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76년 9월 11일 7분에 3골 차범근 용되다
얼마 전 고대와 연대의 정기전에 딸을 데리고 갔었다. 고대 방송국이 제작한 영상 가운데 낯익은 스타들이 등장하여 고대의 승리를 기원하는 꼭지가 있었는데 그 서두를 장식한 스타가 차범근이었다. 우리 딸도 "차두리 아빠!"를 외쳤으니 적어도 그 자리에 임석한 수만 군중 가운데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 축구가 낳은 최고의 스타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요즘의 EPL과 맞먹는 권위를 지녔던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아흔 여덟 골이라는 골을 집어넣은 골잡이. 그 차범근이 한국인들의 뇌리에 깊숙히 틀어박힌 날은 1976년 9월 11일이었다.
태국의 킹스컵,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 배 등 고만고만한 동남아 국가들이 치르던 국제 축구 경기 대회를 못내 부러워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를 연다. 이름하여 '박스컵'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박제가 된 새도 날아가라 하면 날아갈만큼 무서운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이름을 딴 대회였다. 처음에는 동남아 국가들만 불러서 토닥토닥하는 경기였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브라질 프로팀도 불러오고 유럽 팀도 불러와서 국제 축구 대회의 격에 맞는 대회를 조성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관중이었다. 한국팀 경기야 미어터졌지만 기타 경기는 개미들만이 발에 땀을 쥐고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카가 무심코 채널을 돌리시다가 자신의 이름을 딴 명예로운 대회의 경기장이 텅텅 빈 모습을 보시면 이 아니 불경스러운 일이랴. 그래서 인근 고등학교들에 몽땅 휴교령을 내려 스탠드를 꽉곽 메운 것이 여러번이었다고 한다. 하여간 그때는 거의 남한도 북한이었다.
각설하고, 1976년 박스컵. 한국 대표팀은 화랑과 충무, 1진과 2진으로 나뉘어져 참가했다. 화랑팀에는 김호곤 박성화 황재만 최종덕 박상인 이영무 70년대 축구 좀 본 사람들이라면 생생하게 기억할 이름들이 버티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주전 라이트윙 차범근이 있었다. ('사이드 어태커'가 요즘 말이라지만 나는 라이트 윙 레프트 윙이 더 찰지게 입에 와 닿는다.) 화랑팀은 개막전 상대로 말레이시아를 만난다. 나는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있는 나라임을 축구를 통해 알았다. 골키퍼 아르무감이야 말레이 인종 이름인 것 같고, 제임스 웡 같은 이는 한눈에 혼혈같이 보였는데 한국 공격진에게는 웬수같은 이름이었던 수비수 소친원은 분명히 화교였던 것이다. 1976년 그 해 말레이시아 대표팀의 수비도 이 소친원이 이끌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에 곧잘 덜미를 잡히곤 했지만 그래도 말레이시아에 '완패'를 당할 실력은 아니었는데 이날은 이상했다. 어처구니없는 수비진 실수에다가 비만 오면 방방 뜨는, 수중전에 관한한 능력자였던 말레이시아의 공격진에 글쎄 전반전에만 3대0으로 넉다운을 당한 것이다. 후반전에 박상인이 어떻게 한 골을 넣었지만 말레이시아는 냉큼 또 한 골을 추가해 버렸다. 4대 1.
이 정도 스코어에 7분 남은 시간이라면 동네 축구에서도 볼짱다본 상황이다. 관중들은 안그래도 못하는 것들을 화랑이니 충무니 하면서 나눠 놨다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디 브라질도 아니고 말레이시아한테 4대1이라니 그냥 축구화 한강에 던져 버려라는 저주도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바로 그때 차범근의 왼발슛이 말레이시아 네트를 뚫었다. 나가던 관중들이 멈춰 섰지만 현실은 그래봐야 4대2였다. 슬금슬금 다시 출구를 향해 나서던 발걸음들이 다시 얼어붙은 것은 그리고 지축을 박차고 튀어오른 것은 4분뒤 42분이었다. 차범근이 또 골을 넣은 것이다. 관중들은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레이시아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가지고 놀던 한국팀은 어디로 가고 웬 도깨비같이 빠른 녀석이 문전을 헤집더니 두 골을 넣어버렸다.
