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34년 9월 8일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남과 북이 원수처럼 갈라서고 수많은 피를 호상간에 뿌린 이후 양쪽의 국립묘지는 만원사례를 이뤘다. 또 그곳에 묻힌 사람들은 대개 한쪽의 적이었고 단지 그가 그곳에 묻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쪽에선 무시되거나 배제되기 십상이었다. 한쪽에 의해 추앙받는 사람은 한쪽에선 역적이었고 한쪽에서 손가락질 받는 이가 한쪽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일은 흔하디 흔했다. 그런데 유일...
1934년 9월 8일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남과 북이 원수처럼 갈라서고 수많은 피를 호상간에 뿌린 이후 양쪽의 국립묘지는 만원사례를 이뤘다. 또 그곳에 묻힌 사람들은 대개 한쪽의 적이었고 단지 그가 그곳에 묻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쪽에선 무시되거나 배제되기 십상이었다. 한쪽에 의해 추앙받는 사람은 한쪽에선 역적이었고 한쪽에서 손가락질 받는 이가 한쪽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일은 흔하디 흔했다. 그런데 유일...
하게 남과 북 양쪽에서 존경받으며 비록 시신없는 허묘일망정 남과 북의 국립묘지 모두에 그 유택을 남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양세봉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평안북도 철산 사람이고 어려서 집안이 빈한하여 동네 서당의 소사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그가 열 다섯 살 나던 해 대한제국이 멸망한다. 초야에 묻힌 우국지사였던 훈장은 그날로 글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고 마을을 떠난다. “나라가 망했는데 글이 무슨 소용이랴?”했을 수도 있고 훗날의 양세봉같이 독립운동을 시작하려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훈장은 양세봉의 아버지에게 양세봉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한 말 한 마디를 남긴다. “세봉이는 영특한 아이입니다. 평생 농사를 지을지언정 일본놈들 위해 일하게 하지는 마시오.”
아버지는 그 말을 지킬 새도 없이 일찍 세상을 떴고 양세봉은 가족들을 거느린 10대 가장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땅 부쳐 먹기도 쉽지 않았던지 양세봉은 가족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다. “내 조국 산천을 등지고 건너는 압록강 목메어 부르는 불망의 조국” 당시의 수많은 농민들과 같이, 또 압록강 이남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독립군들과 같이. 그가 자리잡은 것은 지금의 요령성 신빈현이었다. 지금은 퇴락한 마을에 불과하지만 1920년대 말 신빈현 내 왕청문이라는 곳에는 독립군 통합 정부인 국민부의 수도가 자리잡고 있었고, 조선족 교포들은 그곳을 ‘서울’로 부를 정도였다.
양세봉 역시 일생을 중국인 땅 부쳐먹으며 보낼 팔자는 못되었다 1919년 3.1 봉기 당시 현지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조직했던 그는 1920년을 넘어서면 이미 총을 들고 싸우고 있었다. ‘천마산대’라는 독립군 조직의 일원으로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본 경찰서와 금광 사무실을 기습하기도 했고 독립군들의 훈련을 맡아 정예병력으로 조련함으로써 독립군 수뇌부의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의 활약 가운데 극적인 순간 몇 개를 들어 보면 이렇다. 한 번은 일본의 부영사가 봉천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복을 하고 있었는데 대장이 주저하여 명령을 내리지 못하자 양세봉이 나서서 공격을 퍼부은 다음 총알이 떨어지자 빈총을 들고 나서서 일본군을 위협하며 무장해제를 시킨 일이다. 그리고 일제가 가장 화들짝 놀란 순간은 1924년 사이토 총독 저격 미수 사건일 것이다. 사이토 총독이 압록강 경비정을 타고 순시에 나설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양세봉은 일제의 만주쪽 절벽에 저격수를 배치한다. 경비정이 가까이 접근하지 않아 성공 가능성은 적었지만 사이토 총독의 배를 향해 총구들이 불을 뿜었고 유유자적하며 자신의 치지(治地)를 돌아보던 대일본제국 조선 총독 사이토는 체면무시 전속력으로 달아나야 했다.
