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9년 12월 5일 ‘무장한비’ 출현하다
1959년 12월 5일 요미우리와 아사히 등 일본 신문에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북조선 송환 저지 계획의 배후 추궁, 폭약 소지했다가 억류된 공작원 2명 가택 수색!”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기도? 한국인들 2명을 체포”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황당하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한 기사였다.
...
기사에 따르면 체포된 ‘강꼬꾸’ (한국) 공작원의 가방 안에서는 뇌관을 장전하여 네 개를 묶은 다이너마이트 세 다발(총 12개), 즉 언제든 사용 가능한 폭약이 나왔고, 또 니가타 역에서는 공작원이 역에 맡겨놓은 위스키 상자에서, 1리터 용량의 가솔린 통 네 개가 발견됐다. 그 중 한 명은 기자인 척하면서 일본 적십자 센터에 들락거리다가 의심을 받고 출입금지 조처를 받은 전력도 있었다. 그들은 일본 적십자 센터를 폭파할 계획이었다.
물론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파견한 공작원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북한도 아닌 일본에 ‘테러’를 가할 목적으로 특공대가 잠입시키는 사태가 빚어졌을까.
이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막아 보려는 한국 정부의 ‘발악’이었다. 재일교포의 절대다수는 남한 지역 출신이다. 하지만 재일교포 사회는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 세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구석기시대로 돌아간”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재일교포 교육 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북한의 노력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에 비해 한국 정부는 되레 일본 정부에 그 지원을 왜 막지 않느냐고 화를 냈다. 교포 사회 내 우익을 대표하는 민단에서 한국 정부에 지원을 간청했을 때에야 미미한 지원을 했을 뿐이었다. 그 정치적 목적이 무엇이었든간에 북한의 성의는 교포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성공했다.
일본에게 재일교포 문제는 골치 아픈 외국인 문제, 사회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 요소에 다름 아니었고, 북한은 전쟁 후 복구 과정에서 혼 하나 머리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양쪽의 적십자사는 협의 끝에 재일교포의 북송을 결정한다.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 동포를 북한 공산 역도들의 손에 넘길 수 있다고 아우성을 쳤고, 재일교포 거류민단 소속 청년들은 니카타 항을 향하는 철로를 가로막고 시위에 나서기도 할만큼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도 북한도 사업을 중단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 사회당 의원 이노마타 고조는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재일교포들을 일본이 보내 주겠다는데 왜 엉뚱하게 남한이 반대하는 거냐?”
사실 이런 류의 질문에는 딱히 할 대답이 없었다. 일본이 강제로 보내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교포들이 끌려가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불구대천의 원수의 땅으로 재일교포들이 실려가는 것은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냉전적 사고의 발현일 뿐이었다, 말싸움을 하다가 결국 주먹을 디미는 것은 명분이 없는 쪽이다. 한국 정부는 북송 저지 테러를 기획한다.
그 내용을 보면 가히 ‘무장한비’(武裝韓匪) 다. 6.25에 참전한 재일교포 의용병 출신에 경찰 간부 후보생들을 규합한 66명을 ‘파괴반’ ‘설득반’ ‘요인 납치반’으로 나누고 일본 적십자 센터를 폭파하고 북송 관련 선박이나 열차를 파괴하거나 조총련 핵심 인물을 납치하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침투 루트는 밀항선에 타는 것이었다. 수십 명이 그런 식으로 건너갔고 대원들 말고도 현지 지원을 위해 여럿이 일본으로 갔다. 그 중에는 김구 암살범 안두희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12월 4일 두 공작원이 다이나마이트를 품고 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줄줄이 체포되는 것을 필두로 공작은 완벽하게 실패한다. 밀항선 자체가 발각나서 일본 땅을 밟지도 못하기도 했고, 배 한 척은 그만 침몰하여 12명의 생목숨이 현해탄에 수장되는 일도 있었다., 급기야 일본에 침투한 전원은 복귀 명령을 받고 집결했다가 고스란히 체포되고 말았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이들 가운데 경찰 임용이 약속됐던 경찰 간부 후보생들은 임용조차 되지 않았고 자신의 조국을 구하겠다며 6.25에 참전했다가 이번엔 테러리스트가 되어 자신이 자랐던 나라에 침투했던 재일교포 대원들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북진통일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야당 대표의 목이 간단하게 매달리던 시절로 상징되는 적대감과 ‘질 수 없다’는 초조함이 빚어낸 처참한 해프닝이었다. 재일교포들에 대한 어떤 대책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도 북한으로 가는 것만은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편협함은 한 나라의 ‘국격’을 테러 집단 수준으로 격하시켰고 소중한 생명들을 수중고혼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 편협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까. 한때 재일교포들에게 자랑찬 조국이었던 북한은 저 지경이 되었고, 열등감을 참지 못해 깽판이라도 치려 했던 남한은 나름의 위상을 가진 나라가 되어 있지만, 50년 전 남북 공히 가졌던 ‘편협함’에는 그에 상당하는 변화가 이루어졌을까.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에 침투한 공작원들에게 내려진 공작 중단 및 복귀 명령은 서울 중앙방송국 국제 라디오의 일본어 방송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철수 암호는 일본어로 “조용히 하세요”였다. 그 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분단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북송 저지대의 미래를 예감하는 듯한 암호였다.,
1959년 12월 5일 ‘무장한비’ 출현하다
1959년 12월 5일 요미우리와 아사히 등 일본 신문에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북조선 송환 저지 계획의 배후 추궁, 폭약 소지했다가 억류된 공작원 2명 가택 수색!”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기도? 한국인들 2명을 체포”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황당하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한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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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따르면 체포된 ‘강꼬꾸’ (한국) 공작원의 가방 안에서는 뇌관을 장전하여 네 개를 묶은 다이너마이트 세 다발(총 12개), 즉 언제든 사용 가능한 폭약이 나왔고, 또 니가타 역에서는 공작원이 역에 맡겨놓은 위스키 상자에서, 1리터 용량의 가솔린 통 네 개가 발견됐다. 그 중 한 명은 기자인 척하면서 일본 적십자 센터에 들락거리다가 의심을 받고 출입금지 조처를 받은 전력도 있었다. 그들은 일본 적십자 센터를 폭파할 계획이었다.