그래도 3분만 버티면 된다 싶어 공을 내차던 말레이지아 대표팀 선수들이었지만 무슨 약먹은 것처럼 밀고 들어오는 한국 공격진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키 작은 스트라이커 김진국이 날카롭게 슛을 한 공이 문전으로 흘렀다. 그때 차범근이 나는 듯이 달려와 다리에 공을 걸치고 그냥 주저앉듯 밀어넣었다. 좀 폼은 안나는 골이었지만 기적같은 동점골이었다. 귀신에 홀린 표정을 하고 선 말레이지아 선수들과 흙탕물 고인 잔디 위에서 기뻐 날뛰는 한국 선수들은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 또한 축구의 맛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까지 차범근은 하고 많았던 대표팀 라이트 윙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해트트릭으로 그는 한국.축구 전설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그가 이룩한 금자탑에 비하면 그 전설이 빛이 바랠 지경이지만 그날의 해트트릭은 금자탑의 초석으로 모자람이 없는 승부였다. 그의 화려한 이후 경력과 사연을 적기엔 시간이 모자란다. 그가 축구 교실에서 가르치던 한 소년이 묘사한 그의 가장 멋있는 모습 하나만 소개해 본다.
내 기억에 그의 팀이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인 히딩크에게 팀에 오대영 패대기질을 당한 뒤 나라를 팔아먹은 듯한 역적으로 몰려 월드컵 도중에 귀국하고 얼마전 진상이 드러났던 승부조작 얘기를 했다가 제명까지 당하는.등 인생 최악의 시기 또는 그 언저리에서 대놓고 소외받던 시절의 일이다. 한 소년이 인터넷 까페에 한 사진을 올리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 뒤에 망치들고 계시는 저분 저분이 바로 우리 감독님 이시다.우리다칠까봐 망치들고 얼음 깨는 저분. 저분이 바로 세계속의 갈색 폭격기 우리 감독님이시다."
인생 최악의 순간에서도 도피하거나 웅크리지 않고 자신이 해 온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차붐. 적어도 그 순간 그 소년에게 차범근은 축구의 스승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976년 9월 11일 7분에 3골 차범근 용되다
얼마 전 고대와 연대의 정기전에 딸을 데리고 갔었다. 고대 방송국이 제작한 영상 가운데 낯익은 스타들이 등장하여 고대의 승리를 기원하는 꼭지가 있었는데 그 서두를 장식한 스타가 차범근이었다. 우리 딸도 "차두리 아빠!"를 외쳤으니 적어도 그 자리에 임석한 수만 군중 가운데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 축구가 낳은 최고의 스타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요즘의 EPL과 맞먹는 권위를 지녔던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아흔 여덟 골이라는 골을 집어넣은 골잡이. 그 차범근이 한국인들의 뇌리에 깊숙히 틀어박힌 날은 1976년 9월 11일이었다.
태국의 킹스컵,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 배 등 고만고만한 동남아 국가들이 치르던 국제 축구 경기 대회를 못내 부러워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를 연다. 이름하여 '박스컵'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박제가 된 새도 날아가라 하면 날아갈만큼 무서운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이름을 딴 대회였다. 처음에는 동남아 국가들만 불러서 토닥토닥하는 경기였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브라질 프로팀도 불러오고 유럽 팀도 불러와서 국제 축구 대회의 격에 맞는 대회를 조성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관중이었다. 한국팀 경기야 미어터졌지만 기타 경기는 개미들만이 발에 땀을 쥐고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카가 무심코 채널을 돌리시다가 자신의 이름을 딴 명예로운 대회의 경기장이 텅텅 빈 모습을 보시면 이 아니 불경스러운 일이랴. 그래서 인근 고등학교들에 몽땅 휴교령을 내려 스탠드를 꽉곽 메운 것이 여러번이었다고 한다. 하여간 그때는 거의 남한도 북한이었다.
