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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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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2.4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없는 통곡이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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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94년 12월 4일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없는 통곡이어든

“이 산하에”라는 노래가 있다. 초기 노찾사에서 고 김광석이 그 유려하면서도 터질 때 터지는 목소리로 불렀으며, 남들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되레 저지하려 하지만 내 나름의 18번으로 고집했던 “이 산하에”, 그래서 하이텔 시절 ‘산하’라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디를 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던 이 노래의 1절에도 동학 농민군의 이야기는 등장한다. “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 없는 통곡이어든”
...

우금치다. 1894년 음력 11월 8일, 양력으로는 12월 4일, 녹두장군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은 충청 감영이 있는 공주의 관문인 우금치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우금치 전투의 개시였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 최대의 분수령을 이룬 이 우금치 전투는 사실은 전투가 아니었다. 일종의 학살이었다.


죽창 들고 흰옷 입은 수만 농민군을 맞아 싸운 것은 2천5백명의 관군과 200명의 일본군이었다. 대세는 첫판에서 이미 결정이 났다. “민중봉기의 시대를 깨끗이 마감했다”는 평을 듣는 신무기 개틀링 기관포가 농민군들을 그야말로 개미떼 쓸어버리듯 때려눕혀 버린 것이다. 보국안민, 척양척왜, 제폭구민의 깃발 아래 천지를 무너뜨릴 의기로 가득했던 농민군들이었지만 기관총의 밥그릇에 담긴 쌀알 하나만도 못하게 픽픽 쓰러져 갔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회고를 빌자면 “선봉대 1만 명 가운데 첫 전투가 끝나자 3천5백명이 남았고, 두 번째 전투가 끝나자 남은 것은 5백명”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동학농민군 역시 이 기관포의 존재를 모르지는 않았다. 심지어 하나는 가지고 있기까지 했다. 관군으로부터 빼앗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책은 정말로 슬프게도 주문 외우기였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이를 외우면 총알이 피해 간다는 믿음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끈덕지게 우금치 마루에 달라붙었고 능선에 포진한 관군과 일본군은 오는 대로 쏘아 넘겨 버렸다.


그러나 그 가공할 신무기의 위력을 눈 뜨고 보았으면서도 동학군 지도부는 더욱 더 용맹한 돌격을 호소했을 뿐, 죽어간 동지들의 원수를 갚자고 절규하며 “저 고개만 넘으면 한양이 우리 손에 든다”고 외쳤을 뿐, 그 무기를 어떻게 피하여 백분의 일 정도 되는 방어 병력을 격파할 것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장비 우세한 관군을 수로 압도하여 승리를 일구었던 기억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관군의 우세한 무기 때문에 아기 장사 (나이가 어려서 이렇게 불렀다고 함) 이복용 등 수많은 동지들이 피를 뿜고 죽긴 했지만 기어이 이겨서 환호했던 날의 여운이 생때같은 농민들의 등을 우금치 마루 위로 떠밀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때처럼 하면 우린 될 거야. 아마 될 거야.”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의기가 모자라서도 아니었다. 그 용기를 담아낼 국량과 그 의기를 현실적인 승리로 승화시킬 지혜가 아쉬웠을 뿐이다. 그리고 댓가는 혹독했다. 장렬하다는 형용사를 갖다 붙이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학살극이 펼쳐졌고, 용감했다는 찬사를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무모하게 돌격을 되풀이하던 농민들은 며칠 전 떨어진 우박처럼 천 갈래로 깨지고 만 갈래의 가루가 됐다. 동학군 최고의 용장이며 집강소 설치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남원 부사의 목을 쳐 버리고 효시까지 했던 열혈남아 김개남이 이끈 청주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2만 명이 넘는 대부대가 100명의 수비대에게 와해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가 배우고 기려야 할 것은 동학군의 천추에 빛날 의기만은 아니다. 그들의 쓰러짐에서도 처절하고 냉철하게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할 것이다. 끝까지 봉기를 주저하던 최시형의 북접이 마침내 남접의 호소에 응하여 무기를 들었을 때, 그래서 그 사위 손병희가 전봉준과 손을 맞잡고 하나됨을 선언하였을 때 동학군은 아마 천지를 다 얻은 듯 했을 것이다. “단결한 우리 앞에 나설 자가 누구냐?” 하늘을 우러러 앙천대소도 하였을 것이다.


관군 수천 명도 이겨 봤는데 일본군 수백 명 따위가 기관포 같은 걸 쏴 봤댔자 오르고 또 오르면 하늘 아래 있는 고지에서 우리 손에 목이 잘려 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집강소 분위기도 맛보았겠다, 전라 감사와 맞먹는 권위로 개혁을 밀고 나가던 우리를 똑똑히 보았겠다, 백성들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섣부른 확신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녹두장군 자신이 “시천주 조화정”을 외우면 총알이 빗겨 나간다는 믿음을 가졌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자신의 병력들에게 그 말을 믿도록 고무한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그 결과는 총검조차 대보지 못한 채 수만 명이 뛰어만 가다가 바닥에 엎어져 죽어간 대참패였다.


우금치에서 죽어간 이들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터럭만큼도 없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있기에 역사는 “이 산하에” 노래의 2절과 3절이 말해 주듯 3.1 운동과 북만주 독립 투쟁으로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이다. 우금치마저 없었다면 우리의 과거는 얼마나 더 부끄러워지겠는가. 하지만 그 장렬함에 취하고 녹두장군의 당당한 최후에 감동하며 녹두꽃 떨어지면 울고 가는 청포장수의 심경이 되어 부엉이처럼 구슬피 울어 보는 것도 하나의 역사 배우기라면 존경을 품는 한편으로 냉철하게 그 오류를 분석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본보기로 삼는 것도 또 다른 측면의 역사 익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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