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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3 어느 여배우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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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5년 9월 3일 어느 여배우의 일생

최진실, 고소영, 심은하는 9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였고 그들보다 반 반짝 앞서서는 김혜수 채시라 하희라의 하이틴 트로이카 시대가 있었다. 그 이전에는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의 3두마차가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문희 윤정희 남정임의 삼각편대가 영화계를 장악했다. 이 트로이카 즉 삼두마차 운운의 수식어는 주로 여자 배우들에게 붙여지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에 갓 피어나기 시작한 여배우들의 역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0년대 조선의 3대 여배우로 꼽혔던 이는 이월화, 복혜숙, 그리고 석금성이었다.

이월화는 1923년 <월하의 맹서>에서 그녀는 최초로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이고 복혜숙과 석금성은 극단 토월회의 전성기를 구가한 여배우들이며, 해방 이후 20세기 후반을 관통하는 세월에 이르도록 스크린을 지켰던 이들이었다. 그 중 석금성의 본명은 석정희(石貞姬)였다고 한다. 아담한 맵시와 천진난만한 애교로써 장안의 인기를 한 몸에 모았다는 기생 석정희는 신극 운동단체인 토월회(土月會) 전무 이서구의 눈에 들어 토월회에 입단한 후 석금성(石金星)이란 이름을 얻으면서 배우가 되었다. 이 즈음 입단했던 복혜숙은 80원, 석금성은 60원의 월급을 받는데 이것이 이른바 ‘프로 여배우’의 시초였다 할 것이다. 1925년 어느 날 공연을 하는데 한 관중이 사과를 던진 것이 그녀의 배에 명중했다. 하필이면 그녀는 그때 임신 중이었던 바 그대로 졸도하고 말았다. 엉겁결에 그 대타로 올라왔다가 또 하나의 스타가 된 것이 ‘눈물의 여왕’ 전옥이다. 비극 연기의 최고봉으로 유명해진 전옥은 배우 최민수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석금성이 스타덤에 올랐던 작품 중의 하나는 ‘아리랑 고개’였다. 대충 내용을 소개하면 가난한 연인들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데 일본인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끼어든다.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는 남자 주인공에게 돈을 갚으라고 핍박하고 결국 남자 주인공은 집을 떠나야 했다. 이때 피눈물나는 이별의 현장에서 이별가로 <아리랑>이 불리워지는데 여주인공 석금성이 이 노래를 부르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 연극이 성황리에 공연되던 도중의 어느 날, 석금성은 딸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그 망연자실한 상황에서 석금성은 무대에 올랐고, 그 슬픔은 연기로 승화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을 통곡시켰다고 한다.

한편 석금성은 1920년대 후반에는 무대를 떠나 평범한 삶을 영위하기도 한다. 매일신보 1930년 10월 3일자에는 ‘무대배우 석금성(웃음 속에 피는 눈물)’이란 기사가 실린다. 여기서 석금성은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본시 기생 출신으로 봄바람에 나부끼는 노류장화(路柳墻花)의 생활도 해보았고, 또 남의 여염집 주부 노릇도 하여 보다가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봄에 다시 광무대(光武臺)에서 공연 중인 토월회에 가입한 것이 여배우로 행세하게 된 첫 발단이 된 것입니다. 첫 무대는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의 추향(秋香)이었고, 연극을 하는 사이사이에 ‘약혼(約婚)’과 같은 영화에도 출연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마는, 나에게는 암만 해도 무대극이 적당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의 성격으로 봐서 가장 적역(適役)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토월회에서 공연한 ‘스잔나’와 기타 천진스러운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날뛰고 까부는 역인 것 같습니다.”    
 그 끼는 여전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연기와 캐릭터 분석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집 가서 조신하게 애 낳고 살 팔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후일 “......나는 물불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그저 맹목적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가정에서나 친구한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합니다.”라고 회고했던 그녀는 이미 연기에 홀려 있던 사람이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무대에 서고,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대사를 외웠던 그녀는 천상 배우였다.

1931년쯤이면 석금성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돼 있었다. 이 결혼은 꽤 성공적이었는데 그 남편은 다름아닌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이며 경성방송국의 아나운서이자 PD였던 최승일이었다. 석금성은 최승일과의 사이에서 4남매를 낳으며 단란한 생활을 한다. 그러나 분단이 이들을 갈라 놓는다. 이북으로 올라간 최승희를 돕겠다고 38선을 넘은 남편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석금성은 4남매 전부를 북으로 올려 보낸다. 그 가운데 후일 북한의 최고 여류 시인이 된 딸 최로사는 어머니가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했지만 혹시 그녀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배우가 되어 보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반 세기 동안 그녀는 외롭지만 열정적인 여배우로 스크린을 수놓는다. 스스로 본격적인 영화계 입문이라 회고한 <춘향전> 이후 그녀가 주로 맡은 역할은 표독한 시어머니나 완고한 노부인이었다.  특히 <장화홍련전>에서는 표독스런 계모 역으로 개성적인 연기파 배우로서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60~70년대 한국영화에서 한복에 털조끼를 걸친 채 호령하고 군림하는 부인 역을 맡은 배우는 석금성이기 십상이다. 노역을 많이 하기로는 황정순도 만만치 않지만 둘의 차이는 명백하다. 석금성은 희생적인 모성애를 가진 자애롭고 따뜻한 어머니이기보다는 매서운 눈매로 질책하는 호된 시어머니, 앙칼지고 근엄한 사장 부인, 화통하고 강인한 어머니이다. 엄한 시어머니와 착한 며느리, 기센 부인과 무능한 남편, 강인한 어머니와 나약한 아들, 위세부리는 부잣집 마나님, 선악이 있는 것처럼 ‘부인, 어머니’상에도 양 극단이 있었고 그 한쪽 끝에는 항상 석금성이 있었다.” (여성 영화인 사전)

그녀는 토월회로 대변되는 연극과 그 이후 시작된 조선 영화, 그리고 한국 영화의 전성기라 할 60년대와 흑백 TV, 컬러 TV까지를 그 이력으로 꿰뚫었던 거의 유일한 배우였다. SBS 드라마 <분례기>(1991)에 출연할 때 그녀의 나이는 여든 다섯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큰 적은 외로움이었다. 1991년 딸 로사와 고모의 뒤를 잇는 무용가가 된 아들의 소식을 전해 들었고 만남에 대한 기대에 설레기도 했지만 끝내 그들의 손을 잡을 기회는 오지 않았다. <분례기>에 출연할 때 알게 된 아역 배우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 집에서 4년을 지내는 동안 그녀는 하루에 3갑씩 담배를 태우는 것으로 쓸쓸함을 달래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 1995년 9월 3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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