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4년 12월 7일 무즙 파동
모든 시험에는 논란이 따른다. 최고의 출제진이 합숙까지 하고 논의에 검토를 몇 번씩이나 거친 시험 문제들이건만 오답도 나오고 복수의 답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는 어찌 보면 일리 있는 답들 때문에 채점자가 골머리를 썩기도 한다. 88년도 대학 입시 때 국어 주관식으로 “비슷한 종류들끼리 끼리 끼리 어울린다.”는 뜻의 한자 성어를 쓰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물론 정답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그런데 내 친구는 “三三五五”라고 적어 놓고서 대학 본부에 전화하여 1점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큰소리를 쳤다. 녀석이 점수를 받을리는 만무했지만 언뜻 보면 그럴싸해 보이기도 하는 답이었다.
논란이 되는 것은 그만큼 점수에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커트라인이 청룡언월도처럼 천정에 매달려 있는데 어느 문제의 답이 애매하다는 것은 수백 수천 명이 당락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며 천당과 지옥을 가로지르는 외줄 위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 답 하나로 인생이 바뀌는데 어쩔 것인가. 이럴 때 눈에 불을 켜는 것은 수험생도 수험생이거니와 미국 대통령도 경탄해 마지 않는 교육열의 보유자인 수험생의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그 광휘(?)와 열정(?)이 가장 격렬하게 불타올랐던 사건이 1964년 12월 7일 벌어졌다.
이날은 서울 전기(前期) 중학교 입시일이었다. 이때 중학교 입시는 ‘뺑뺑이’로 중학교에 진학했던 세대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경쟁 체제였다. 층층시하로 서열 지어진 학교들 가운데 일단 ‘일류’ 중학교에 입학하면 특별한 변동이 없는 한 그 동년배들과 어울려 같은 계열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것으로 사회적 서열이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춘기도 오지 않은 꼬마들이 네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표어 방에 붙여 놓고 머리 터지도록 공부를 해야 했고, 문제 하나 하나에 목숨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이른바 KS 마크 (경기고 - 서울대)의 K자를 그리기 시작하는 경기중학교 1965년 커트라인은 160점 만점에 154.6점이었다. 문제 하나가 아니라 반 개도 얼마든지 수험생의 운명을 뒤바꿀 힘이 있었다. 그토록 엄중하고 막중한 문제 가운데 하나에 이런 것이 있었다. 자연 문제 30개 가운데 18번, 엿을 만드는 순서를 나열한 후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정답은 ‘디아스타제’였는데 다른 보기 가운데 복병 하나가 숨어 있었다. ‘무즙’이 그것이었다. 실제로 교과서에도 무즙에 디아스타제가 함유되어 있다는 대목도 버젓이 나와 있었다.
무즙도 답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교육청은 초대형 태풍의 눈에 든다. 하지만 교육청은 그 태풍을 잠재우기는 커녕 더욱 부풀리는 우를 범한다. 처음에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면서 무즙이 답이 안된다고 단언했으나 교과서를 펼쳐 보이는 학부모들의 격노한 목소리 앞에서 “해당 문제의 무효화”로 엉거주춤 후퇴했는데 이번에는 ‘디아스타제’를 정답으로 적은 학생들과 부모들의 아우성에 기가 질려서는 “무조건 디아스타제만 정답‘으로 선회해 버렸다. 낙방하게 된 ’무즙‘파 부모들은 행동에 나섰다.
그 하이라이트는 무즙으로 만든 엿을 직접 들고 교육청으로 쳐들어간 것이었다. 그 전날 교육감이 항의하는 부모들에게 “무즙으로 엿이 만들어진다면 무즙을 답으로 쓴 아이들을 구제해 보겠다.”라고 말을 뱉아 버린 결과였다. 무즙을 넣고 만든 엿단지를 치켜든 부모들은 ”엿인가 아닌가 먹어 보라.“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결국 이 무즙 사태는 법정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결국 한 학기의 절반이 지난 5월에야 ’무즙파‘ 학생들은 법원의 결정으로 원하던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이 학생들은 행운이었다. 3년 뒤 치러진 1968년도 입시에서는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쓴 그림은?’이라는 미술 문제에서 복수 정답 시비가 일어났고 학부모들이 교장과 교감을 연금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른바 창칼 파동이다. 500명이 넘는 학부모들이 소송을 제기, 대법원까지 갔으나 끝내 패소하고 말았던 것이다. .
옛날 얘기는 옛날 얘기일 때 재미있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사라진 과거를 더듬을 때 옛날 이야기의 감칠맛은 더더욱 우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 담배먹던 얘기는 즐거워도 우리 집 뒷동산에 호랑이가 어흥거리고 있다면 이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즉, 옛날 얘기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 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탄식이 뒤로 돌아가 내 목덜미를 움켜쥐는 느낌에 모골이 송연할 때, 지금 저런 일이 내 앞에 닥친다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 같은 묘한 예감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결코 옛날 얘기에 태연할 수 없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무즙이건 창칼이건 교육 당국에 항의하는 부모들의 근거는 ‘교과서’였다. 하지만 요즘 ‘국제중’에 가기 위해서는 교과서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스펙이 필요하고, 그 스펙을 얻기 위해서는 “엄마의 정보력과 할아버지의 경제력과 아버지의 무관심(?)”이 필수적이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무즙 파동과 창칼 파동 얘기에 마냥 낄낄거릴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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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7일 무즙 파동
모든 시험에는 논란이 따른다. 최고의 출제진이 합숙까지 하고 논의에 검토를 몇 번씩이나 거친 시험 문제들이건만 오답도 나오고 복수의 답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는 어찌 보면 일리 있는 답들 때문에 채점자가 골머리를 썩기도 한다. 88년도 대학 입시 때 국어 주관식으로 “비슷한 종류들끼리 끼리 끼리 어울린다.”는 뜻의 한자 성어를 쓰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물론 정답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그런데 내 친구는 “三三五五”라고 적어 놓고서 대학 본부에 전화하여 1점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큰소리를 쳤다. 녀석이 점수를 받을리는 만무했지만 언뜻 보면 그럴싸해 보이기도 하는 답이었다.