그로부터 근 10년 동안 양세봉은 독립군의 지휘자로, 그리고 만주 사변 이후 일제의 침략이 만주 전역을 뒤덮을 때는 중국 무장 세력과 연합한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일제와 싸웠다. 대다수의 독립군들이 좌우익으로 갈려 좌익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로 들어가고 우익들은 상해 등 중국 본토로 넘어갔을 때 만주에 남아서 일제와 싸운 것은 양세봉의 조선 혁명군 500여명이었다. “아무리 사고를 낸 부하라고 하더라도 부하에게 욕설하는 일이 일절 없었고 부하에게는 궐련을 사주면서 자신은 엽초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피웠다.” (부하 계기화의 회고)는 겸손하고 인간적이었던 양세봉은 영릉가 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 천여 명을 죽였고, 수백 명을 국내에 잠입시켜 공작을 펼치기도 하면서 만주 지역 일본군 최대의 공적이 됐다. 독립투쟁 역사상 그만큼 한 지역에서 오랫 동안 터를 잡고 버티며 일본군에 저항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고 만주에서 벌어진 좌우익 상잔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 일본에 맞선 상황이었지만 조선인들은 좌우익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했고 서로 공격하고 죽이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때 양세봉은 우익의 대표로 좌익과 맞섰고 좌익들에게 원수로 찍힐 정도였고 ‘극우’라는 평까지 듣는다. “좌익들은 조선혁명당 책임자 현익철, 총사령 양세봉, 그리고 참모장인 나 (김학규)를 3대 살인 반동 영수라고 불렀다.” (김학규) 의형제를 맺었던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 (후일의 김일성)를 만났던 것도 그 즈음의 일일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공동 반일 투쟁을 제안하는 김일성에게 이런 말을 하는 양세봉이 등장한다.
“그건 다 좌익에 섰다는 층이 정치를 잘못하는 탓이야. 대장도 좌익이라니 그런 물계는 잘 알겠지만 그들이 투쟁을 과격하게 내밀기 때문에 인심을 잃었단 말일세. 소작쟁의를 해서 농사군들을 폭군으로 만들구, 무슨 적색 5월이요 해가지고서는 지주를 처단하구 이렇게 하니까 중국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을 소 닭 보듯이 하거든. 이건 순전히 공산주의자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실책이야.” 이 말에 대해 김일성은 이런 해석을 내린다. ‘양세봉 자신도 독립운동에 관여하기 전까지는 지독한 영세농민으로 고생을 많이 해온 사람이었다..... 무우시래기에 피쌀을 섞어서 쑨 죽을 기아의 해들을 기적적으로 돌파해온 빈농민의 후예였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이 대중운동을 지도하는데서 범한 좌경적 오류는 유감스럽게도 새 사조를 동경하던 많은 사람들의 넋속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애정을 추방하는 가슴 아픈 결과를 빚어냈다. 나는 양세봉사령과의 담화를 통해서도 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 기성세대가 범한 과오의 후과가 얼마나 막대한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조선 호랑이, 좌익에 동조하지 않은 소작민 출신의 장군, 만주 군벌이었던 장학량의 수하로부터 “관우와 같은 능력자”라는 찬탄을 받았던 양세봉의 무운은 ·1934년 양세봉 잡기에 혈안이 된 일제에 매수된 밀정에 의해 끝난다. 1934년 9월 8일 중국 산림대 (마적단이라고 봐야 옳겠다)와의 제휴 제안을 받고 협의차 그들의 근거지로 가던 중 양세봉 일행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는다. 밀정 또한 총을 빼들고 “죽기 싫으면 일본군에 투항하라.”고 다그치는 상황에서 양세봉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며 저항했고 결국 일본군에게 죽음을 당한다. 동지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 봉분 없는 평토장으로 일단 모셨지만 집요한 일본군은 이 무덤을 파헤치고 목을 잘라 통화 시내에 효수했다. 그리고 그는 남북의 공동묘지에 모두 이름을 올린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는 평안북도 철산 사람이고 어려서 집안이 빈한하여 동네 서당의 소사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그가 열 다섯 살 나던 해 대한제국이 멸망한다. 초야에 묻힌 우국지사였던 훈장은 그날로 글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고 마을을 떠난다. “나라가 망했는데 글이 무슨 소용이랴?”했을 수도 있고 훗날의 양세봉같이 독립운동을 시작하려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훈장은 양세봉의 아버지에게 양세봉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한 말 한 마디를 남긴다. “세봉이는 영특한 아이입니다. 평생 농사를 지을지언정 일본놈들 위해 일하게 하지는 마시오.”
아버지는 그 말을 지킬 새도 없이 일찍 세상을 떴고 양세봉은 가족들을 거느린 10대 가장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땅 부쳐 먹기도 쉽지 않았던지 양세봉은 가족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다. “내 조국 산천을 등지고 건너는 압록강 목메어 부르는 불망의 조국” 당시의 수많은 농민들과 같이, 또 압록강 이남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독립군들과 같이. 그가 자리잡은 것은 지금의 요령성 신빈현이었다. 지금은 퇴락한 마을에 불과하지만 1920년대 말 신빈현 내 왕청문이라는 곳에는 독립군 통합 정부인 국민부의 수도가 자리잡고 있었고, 조선족 교포들은 그곳을 ‘서울’로 부를 정도였다.
