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00년 9월 9일 신흥학교 개교
요즘 신앙심 유별난 한국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듯, 19세기 말 조선은 사명감에 불타는 선교사들의 홍수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자칭 사람을 낚는 어부들은 조선 사람들을 낚기 위해 쌍끌이 그물을 들고 덤볐고 그러다보니 구역싸움에 선교사들끼리 팔뚝질을 하거나 남이 뜸들인 밥을 가로채거나 하는 불상사가 잇따랐다. 이 꼴을 지켜보던 프린스턴 출신의 네비우스 목사는 ...
1900년 9월 9일 신흥학교 개교
요즘 신앙심 유별난 한국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듯, 19세기 말 조선은 사명감에 불타는 선교사들의 홍수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자칭 사람을 낚는 어부들은 조선 사람들을 낚기 위해 쌍끌이 그물을 들고 덤볐고 그러다보니 구역싸움에 선교사들끼리 팔뚝질을 하거나 남이 뜸들인 밥을 가로채거나 하는 불상사가 잇따랐다. 이 꼴을 지켜보던 프린스턴 출신의 네비우스 목사는 ...
조선의 지역을 분할하여 각 교파마다 나눌 것을 제안한다. 이에 따라 남장로교는 충청도와 전라도, 호주 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경상북도를 차지(?)하고 각자의 선교 지역에 전력을 기울인다.
이 분할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맡은 것은 남장로교였다. 유니언 신학교 출신이 주류를 이룬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 중 일부는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자 “인구 5만 (당시)의 아름다운 도 시” 전주에 주목했다. 갑오농민전쟁 후 포교를 본격화한 그들이 택한 방식 중의 하나는 교육이었다. 단 여기서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선교를 도울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했다. 처음에는 14명의 남자를 대상으로 ‘성경학교’를 열었다가 1900년 9월 9일 레이놀드 목사의 집 사랑채에서 단 한 명의 학생이자 첫 세례교인이었던 김창국을 학생으로 한 근대교육 기관이 문을 연다. 이것이 신흥학교의 시작이다. 김창국은 후일 목사로 대성하는데 그 아들 중의 하나가 386들이라면 교과서에서 배웠을 시 <가을의 기도> 시인 김현승이다.
기독교인 학생들을 위주로 받는다는 선교사들의 방침 (“전체 학생 중 60퍼센트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때문에 여러 가지 곡절도 있었지만 점차 신흥학교는 전주 지역의 이른바 ‘신식 교육’의 메카가 되어 갔고 동시에 일본의 강압에 삐딱한 교사들이 모여들어 ‘월남 망국사’나 ‘미국 독립사’ ‘폴란드 망국사’ 등을 가르치며 학생이고 선생이고 울분을 토하는 꼬장꼬장한 학교로 발전해 갔다. 1908년에는 기와집 8 간을 지어 어엿한 학교를 세우고 그 이름을 신흥학교로 정하니 이는 새 여명을 뜻하는 New Dawn의 한역이었다.
신흥학교 초기 역사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몇 있는데 그 중 하나는 1회 졸업생 안영열의 것이다. 원래 그는 가마에 타고 학교에 오는 갑부집 아들이었다. 그러던 그가 교육을 통해 개화하고 평등 의식이 싹트면서 자신의 종을 모두 해방하고는 자신의 토지들을 쪼개 나눠 줘 버렸다. 이후 그는 운동장을 닦으면서 고학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또 하나 초기 신흥학교 교사의 회고를 보면 미국 선교사들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총독부 관리와의 대담에서 한 조선인 교사는 일본어를 말하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조선어를 썼고 이에 여부솔 (에버솔 선교사) 교장에게 압력이 들어가자 여부솔 교장은 교사에게 총독부에 밉보이지 말 것을 읍소했고, 그래도 말을 들어먹지 않자 총독부 관리가 올 때마다 그를 잠시 가두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후 3.1 운동이나 광주 학생 운동에서나 신흥학교 출신과 재학생들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는데 가장 극적인 순간은 신사참배 논란 때 일어난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학교들은 폐쇄시키겠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감리교나 기타 몇몇 교단은 그에 응했다. 신사참배 문제는 좀 묘한 구석이 있다. 일부 기독교의 강력한 반대는 민족적인 이유보다는 신앙적인 측면이 강했던 것이다.