물론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파견한 공작원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북한도 아닌 일본에 ‘테러’를 가할 목적으로 특공대가 잠입시키는 사태가 빚어졌을까.
이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막아 보려는 한국 정부의 ‘발악’이었다. 재일교포의 절대다수는 남한 지역 출신이다. 하지만 재일교포 사회는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 세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구석기시대로 돌아간”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재일교포 교육 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북한의 노력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에 비해 한국 정부는 되레 일본 정부에 그 지원을 왜 막지 않느냐고 화를 냈다. 교포 사회 내 우익을 대표하는 민단에서 한국 정부에 지원을 간청했을 때에야 미미한 지원을 했을 뿐이었다. 그 정치적 목적이 무엇이었든간에 북한의 성의는 교포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성공했다.
일본에게 재일교포 문제는 골치 아픈 외국인 문제, 사회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 요소에 다름 아니었고, 북한은 전쟁 후 복구 과정에서 혼 하나 머리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양쪽의 적십자사는 협의 끝에 재일교포의 북송을 결정한다.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 동포를 북한 공산 역도들의 손에 넘길 수 있다고 아우성을 쳤고, 재일교포 거류민단 소속 청년들은 니카타 항을 향하는 철로를 가로막고 시위에 나서기도 할만큼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도 북한도 사업을 중단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 사회당 의원 이노마타 고조는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재일교포들을 일본이 보내 주겠다는데 왜 엉뚱하게 남한이 반대하는 거냐?”
사실 이런 류의 질문에는 딱히 할 대답이 없었다. 일본이 강제로 보내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교포들이 끌려가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불구대천의 원수의 땅으로 재일교포들이 실려가는 것은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냉전적 사고의 발현일 뿐이었다, 말싸움을 하다가 결국 주먹을 디미는 것은 명분이 없는 쪽이다. 한국 정부는 북송 저지 테러를 기획한다.
그 내용을 보면 가히 ‘무장한비’(武裝韓匪) 다. 6.25에 참전한 재일교포 의용병 출신에 경찰 간부 후보생들을 규합한 66명을 ‘파괴반’ ‘설득반’ ‘요인 납치반’으로 나누고 일본 적십자 센터를 폭파하고 북송 관련 선박이나 열차를 파괴하거나 조총련 핵심 인물을 납치하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침투 루트는 밀항선에 타는 것이었다. 수십 명이 그런 식으로 건너갔고 대원들 말고도 현지 지원을 위해 여럿이 일본으로 갔다. 그 중에는 김구 암살범 안두희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12월 4일 두 공작원이 다이나마이트를 품고 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줄줄이 체포되는 것을 필두로 공작은 완벽하게 실패한다. 밀항선 자체가 발각나서 일본 땅을 밟지도 못하기도 했고, 배 한 척은 그만 침몰하여 12명의 생목숨이 현해탄에 수장되는 일도 있었다., 급기야 일본에 침투한 전원은 복귀 명령을 받고 집결했다가 고스란히 체포되고 말았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이들 가운데 경찰 임용이 약속됐던 경찰 간부 후보생들은 임용조차 되지 않았고 자신의 조국을 구하겠다며 6.25에 참전했다가 이번엔 테러리스트가 되어 자신이 자랐던 나라에 침투했던 재일교포 대원들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북진통일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야당 대표의 목이 간단하게 매달리던 시절로 상징되는 적대감과 ‘질 수 없다’는 초조함이 빚어낸 처참한 해프닝이었다. 재일교포들에 대한 어떤 대책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도 북한으로 가는 것만은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편협함은 한 나라의 ‘국격’을 테러 집단 수준으로 격하시켰고 소중한 생명들을 수중고혼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 편협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까. 한때 재일교포들에게 자랑찬 조국이었던 북한은 저 지경이 되었고, 열등감을 참지 못해 깽판이라도 치려 했던 남한은 나름의 위상을 가진 나라가 되어 있지만, 50년 전 남북 공히 가졌던 ‘편협함’에는 그에 상당하는 변화가 이루어졌을까.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에 침투한 공작원들에게 내려진 공작 중단 및 복귀 명령은 서울 중앙방송국 국제 라디오의 일본어 방송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철수 암호는 일본어로 “조용히 하세요”였다. 그 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분단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북송 저지대의 미래를 예감하는 듯한 암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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