각설하고, 1976년 박스컵. 한국 대표팀은 화랑과 충무, 1진과 2진으로 나뉘어져 참가했다. 화랑팀에는 김호곤 박성화 황재만 최종덕 박상인 이영무 70년대 축구 좀 본 사람들이라면 생생하게 기억할 이름들이 버티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주전 라이트윙 차범근이 있었다. ('사이드 어태커'가 요즘 말이라지만 나는 라이트 윙 레프트 윙이 더 찰지게 입에 와 닿는다.) 화랑팀은 개막전 상대로 말레이시아를 만난다. 나는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있는 나라임을 축구를 통해 알았다. 골키퍼 아르무감이야 말레이 인종 이름인 것 같고, 제임스 웡 같은 이는 한눈에 혼혈같이 보였는데 한국 공격진에게는 웬수같은 이름이었던 수비수 소친원은 분명히 화교였던 것이다. 1976년 그 해 말레이시아 대표팀의 수비도 이 소친원이 이끌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에 곧잘 덜미를 잡히곤 했지만 그래도 말레이시아에 '완패'를 당할 실력은 아니었는데 이날은 이상했다. 어처구니없는 수비진 실수에다가 비만 오면 방방 뜨는, 수중전에 관한한 능력자였던 말레이시아의 공격진에 글쎄 전반전에만 3대0으로 넉다운을 당한 것이다. 후반전에 박상인이 어떻게 한 골을 넣었지만 말레이시아는 냉큼 또 한 골을 추가해 버렸다. 4대 1.
이 정도 스코어에 7분 남은 시간이라면 동네 축구에서도 볼짱다본 상황이다. 관중들은 안그래도 못하는 것들을 화랑이니 충무니 하면서 나눠 놨다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디 브라질도 아니고 말레이시아한테 4대1이라니 그냥 축구화 한강에 던져 버려라는 저주도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바로 그때 차범근의 왼발슛이 말레이시아 네트를 뚫었다. 나가던 관중들이 멈춰 섰지만 현실은 그래봐야 4대2였다. 슬금슬금 다시 출구를 향해 나서던 발걸음들이 다시 얼어붙은 것은 그리고 지축을 박차고 튀어오른 것은 4분뒤 42분이었다. 차범근이 또 골을 넣은 것이다. 관중들은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레이시아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가지고 놀던 한국팀은 어디로 가고 웬 도깨비같이 빠른 녀석이 문전을 헤집더니 두 골을 넣어버렸다.
그래도 3분만 버티면 된다 싶어 공을 내차던 말레이지아 대표팀 선수들이었지만 무슨 약먹은 것처럼 밀고 들어오는 한국 공격진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키 작은 스트라이커 김진국이 날카롭게 슛을 한 공이 문전으로 흘렀다. 그때 차범근이 나는 듯이 달려와 다리에 공을 걸치고 그냥 주저앉듯 밀어넣었다. 좀 폼은 안나는 골이었지만 기적같은 동점골이었다. 귀신에 홀린 표정을 하고 선 말레이지아 선수들과 흙탕물 고인 잔디 위에서 기뻐 날뛰는 한국 선수들은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 또한 축구의 맛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까지 차범근은 하고 많았던 대표팀 라이트 윙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해트트릭으로 그는 한국.축구 전설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그가 이룩한 금자탑에 비하면 그 전설이 빛이 바랠 지경이지만 그날의 해트트릭은 금자탑의 초석으로 모자람이 없는 승부였다. 그의 화려한 이후 경력과 사연을 적기엔 시간이 모자란다. 그가 축구 교실에서 가르치던 한 소년이 묘사한 그의 가장 멋있는 모습 하나만 소개해 본다.
내 기억에 그의 팀이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인 히딩크에게 팀에 오대영 패대기질을 당한 뒤 나라를 팔아먹은 듯한 역적으로 몰려 월드컵 도중에 귀국하고 얼마전 진상이 드러났던 승부조작 얘기를 했다가 제명까지 당하는.등 인생 최악의 시기 또는 그 언저리에서 대놓고 소외받던 시절의 일이다. 한 소년이 인터넷 까페에 한 사진을 올리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 뒤에 망치들고 계시는 저분 저분이 바로 우리 감독님 이시다.우리다칠까봐 망치들고 얼음 깨는 저분. 저분이 바로 세계속의 갈색 폭격기 우리 감독님이시다."
인생 최악의 순간에서도 도피하거나 웅크리지 않고 자신이 해 온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차붐. 적어도 그 순간 그 소년에게 차범근은 축구의 스승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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