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19년 9월 2일 강우규와 김태석
조선 천지를 뒤흔들었던 3.1 항쟁이 가라앉고 조선에는 새 총독이 부임하여 온다. 사이토 마코토 해군 대장이었다. 해군 대장 제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기차에서 내린 사이토 마코토는 즐비하게 늘어선 호위 속에 총독 전용 마차를 향했다. 일장기를 흔드는 환영 인파는 많았지만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뒤숭숭했다. ‘조선 독립 만세’의 굉음의 메아리가 아직 생생할 때였으니 그랬으리라. 하지만 그 따위 만세 어림도 없다는 듯 조선 총독의 늠름한 행보는 조선 사람들을 위압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이토 총독이 마차에 오르기 직전, 남대문 역 전체를 뒤흔드는 폭음이 울려퍼졌다. 질서정연하던 역두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총독을 노리고 누군가 던진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일본 아사히 신문 특파원을 비롯하여 2명이 죽고 35명이 부상당했다. 총독은 간발의 차로 무사했다. 파편 하나가 허리에 차고 있던 대검에 맞은 정도가 그가 입은 피해의 전부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눈은 뒤집혔다. 총독이 부임하는 날 폭탄 세례를 받았다! 그네들 천황에 대한 송구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
개 발바닥 땀나도록 뛰어다니던 일본 경찰은 사건 보름 후 범인을 체포한다. 범인은 놀랍게도 예순 다섯의 노인 강우규였다. 평안도 덕천에서 태어났지만 함경도 홍원에서 이주해서 의업으로 재산을 모았고 만주로 가서는 그 돈을 학교 설립에 털어넣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 그의 신상명세였다. 그는 폭탄을 가랑이 사이에 두르고 (이 은닉 수법은 먼 훗날 이봉창까지 사용한다) 남대문 역 귀빈실까지 잠임하여 거사를 결행한 것이다. 요즘이야 예순 다섯은 경로우대도 간당간당한 나이지만 그때는 잘하면 증손자도 볼 수 있는 아랫목 지킴이에 넉넉한 나이였다. 그런 노인이 폭탄을 던지다니 뒤통수를 맞아도 제대로 맞은 셈이었다.
그 얼얼한 뒤통수를 복수라도 하듯 일본 경찰은 강우규에게 그야말로 악형을 가한다. 모진 고문 끝에 그 혀가 세 치나 빠져나온 것을 보았다고 하거니와 강우규는 이미 사형 전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강우규의 기는 꺾이지 않았다. 감옥에 앉아서도 성경 봉독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는 이 독실한 기독교인이 만약 “권세 있는 자는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이니 너희는 그에 복종하라.”는 따위, 대한민국의 목사들이 지껄이는 설교를 들었다면 의자를 집어던졌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두 번씩이나 법정에서 의자를 집어던졌듯이. “우국지사였지요. 정말 과장 안하고 우국지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순 몇 살의 노인이 탁상을 두드리며 독립의 열정을 피력합니다. 비장했습니다.” (시바 료.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그는 변호인 선임도 거부한 채 사형을 선고받는다. 아들에게 남긴 한 마디는 실로 마음이 뭉클하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 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조선 청년의 가슴에 인상만 박힌다면 그만이다.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고 하는 조선 청년들이 보고 싶다! 아 보고 싶다!” (아들 중건에게 남긴 유언) 청년들에게 ‘무슨 이상한’ 느낌이라도 주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한 노인. 사형대 앞에서도 유장하게 시를 읊던 이 교양인은 1920년 지금도 남아 있는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 강우규를 체포한 사람은 역시 조선인이었다. 이름은 김태석. 역시 강우규처럼 평안도 출신이었다. 강우규처럼 학교 교사 노릇도 했던 그는 조선 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들어가면서 전혀 다른 인생을 걷게 된다. 그도 사이토 총독이 오던 날 남대문 역에 있었고 강우규가 폭탄을 던지는 것도 보았다. 또 그 파편으로 인해 정강이에 상처를 입었다. 독기를 품은 김태석은 수사에 나서 강우규를 체포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강우규의 혀를 세 치나 빠져나오게 했던 그 고문의 당사자가 바로 그였다.
또 의열단 최초의 거사인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 때 그는 관련자 15명을 아예 곤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김태석은 경찰을 나와 군수와 참여관, 중추원 참의 등 고위관직을 지내다가 해방을 맞는다. 그는 당연히 반민특위의 최고 관심 대상으로 체포되는데 그때 그는 밀양 경찰서 사건의 기억과 맞닥뜨린다. 홍종린이라는 사람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당시 학생이던 나의 동지 윤필환 이하 15명을 체포하여 고문과 극형을 가했고 나중에는 죽게까지 한 자가 바로 이자다!”
하지만 김태석은 철저하게 사실을 부인하려 들었다. 자기는 심부름꾼에 불과했고 ‘고쓰가히’ 즉, 소사에 지나지 않았고 심지어 3.1 운동 당시 자신도 만세를 불렀으며 독립운동자를 구해 낸 애국자로 떠들어 댔다. 강우규의 의연함과는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먼 비굴함이었고 조선 사람들의 가슴에 “무슨 이상한” 느낌이 아니라 “이뭐병같은” 분노를 심어 주기에 충분한 뻔뻔함이었다.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지만 1950년 봄 그는 스리슬쩍 석방되어 유유자적 역사의 커튼 뒤로 사라진다. 그는 그 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감방 똥통 냄새도 몇 달 맡지 않았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가 서울에 발을 디디던 날 그를 죽이고자 했고 그를 지키고자 했던 평안도 출신 두 남자의 일생은 그렇게 극명하게 대비된다.