신흥학교를 세운 남장로교가 그랬다. 학부모 학생, 교사들은 어떻게든 학교는 유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강했지만 안톤 교장은 폐교를 각오하고 신흥학교 소속 학생들의 신사참배를 금지한다. 그러던 중 일왕의 중일전쟁 칙서 반포를 기념하는 9월 6일, 일본 경찰은 신흥학교생 전원을 휘몰아 신사로 향한다. 안톤 교장이 막아서지만 막무가내였다.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망할 놈의 신사에 절을 해야 하는가 아닌가 학생들의 마음도 복잡했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을 지켜보던 교장 선생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 결국 신사참배 구령이 떨어졌을 때 허리를 굽힌 사람은 일본 경찰 밖에 없었다. 신흥 학생들은 뻣뻣이 허리를 편 채 돌아서 퇴장했고 함께 갔던 기전학교 학생들은 주저앉아 땅을 치고 울어 버렸다. 신사참배는 엉망이 됐고 신흥학교는 폐쇄된다.
그 유구한 반골기질은 1980년 5월 27일에도 재연된다. 계엄군이 도청을 함락하고 사람 사냥을 끝내던 그 시점에서 신흥고 학생 1천5백명은 계엄 철폐와 광주 학살 규탄을 외치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교문 밖으로는 수백 명의 군경이 총을 든 채 달려 왔고 물불 안가리던 전두환 일당의 속성상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간다면 그대로 피를 볼 판이었다. 교사들은 우리를 밟고 가라며 학생들을 막아섰고 학생들은 차마 교사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해산한다. 물론 이 일로 20여명의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지만.
2000년 이 학교가 100주년을 맞은 해, 이 학교 학생들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자신들의 교가를 듣게 된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당시 트랩을 내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인민군 군악대가 난데없는 신흥고 교가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신흥고 교가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 만주의 독립군들이 부르던 ‘용진가’였지만 그 곡조가 신흥학고등학교 교가와 완전히 같았던 것이다. 그 원조가 신흥학교 교가인지 신흥학교 출신이 독립군가로 부른 것인지는 모르나, 1910년대에 이미 신흥학교 교가로 이 노래가 불리우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니 그 역사 또한 깊은 사연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2000년 당시 조선일보가 자발없이 이 노래는 “민족이 모두 힘을 합쳐 미 제국주의를 치자는 가사”라고 썼다가 망신을 당했던 것은 그 역사를 장식하는 작은 악세사리일 것이고.
1900년 9월 9일 전주 신흥학교의 역사가 한 사람의 학생으로 열렸다.
이 분할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맡은 것은 남장로교였다. 유니언 신학교 출신이 주류를 이룬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 중 일부는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자 “인구 5만 (당시)의 아름다운 도 시” 전주에 주목했다. 갑오농민전쟁 후 포교를 본격화한 그들이 택한 방식 중의 하나는 교육이었다. 단 여기서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선교를 도울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했다. 처음에는 14명의 남자를 대상으로 ‘성경학교’를 열었다가 1900년 9월 9일 레이놀드 목사의 집 사랑채에서 단 한 명의 학생이자 첫 세례교인이었던 김창국을 학생으로 한 근대교육 기관이 문을 연다. 이것이 신흥학교의 시작이다. 김창국은 후일 목사로 대성하는데 그 아들 중의 하나가 386들이라면 교과서에서 배웠을 시 <가을의 기도> 시인 김현승이다.
기독교인 학생들을 위주로 받는다는 선교사들의 방침 (“전체 학생 중 60퍼센트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때문에 여러 가지 곡절도 있었지만 점차 신흥학교는 전주 지역의 이른바 ‘신식 교육’의 메카가 되어 갔고 동시에 일본의 강압에 삐딱한 교사들이 모여들어 ‘월남 망국사’나 ‘미국 독립사’ ‘폴란드 망국사’ 등을 가르치며 학생이고 선생이고 울분을 토하는 꼬장꼬장한 학교로 발전해 갔다. 1908년에는 기와집 8 간을 지어 어엿한 학교를 세우고 그 이름을 신흥학교로 정하니 이는 새 여명을 뜻하는 New Dawn의 한역이었다.
