 후일 국회의원과 청와대 핵심 등으로 출세하는 인사들을 비롯한 몇몇 젊은이들이 수의를 입고 일어섰다. 검찰의 구형이 내려질 참이었다.
“피고인 이철, 동 유인태, 동 여정남, 동 정문화, 동 황인성, 동 나병식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검사의 목소리조차 떨려 나오고 있었다. 검찰의 구형량이 그대로 판결로 이어지는 '정찰제'가 유행하던 시절, 사형 구형은 관뚜껑을 진 저승사자의 목소리였다. 사형. 데모 몇 번 하고 정권 타도 유인물 좀 만들었기로서니 사형. 재판정은 그 순간 남극점이었다. 생명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한 침묵과 살을 가르는 냉기가 눈처럼 대판정을 뒤덮었다. 재판장 역시 상기된 어조로 피고들의 진술을 허락했다. 피고인들은 당연히 침착을 잃고 있었다. 수배자를 놓친 파출소장 이마에 중앙정보부원이 권총을 디밀며 협박할만큼 '거물' 수배자였던 이철도 그랬다. "유신타도를 위해서 내 이 한 목숨을 바쳐 아까울 게 없노라. 그러니 터무니없는 누명은 씌우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충격과 공포의 색깔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30년 뒤의 청와대 왕수석 유인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 청년의 목소리가 징처럼 재판정을 울렸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청년은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사형 구형이라는 준 사형 선고를 받은 이가 얼굴이 새파래지기는커녕 봄같이 싱글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 있었다. 우렁우렁한 목청이 재판정을 흔들었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런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1992, 180 ~181쪽)
공포를 녹여버리는 웃음. 그 넉넉한 웃음을 죽음 앞에 선보인 사람이 김병곤이다. 1952년생 용띠 청년이었으니 그의 나이 스물 둘. 요즘으로 치면 '애'로 취급받는 나이였다. 그 젊음에 정권은 죽음읕 제시했고 그는 그를 영광이라 받아쳤다.
객기가 아니었다. 같이 재판을 받았던 여정남은 현재 여당의 유력한 다음 대선 후보의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숨을 멈췄다. 그런 분위기에서 객기부리는 자 있다면 나와 봐라.
다행히 그는 죽음은 면했다. 그러나 그에게 죽음은 수시로 방문했다. 박정희가 죽은 뒤도 마찬가지였다. 평온한 삶을 살 기회도 있었다. 좋은 직장도 가졌고 결혼도 했고 두 딸도 거느렸다. 딸 둔 아버지들은 안다. 그 재롱이 주는 행복에서 벗어나기 얼마나 힘든지를. 하지만 그는 거기서 돌아왔다.
그가 출중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만큼 출중한 살인마였다. 그 살인마를 놓아 둘만한 깜냥이 못된 것이 그의 불운이었고 우리의 행운이었다. 기억하자. 산업화고 지랄이고 독재자들에게 저항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못나가면 북한처럼 굶어죽었을지도 모르고 필리핀처럼 한때 아시아의 선진국이었다가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김병곤은 그 투쟁의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최후의 옥살이는 1987년 부정투표함 의혹이 불거진 구로구청 농성 사건 때였다. 부정투표가 맞다고 해도 대세는 결정됐을 테지만 보아 넘기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사태에서 그는 현장에 남기로 결정한다. 출소한지 얼마 안되었던 그였다.
그 옥살이에서 김병곤은 병을 얻는다. 위암이었다. 계속 소화가 안되고 배에서 뭔가 잡혀지는데도 교도소 의사는 뤠스탈만 줬다. 병의 정체를 알았을때 그는 이미 늦어 있었다. 한때 죽음을 영광이라던 사내는 암세포와 피어린 싸움을 하다가 눈을 감는다. 1990년 12월 6일이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이영희 교수가 비분강개했다. "전두환 같은 놈 남겨두고 김병곤 데려가는 하느님 같은 거 없어!" 그때 문익환 목사가 말을 받는다. "전두환 같은 게 있으니까 김병곤이 빛나는 거야," 정확한 멘트는 이게 아니었을 수 있지만 그런 뉘앙스였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역사는 대제국이었던 적도 없고 세계를 호령한 영웅을 보유한 적도 없다. 하지만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것은 있다. 자기의 이익과 인생과 안락을 희생하여 더 큰 자신(그게 민족이든 민중이든 어떤 이름이든) 을 위해 바친 사람들은 무지하게 많다. 그 가운데 김병곤이 있었다.
tag : 산하의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