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1년 9월 1일 서울에 온 황태성
1961년 8월말. 몇 명의 사내들이 휴전선을 넘었다. 늦장마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즈음 임진강을 헤엄쳐 건넌 사내들은 경기도 장흥과 의정부를 거쳐 서울 우이동 계곡까지 들어온 후 헤어졌다. 그들 중 한명은 공작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늙어 보였다. 머리 반은 백발에 튀어나온 광대뼈가 완연했던 그는 병으로 폐 한쪽을 들어냈던만큼 공작원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남파한 사람들도 그의 건강을 우려했지만 그가 맡은 임무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황동지 꼭 과업 완수하시라요." 이북 사투리로 인사 건네는 공작원들에게 답하는 초로의 신사는 뜻밖에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욕 봤소. 몸조심들 하시오." 그의 이름은 황태성이었다. 그는 새로이 남한의 지배자로 떠오른 박정희라는 작달막한 별 두 개짜리 장군을 만나기 위해 남파됐다. 무역성 부상이라는 (어떤 설에 의하면 부상이 아니라 무역상이었다고도 하는데) 높은 전직 직함까지 갖고 있던 그가 공작원으로까지 차출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가가 상희 동생 정희라면 내가 잘 안다 아입니까. 내가 내리가서 담판을 짓겠습니더."
그는 일제 때부터 소문난 반골이었다. 1920년대에 서울로 올라와 6·10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경성고보 4학년때는 일본인 교장배척운동에 앞장서다가 퇴학을 당했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때도 항일운동에 관계하다가 역시 퇴학을 맞았다. 조선공산당 창당에도 참여했던 사회주의자 황태성은 수 차례 감방을 들락거렸고 고향에 내려와서도 김천 선산 지역에서 청년위 활동을 하며 일본 관헌들을 긴장시킨 사람이었다. 그런 그와 함께 청년 운동을 주도한 박상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관계가 얼마나 절친했는지 황태성이 중매를 서자 박상희는 부인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결혼을 응낙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김종필 전 공화당 총재의 아내가 된다.
박상희에게는 똑똑해 보이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나이가 열 살 차이여서 서먹했던 형보다는 형의 친구 황태성을 더 좋아라 따랐다는 소년의 이름은 박정희다. 그는 매사에 황태성의 말을 따랐고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황태성과 협의하곤 했다. 대구사범에 들어갈 때도 머리를 맞댔고 일본인 교장과 충돌한 후"큰칼 차고 싶어" 만주군관학교로 갈 때에도 그는 황태성의 의견을 구했다. 그런데 감옥을 수 차례 들락거린 일본 관헌의 요시찰 인물 황태성은 기이하게도 박정희의 결정을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뭘 배우든지 우리한테도 때가 올끼고 네가 배운 게 우리 민족에 도움이 될 끼다."
왜 그랬을까. 비록 황태성이 일제하에서 전향하여 어느 조합 간부로 연명하고 있을 때긴 했지만 박정희에게 천황폐하의 충량한 신하가 되라고 만주행을 권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해방 이후 황태성은 1946년 10월 1일의 농민 봉기의 중심에 섰고 좌익과 우익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가운데 자신의 아들과 절친한 친구 박상희를 동시에 잃는다. 그 시절 남로당원으로서 그는 한 명의 국방경비대 장교의 입당에 신원보증을 서게 되는데 바로 자신이 귀여워했고 만주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휴가 때만 되면 찾아왔다는 친구의 동생 박정희였다.
1961년 9월 1일 황태성은 고향 친구의 아들인 김민하의 집에 나타나 자신이 황태성임과 북한에서 온 밀사임을 밝힌다. 불구대천의 기세로 총칼을 겨냥하고 있던 적지의 수도 한복판에 나타난 밀사. 그는 남한의 새 실권자 박정희와 접촉하려고 애쓴다.
"가는 내가 잘 아는 아입니다. 나를 존경하던 사람입니다. 내 말은 통할 겁니다." 남파되기 전 황태성은 대남공작을 책임지던 이효립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또 남한의 김민하에게도 자신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이며 박정희 장군을 만나 남북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생각을 나눠 보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혁명정부 지도자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는 조카의 설득도 무위였다. 적어도 황태성에게 박정희는 사범학교를 갔다가 군인이 되고파 만주고 떠날때 찾아와서는 우짜면 좋겠십니꺼 진지하게 고민하던 영특한 청년 그 이상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앞에만 가면 과거의 믿음과 추억이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고 남과 북의 대립을 누그러뜨릴 계기가 자기와 박정희로 인해 마련되리라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지 못했다.