신흥학교 초기 역사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몇 있는데 그 중 하나는 1회 졸업생 안영열의 것이다. 원래 그는 가마에 타고 학교에 오는 갑부집 아들이었다. 그러던 그가 교육을 통해 개화하고 평등 의식이 싹트면서 자신의 종을 모두 해방하고는 자신의 토지들을 쪼개 나눠 줘 버렸다. 이후 그는 운동장을 닦으면서 고학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또 하나 초기 신흥학교 교사의 회고를 보면 미국 선교사들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총독부 관리와의 대담에서 한 조선인 교사는 일본어를 말하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조선어를 썼고 이에 여부솔 (에버솔 선교사) 교장에게 압력이 들어가자 여부솔 교장은 교사에게 총독부에 밉보이지 말 것을 읍소했고, 그래도 말을 들어먹지 않자 총독부 관리가 올 때마다 그를 잠시 가두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후 3.1 운동이나 광주 학생 운동에서나 신흥학교 출신과 재학생들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는데 가장 극적인 순간은 신사참배 논란 때 일어난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학교들은 폐쇄시키겠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감리교나 기타 몇몇 교단은 그에 응했다. 신사참배 문제는 좀 묘한 구석이 있다. 일부 기독교의 강력한 반대는 민족적인 이유보다는 신앙적인 측면이 강했던 것이다.
신흥학교를 세운 남장로교가 그랬다. 학부모 학생, 교사들은 어떻게든 학교는 유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강했지만 안톤 교장은 폐교를 각오하고 신흥학교 소속 학생들의 신사참배를 금지한다. 그러던 중 일왕의 중일전쟁 칙서 반포를 기념하는 9월 6일, 일본 경찰은 신흥학교생 전원을 휘몰아 신사로 향한다. 안톤 교장이 막아서지만 막무가내였다.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망할 놈의 신사에 절을 해야 하는가 아닌가 학생들의 마음도 복잡했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을 지켜보던 교장 선생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 결국 신사참배 구령이 떨어졌을 때 허리를 굽힌 사람은 일본 경찰 밖에 없었다. 신흥 학생들은 뻣뻣이 허리를 편 채 돌아서 퇴장했고 함께 갔던 기전학교 학생들은 주저앉아 땅을 치고 울어 버렸다. 신사참배는 엉망이 됐고 신흥학교는 폐쇄된다.
그 유구한 반골기질은 1980년 5월 27일에도 재연된다. 계엄군이 도청을 함락하고 사람 사냥을 끝내던 그 시점에서 신흥고 학생 1천5백명은 계엄 철폐와 광주 학살 규탄을 외치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교문 밖으로는 수백 명의 군경이 총을 든 채 달려 왔고 물불 안가리던 전두환 일당의 속성상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간다면 그대로 피를 볼 판이었다. 교사들은 우리를 밟고 가라며 학생들을 막아섰고 학생들은 차마 교사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해산한다. 물론 이 일로 20여명의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지만.
2000년 이 학교가 100주년을 맞은 해, 이 학교 학생들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자신들의 교가를 듣게 된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당시 트랩을 내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인민군 군악대가 난데없는 신흥고 교가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신흥고 교가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 만주의 독립군들이 부르던 ‘용진가’였지만 그 곡조가 신흥학고등학교 교가와 완전히 같았던 것이다. 그 원조가 신흥학교 교가인지 신흥학교 출신이 독립군가로 부른 것인지는 모르나, 1910년대에 이미 신흥학교 교가로 이 노래가 불리우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니 그 역사 또한 깊은 사연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2000년 당시 조선일보가 자발없이 이 노래는 “민족이 모두 힘을 합쳐 미 제국주의를 치자는 가사”라고 썼다가 망신을 당했던 것은 그 역사를 장식하는 작은 악세사리일 것이고.
1900년 9월 9일 전주 신흥학교의 역사가 한 사람의 학생으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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