1919년 9월 2일 강우규와 김태석
조선 천지를 뒤흔들었던 3.1 항쟁이 가라앉고 조선에는 새 총독이 부임하여 온다. 사이토 마코토 해군 대장이었다. 해군 대장 제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기차에서 내린 사이토 마코토는 즐비하게 늘어선 호위 속에 총독 전용 마차를 향했다. 일장기를 흔드는 환영 인파는 많았지만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뒤숭숭했다. ‘조선 독립 만세’의 굉음의 메아리가 아직 생생할 때였으니 그랬으리라. 하지만 그 따위 만세 어림도 없다는 듯 조선 총독의 늠름한 행보는 조선 사람들을 위압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이토 총독이 마차에 오르기 직전, 남대문 역 전체를 뒤흔드는 폭음이 울려퍼졌다. 질서정연하던 역두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총독을 노리고 누군가 던진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일본 아사히 신문 특파원을 비롯하여 2명이 죽고 35명이 부상당했다. 총독은 간발의 차로 무사했다. 파편 하나가 허리에 차고 있던 대검에 맞은 정도가 그가 입은 피해의 전부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눈은 뒤집혔다. 총독이 부임하는 날 폭탄 세례를 받았다! 그네들 천황에 대한 송구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
개 발바닥 땀나도록 뛰어다니던 일본 경찰은 사건 보름 후 범인을 체포한다. 범인은 놀랍게도 예순 다섯의 노인 강우규였다. 평안도 덕천에서 태어났지만 함경도 홍원에서 이주해서 의업으로 재산을 모았고 만주로 가서는 그 돈을 학교 설립에 털어넣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 그의 신상명세였다. 그는 폭탄을 가랑이 사이에 두르고 (이 은닉 수법은 먼 훗날 이봉창까지 사용한다) 남대문 역 귀빈실까지 잠임하여 거사를 결행한 것이다. 요즘이야 예순 다섯은 경로우대도 간당간당한 나이지만 그때는 잘하면 증손자도 볼 수 있는 아랫목 지킴이에 넉넉한 나이였다. 그런 노인이 폭탄을 던지다니 뒤통수를 맞아도 제대로 맞은 셈이었다.
그 얼얼한 뒤통수를 복수라도 하듯 일본 경찰은 강우규에게 그야말로 악형을 가한다. 모진 고문 끝에 그 혀가 세 치나 빠져나온 것을 보았다고 하거니와 강우규는 이미 사형 전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강우규의 기는 꺾이지 않았다. 감옥에 앉아서도 성경 봉독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는 이 독실한 기독교인이 만약 “권세 있는 자는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이니 너희는 그에 복종하라.”는 따위, 대한민국의 목사들이 지껄이는 설교를 들었다면 의자를 집어던졌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두 번씩이나 법정에서 의자를 집어던졌듯이. “우국지사였지요. 정말 과장 안하고 우국지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순 몇 살의 노인이 탁상을 두드리며 독립의 열정을 피력합니다. 비장했습니다.” (시바 료.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그는 변호인 선임도 거부한 채 사형을 선고받는다. 아들에게 남긴 한 마디는 실로 마음이 뭉클하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 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조선 청년의 가슴에 인상만 박힌다면 그만이다.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고 하는 조선 청년들이 보고 싶다! 아 보고 싶다!” (아들 중건에게 남긴 유언) 청년들에게 ‘무슨 이상한’ 느낌이라도 주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한 노인. 사형대 앞에서도 유장하게 시를 읊던 이 교양인은 1920년 지금도 남아 있는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 강우규를 체포한 사람은 역시 조선인이었다. 이름은 김태석. 역시 강우규처럼 평안도 출신이었다. 강우규처럼 학교 교사 노릇도 했던 그는 조선 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들어가면서 전혀 다른 인생을 걷게 된다. 그도 사이토 총독이 오던 날 남대문 역에 있었고 강우규가 폭탄을 던지는 것도 보았다. 또 그 파편으로 인해 정강이에 상처를 입었다. 독기를 품은 김태석은 수사에 나서 강우규를 체포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강우규의 혀를 세 치나 빠져나오게 했던 그 고문의 당사자가 바로 그였다.
또 의열단 최초의 거사인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 때 그는 관련자 15명을 아예 곤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김태석은 경찰을 나와 군수와 참여관, 중추원 참의 등 고위관직을 지내다가 해방을 맞는다. 그는 당연히 반민특위의 최고 관심 대상으로 체포되는데 그때 그는 밀양 경찰서 사건의 기억과 맞닥뜨린다. 홍종린이라는 사람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당시 학생이던 나의 동지 윤필환 이하 15명을 체포하여 고문과 극형을 가했고 나중에는 죽게까지 한 자가 바로 이자다!”
하지만 김태석은 철저하게 사실을 부인하려 들었다. 자기는 심부름꾼에 불과했고 ‘고쓰가히’ 즉, 소사에 지나지 않았고 심지어 3.1 운동 당시 자신도 만세를 불렀으며 독립운동자를 구해 낸 애국자로 떠들어 댔다. 강우규의 의연함과는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먼 비굴함이었고 조선 사람들의 가슴에 “무슨 이상한” 느낌이 아니라 “이뭐병같은” 분노를 심어 주기에 충분한 뻔뻔함이었다.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지만 1950년 봄 그는 스리슬쩍 석방되어 유유자적 역사의 커튼 뒤로 사라진다. 그는 그 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감방 똥통 냄새도 몇 달 맡지 않았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가 서울에 발을 디디던 날 그를 죽이고자 했고 그를 지키고자 했던 평안도 출신 두 남자의 일생은 그렇게 극명하게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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