논란이 되는 것은 그만큼 점수에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커트라인이 청룡언월도처럼 천정에 매달려 있는데 어느 문제의 답이 애매하다는 것은 수백 수천 명이 당락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며 천당과 지옥을 가로지르는 외줄 위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 답 하나로 인생이 바뀌는데 어쩔 것인가. 이럴 때 눈에 불을 켜는 것은 수험생도 수험생이거니와 미국 대통령도 경탄해 마지 않는 교육열의 보유자인 수험생의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그 광휘(?)와 열정(?)이 가장 격렬하게 불타올랐던 사건이 1964년 12월 7일 벌어졌다.
이날은 서울 전기(前期) 중학교 입시일이었다. 이때 중학교 입시는 ‘뺑뺑이’로 중학교에 진학했던 세대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경쟁 체제였다. 층층시하로 서열 지어진 학교들 가운데 일단 ‘일류’ 중학교에 입학하면 특별한 변동이 없는 한 그 동년배들과 어울려 같은 계열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것으로 사회적 서열이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춘기도 오지 않은 꼬마들이 네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표어 방에 붙여 놓고 머리 터지도록 공부를 해야 했고, 문제 하나 하나에 목숨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이른바 KS 마크 (경기고 - 서울대)의 K자를 그리기 시작하는 경기중학교 1965년 커트라인은 160점 만점에 154.6점이었다. 문제 하나가 아니라 반 개도 얼마든지 수험생의 운명을 뒤바꿀 힘이 있었다. 그토록 엄중하고 막중한 문제 가운데 하나에 이런 것이 있었다. 자연 문제 30개 가운데 18번, 엿을 만드는 순서를 나열한 후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정답은 ‘디아스타제’였는데 다른 보기 가운데 복병 하나가 숨어 있었다. ‘무즙’이 그것이었다. 실제로 교과서에도 무즙에 디아스타제가 함유되어 있다는 대목도 버젓이 나와 있었다.
무즙도 답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교육청은 초대형 태풍의 눈에 든다. 하지만 교육청은 그 태풍을 잠재우기는 커녕 더욱 부풀리는 우를 범한다. 처음에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면서 무즙이 답이 안된다고 단언했으나 교과서를 펼쳐 보이는 학부모들의 격노한 목소리 앞에서 “해당 문제의 무효화”로 엉거주춤 후퇴했는데 이번에는 ‘디아스타제’를 정답으로 적은 학생들과 부모들의 아우성에 기가 질려서는 “무조건 디아스타제만 정답‘으로 선회해 버렸다. 낙방하게 된 ’무즙‘파 부모들은 행동에 나섰다.
그 하이라이트는 무즙으로 만든 엿을 직접 들고 교육청으로 쳐들어간 것이었다. 그 전날 교육감이 항의하는 부모들에게 “무즙으로 엿이 만들어진다면 무즙을 답으로 쓴 아이들을 구제해 보겠다.”라고 말을 뱉아 버린 결과였다. 무즙을 넣고 만든 엿단지를 치켜든 부모들은 ”엿인가 아닌가 먹어 보라.“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결국 이 무즙 사태는 법정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결국 한 학기의 절반이 지난 5월에야 ’무즙파‘ 학생들은 법원의 결정으로 원하던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이 학생들은 행운이었다. 3년 뒤 치러진 1968년도 입시에서는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쓴 그림은?’이라는 미술 문제에서 복수 정답 시비가 일어났고 학부모들이 교장과 교감을 연금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른바 창칼 파동이다. 500명이 넘는 학부모들이 소송을 제기, 대법원까지 갔으나 끝내 패소하고 말았던 것이다. .
옛날 얘기는 옛날 얘기일 때 재미있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사라진 과거를 더듬을 때 옛날 이야기의 감칠맛은 더더욱 우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 담배먹던 얘기는 즐거워도 우리 집 뒷동산에 호랑이가 어흥거리고 있다면 이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즉, 옛날 얘기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 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탄식이 뒤로 돌아가 내 목덜미를 움켜쥐는 느낌에 모골이 송연할 때, 지금 저런 일이 내 앞에 닥친다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 같은 묘한 예감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결코 옛날 얘기에 태연할 수 없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무즙이건 창칼이건 교육 당국에 항의하는 부모들의 근거는 ‘교과서’였다. 하지만 요즘 ‘국제중’에 가기 위해서는 교과서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스펙이 필요하고, 그 스펙을 얻기 위해서는 “엄마의 정보력과 할아버지의 경제력과 아버지의 무관심(?)”이 필수적이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무즙 파동과 창칼 파동 얘기에 마냥 낄낄거릴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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