그는 옛 친구의 부인이자 쿠데타 군의 총수의 형수에게 연락을 넣었다가 그 정체가 알려지고 그는자신의 친구의 조카사위 김종필이 거느린 중앙정보부에 체포된다. 그는 박정희를 애타게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고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또한 김종필을 가장한 수사관이었다. 언젠가는 민족을 위해 써먹을 수 있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했던 청년, 자신이 입당보증인이 되어 남로당에 입당시켰던 군인, "이념에 충실했던 것은 맞으나 이념보다는 권력이 더 충실했고 이념조차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 (CIA 직원의 평가) 박정희는 황태성을 끝내 만나지 않았다. 그는 사진으로만 황태성을 보며 "황선생님도 세월을 피해가지 못하시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무모할만큼 순진했던 황태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일종의 매카시즘이었다. 남로당 경력으로 인해 박정희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자로 공격받았고 군정 종식.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후보 윤보선은 박정희가 황태성이 가져온 20만달러로 공화당을 창당했다는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이런 공격에 대해 "비열한 매카시즘"이라고 분노했다니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성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재미 언론인 문명자는 정보부장 김형욱이 망설이던 박정희를 밀어부쳐 사형 재가를 받아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 미국도 박정희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고 한국 민간인들 중에도 저 빨갱이의 정체를 밝히겠노라 뒷조사를 하는 이들까지 생겨나고 공화당이 북한의 지원으로 창당됐다는 언설이 난무한 차에 황태성을 살려 두거나 북으로 귀환시킨다는 것은 스스로의 목젖에 대침을 찌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황태성은 결국 총살됐다. 그는 남으로 내려온 목적 가운데 어느것도 이루지 못한채 자신이 그렇게 믿었던 후배를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단 하나 그가 이룬 것이 있다면 대구 봉기 때 목숨을 잃은 아들의 딸. 즉 손녀를 문틈으로나마 지켜본 것이다.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없이 자라난 손녀를 바라보는 그 심경은 어땠을까. 박정희를 만나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보다 더 처참하고 안타깝게 그 가슴을 쥐어짜지 않았을까.
불행한 한국인 또는 조선인 황태성은 그렇게 죽었다. 그의 유해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황태성 선생'을 기억하여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 그가 어떤 이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1961년 9월 1일 비운의 밀사 황태성이 서울에 나타났다.
1961년 9월 1일 서울에 온 황태성
1961년 8월말. 몇 명의 사내들이 휴전선을 넘었다. 늦장마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즈음 임진강을 헤엄쳐 건넌 사내들은 경기도 장흥과 의정부를 거쳐 서울 우이동 계곡까지 들어온 후 헤어졌다. 그들 중 한명은 공작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늙어 보였다. 머리 반은 백발에 튀어나온 광대뼈가 완연했던 그는 병으로 폐 한쪽을 들어냈던만큼 공작원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남파한 사람들도 그의 건강을 우려했지만 그가 맡은 임무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황동지 꼭 과업 완수하시라요." 이북 사투리로 인사 건네는 공작원들에게 답하는 초로의 신사는 뜻밖에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욕 봤소. 몸조심들 하시오." 그의 이름은 황태성이었다. 그는 새로이 남한의 지배자로 떠오른 박정희라는 작달막한 별 두 개짜리 장군을 만나기 위해 남파됐다. 무역성 부상이라는 (어떤 설에 의하면 부상이 아니라 무역상이었다고도 하는데) 높은 전직 직함까지 갖고 있던 그가 공작원으로까지 차출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가가 상희 동생 정희라면 내가 잘 안다 아입니까. 내가 내리가서 담판을 짓겠습니더."
그는 일제 때부터 소문난 반골이었다. 1920년대에 서울로 올라와 6·10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경성고보 4학년때는 일본인 교장배척운동에 앞장서다가 퇴학을 당했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때도 항일운동에 관계하다가 역시 퇴학을 맞았다. 조선공산당 창당에도 참여했던 사회주의자 황태성은 수 차례 감방을 들락거렸고 고향에 내려와서도 김천 선산 지역에서 청년위 활동을 하며 일본 관헌들을 긴장시킨 사람이었다. 그런 그와 함께 청년 운동을 주도한 박상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관계가 얼마나 절친했는지 황태성이 중매를 서자 박상희는 부인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결혼을 응낙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김종필 전 공화당 총재의 아내가 된다.