양세봉 역시 일생을 중국인 땅 부쳐먹으며 보낼 팔자는 못되었다 1919년 3.1 봉기 당시 현지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조직했던 그는 1920년을 넘어서면 이미 총을 들고 싸우고 있었다. ‘천마산대’라는 독립군 조직의 일원으로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본 경찰서와 금광 사무실을 기습하기도 했고 독립군들의 훈련을 맡아 정예병력으로 조련함으로써 독립군 수뇌부의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의 활약 가운데 극적인 순간 몇 개를 들어 보면 이렇다. 한 번은 일본의 부영사가 봉천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복을 하고 있었는데 대장이 주저하여 명령을 내리지 못하자 양세봉이 나서서 공격을 퍼부은 다음 총알이 떨어지자 빈총을 들고 나서서 일본군을 위협하며 무장해제를 시킨 일이다. 그리고 일제가 가장 화들짝 놀란 순간은 1924년 사이토 총독 저격 미수 사건일 것이다. 사이토 총독이 압록강 경비정을 타고 순시에 나설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양세봉은 일제의 만주쪽 절벽에 저격수를 배치한다. 경비정이 가까이 접근하지 않아 성공 가능성은 적었지만 사이토 총독의 배를 향해 총구들이 불을 뿜었고 유유자적하며 자신의 치지(治地)를 돌아보던 대일본제국 조선 총독 사이토는 체면무시 전속력으로 달아나야 했다.
그로부터 근 10년 동안 양세봉은 독립군의 지휘자로, 그리고 만주 사변 이후 일제의 침략이 만주 전역을 뒤덮을 때는 중국 무장 세력과 연합한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일제와 싸웠다. 대다수의 독립군들이 좌우익으로 갈려 좌익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로 들어가고 우익들은 상해 등 중국 본토로 넘어갔을 때 만주에 남아서 일제와 싸운 것은 양세봉의 조선 혁명군 500여명이었다. “아무리 사고를 낸 부하라고 하더라도 부하에게 욕설하는 일이 일절 없었고 부하에게는 궐련을 사주면서 자신은 엽초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피웠다.” (부하 계기화의 회고)는 겸손하고 인간적이었던 양세봉은 영릉가 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 천여 명을 죽였고, 수백 명을 국내에 잠입시켜 공작을 펼치기도 하면서 만주 지역 일본군 최대의 공적이 됐다. 독립투쟁 역사상 그만큼 한 지역에서 오랫 동안 터를 잡고 버티며 일본군에 저항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고 만주에서 벌어진 좌우익 상잔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 일본에 맞선 상황이었지만 조선인들은 좌우익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했고 서로 공격하고 죽이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때 양세봉은 우익의 대표로 좌익과 맞섰고 좌익들에게 원수로 찍힐 정도였고 ‘극우’라는 평까지 듣는다. “좌익들은 조선혁명당 책임자 현익철, 총사령 양세봉, 그리고 참모장인 나 (김학규)를 3대 살인 반동 영수라고 불렀다.” (김학규) 의형제를 맺었던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 (후일의 김일성)를 만났던 것도 그 즈음의 일일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공동 반일 투쟁을 제안하는 김일성에게 이런 말을 하는 양세봉이 등장한다.
“그건 다 좌익에 섰다는 층이 정치를 잘못하는 탓이야. 대장도 좌익이라니 그런 물계는 잘 알겠지만 그들이 투쟁을 과격하게 내밀기 때문에 인심을 잃었단 말일세. 소작쟁의를 해서 농사군들을 폭군으로 만들구, 무슨 적색 5월이요 해가지고서는 지주를 처단하구 이렇게 하니까 중국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을 소 닭 보듯이 하거든. 이건 순전히 공산주의자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실책이야.” 이 말에 대해 김일성은 이런 해석을 내린다. ‘양세봉 자신도 독립운동에 관여하기 전까지는 지독한 영세농민으로 고생을 많이 해온 사람이었다..... 무우시래기에 피쌀을 섞어서 쑨 죽을 기아의 해들을 기적적으로 돌파해온 빈농민의 후예였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이 대중운동을 지도하는데서 범한 좌경적 오류는 유감스럽게도 새 사조를 동경하던 많은 사람들의 넋속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애정을 추방하는 가슴 아픈 결과를 빚어냈다. 나는 양세봉사령과의 담화를 통해서도 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 기성세대가 범한 과오의 후과가 얼마나 막대한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조선 호랑이, 좌익에 동조하지 않은 소작민 출신의 장군, 만주 군벌이었던 장학량의 수하로부터 “관우와 같은 능력자”라는 찬탄을 받았던 양세봉의 무운은 ·1934년 양세봉 잡기에 혈안이 된 일제에 매수된 밀정에 의해 끝난다. 1934년 9월 8일 중국 산림대 (마적단이라고 봐야 옳겠다)와의 제휴 제안을 받고 협의차 그들의 근거지로 가던 중 양세봉 일행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는다. 밀정 또한 총을 빼들고 “죽기 싫으면 일본군에 투항하라.”고 다그치는 상황에서 양세봉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며 저항했고 결국 일본군에게 죽음을 당한다. 동지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 봉분 없는 평토장으로 일단 모셨지만 집요한 일본군은 이 무덤을 파헤치고 목을 잘라 통화 시내에 효수했다. 그리고 그는 남북의 공동묘지에 모두 이름을 올린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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