박상희에게는 똑똑해 보이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나이가 열 살 차이여서 서먹했던 형보다는 형의 친구 황태성을 더 좋아라 따랐다는 소년의 이름은 박정희다. 그는 매사에 황태성의 말을 따랐고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황태성과 협의하곤 했다. 대구사범에 들어갈 때도 머리를 맞댔고 일본인 교장과 충돌한 후"큰칼 차고 싶어" 만주군관학교로 갈 때에도 그는 황태성의 의견을 구했다. 그런데 감옥을 수 차례 들락거린 일본 관헌의 요시찰 인물 황태성은 기이하게도 박정희의 결정을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뭘 배우든지 우리한테도 때가 올끼고 네가 배운 게 우리 민족에 도움이 될 끼다."
왜 그랬을까. 비록 황태성이 일제하에서 전향하여 어느 조합 간부로 연명하고 있을 때긴 했지만 박정희에게 천황폐하의 충량한 신하가 되라고 만주행을 권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해방 이후 황태성은 1946년 10월 1일의 농민 봉기의 중심에 섰고 좌익과 우익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가운데 자신의 아들과 절친한 친구 박상희를 동시에 잃는다. 그 시절 남로당원으로서 그는 한 명의 국방경비대 장교의 입당에 신원보증을 서게 되는데 바로 자신이 귀여워했고 만주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휴가 때만 되면 찾아왔다는 친구의 동생 박정희였다.
1961년 9월 1일 황태성은 고향 친구의 아들인 김민하의 집에 나타나 자신이 황태성임과 북한에서 온 밀사임을 밝힌다. 불구대천의 기세로 총칼을 겨냥하고 있던 적지의 수도 한복판에 나타난 밀사. 그는 남한의 새 실권자 박정희와 접촉하려고 애쓴다.
"가는 내가 잘 아는 아입니다. 나를 존경하던 사람입니다. 내 말은 통할 겁니다." 남파되기 전 황태성은 대남공작을 책임지던 이효립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또 남한의 김민하에게도 자신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이며 박정희 장군을 만나 남북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생각을 나눠 보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혁명정부 지도자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는 조카의 설득도 무위였다. 적어도 황태성에게 박정희는 사범학교를 갔다가 군인이 되고파 만주고 떠날때 찾아와서는 우짜면 좋겠십니꺼 진지하게 고민하던 영특한 청년 그 이상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앞에만 가면 과거의 믿음과 추억이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고 남과 북의 대립을 누그러뜨릴 계기가 자기와 박정희로 인해 마련되리라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지 못했다.
그는 옛 친구의 부인이자 쿠데타 군의 총수의 형수에게 연락을 넣었다가 그 정체가 알려지고 그는자신의 친구의 조카사위 김종필이 거느린 중앙정보부에 체포된다. 그는 박정희를 애타게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고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또한 김종필을 가장한 수사관이었다. 언젠가는 민족을 위해 써먹을 수 있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했던 청년, 자신이 입당보증인이 되어 남로당에 입당시켰던 군인, "이념에 충실했던 것은 맞으나 이념보다는 권력이 더 충실했고 이념조차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 (CIA 직원의 평가) 박정희는 황태성을 끝내 만나지 않았다. 그는 사진으로만 황태성을 보며 "황선생님도 세월을 피해가지 못하시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무모할만큼 순진했던 황태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일종의 매카시즘이었다. 남로당 경력으로 인해 박정희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자로 공격받았고 군정 종식.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후보 윤보선은 박정희가 황태성이 가져온 20만달러로 공화당을 창당했다는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이런 공격에 대해 "비열한 매카시즘"이라고 분노했다니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성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재미 언론인 문명자는 정보부장 김형욱이 망설이던 박정희를 밀어부쳐 사형 재가를 받아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 미국도 박정희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고 한국 민간인들 중에도 저 빨갱이의 정체를 밝히겠노라 뒷조사를 하는 이들까지 생겨나고 공화당이 북한의 지원으로 창당됐다는 언설이 난무한 차에 황태성을 살려 두거나 북으로 귀환시킨다는 것은 스스로의 목젖에 대침을 찌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황태성은 결국 총살됐다. 그는 남으로 내려온 목적 가운데 어느것도 이루지 못한채 자신이 그렇게 믿었던 후배를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단 하나 그가 이룬 것이 있다면 대구 봉기 때 목숨을 잃은 아들의 딸. 즉 손녀를 문틈으로나마 지켜본 것이다.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없이 자라난 손녀를 바라보는 그 심경은 어땠을까. 박정희를 만나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보다 더 처참하고 안타깝게 그 가슴을 쥐어짜지 않았을까.
불행한 한국인 또는 조선인 황태성은 그렇게 죽었다. 그의 유해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황태성 선생'을 기억하여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 그가 어떤 이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1961년 9월 1일 비운의 밀사 황태성이 서울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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