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9.9.4 개그콘서트 시작
어린 시절의 기억의 끄트머리까지 더듬어 볼 때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최초의 코미디는 '각국의 시계' (내가 붙인 이름임) 였다. 이기동과 배삼룡 등이 나와서 각 나라의 시계 소리를 들려 주는 것이었다. 한국인은 똑딱똑딱 소리를 내고 들어갔지만 중국인이 나와서는 "똑이다 해서 딱이다 해" 하고 시계가 간다고 했고, 일본인 분장을 하고 나온 땅딸이 이기동은 "똑이노 딱이노"...
1999.9.4 개그콘서트 시작
어린 시절의 기억의 끄트머리까지 더듬어 볼 때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최초의 코미디는 '각국의 시계' (내가 붙인 이름임) 였다. 이기동과 배삼룡 등이 나와서 각 나라의 시계 소리를 들려 주는 것이었다. 한국인은 똑딱똑딱 소리를 내고 들어갔지만 중국인이 나와서는 "똑이다 해서 딱이다 해" 하고 시계가 간다고 했고, 일본인 분장을 하고 나온 땅딸이 이기동은 "똑이노 딱이노"...
일본 시계가 간다고 했다. 히트는 배삼룡이었다. 거지 분장을 하고 등장한 배삼룡은 북한인이었다. 그는 시계를 들고 이렇게 멘트하여 어린 나를 뒤집어지게 했다. "똑이니끼니 딱이야요."
아마도 그 프로그램은 <웃으면 복이와요>일 것이다. 나에게는 추억 속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명사가 되어 있는 이 프로그램은 1969년에 시작해서 1985년에 막을 내렸다가 그 뒤 잠깐 부활하고 사라졌다가 또 비슷한 이름으로 반짝 나왔다가 없어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국내 최장수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남아 있다. 그 뒤를 잇는 랭킹 2위의 프로그램이지만 아마도 내 아들과 딸에게는 나에게 <웃으면 복이 와요>와 같은 등급의 지존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남을 프로그램이 1999년 9월 4일 그 서막을 열어젖혔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개그 콘서트>다. 아마 아이들은 내가 그렇듯 평생 동안 <개콘>의 한 부분을 추억하며 웃음을 짓고 친구들 사이의 화제로 간직하고 과거를 되돌리는 타임머신의 엔진으로 갈무리해 둘 것이다.
유난히 성장이 빨랐던 아들은 돌잔치 때 뛰어나닐 정도였는데 또 유별나게 자주 넘어져 머리를 바닥에 박으면서 꿍꿍 소리를 내서 자지러지게 우는 바람에 제 엄마를 기겁을 시키기도 했다. 무슨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는 듯 헤헤거리고 걷다가 갑자기 뒤로 휘릭 넘어가서 바닥을 울리는데 제 엄마는 아주 칠색팔색을 했다. 요즘 말썽 부리는 것이 그때 넘어져 생긴 후유증이 아닐는지. 어느 날은 세상에 소파에 기어올라갔다가 다이빙해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참극이 발생했다. 또 엄마 얼굴은 파랗게 되고 한바탕 부산을 떤 다음 다시 싱글거리는 녀석을 앞에 두고 TV를 틀었는데 책을 보고 있던 나에게 아내가 말을 건네 왔다. "김미화 참 대단해."
무슨 소리냐? 화면을 보니 당시로서도 꽤 중견급이라 할 수 있는 개그맨 김미화씨가 무대에서 도통 듣도보도 못할 개그맨들과 어울려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꽤 나이가 든 선배일 텐데 저렇게 신인들하고 같이 어울리잖아. 대단한 것 같아." 그랬다. 쓰리랑 부부로 장안의 화제를 낳았을 때가 언제고, 그 뒤로도 방송인으로서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하고 있었던 그녀가 뭐하는지 모를 프로그램에서 신인들과 엉켜 춤을 추고 찧고 까불고 있네. 그 화면을 보고 아들 녀석은 또 엉덩이 실룩대며 춤(?)을 따라 하다가 또 뒤로 넘어갔다. 꽈당. 그게 개그 콘서트였다.
사실 개그 콘서트는 전유성 백재현 등과 함께 김미화가 만들다시피 한 프로그램이었다.
" 주저하는 KBS 본부장을 기획서 들고 쫓아다녔어요. 3개월간 신인들을 연습시킬 테니 기회를 달라, 파일럿을 떠보고 재미없으면 안 내보내면 되지 않냐고요. PD가 결정된 다음 전유성, 백재현 씨를 끌어들였죠. 그때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인기였는데 그걸 보면서 저런 공연은 방청객이 스스로 오는데 코미디는 왜 돈 주고 방청객을 불러야 할까 고민했거든요...... 신인들이 주인공이었죠. 거기서도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컨셉은 선배들이 후배들 공연을 뒤에 앉아 지켜본다는 거였어요. 김대희, 김영철 같은 2~3개월 된 친구들이 연기할 때 20~30년 선배들의 웃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면 시청자가 ‘얼마나 웃기기에 베테랑들이 웃을까’ 하고 인지하게 되니까요. 실상 우리는 연습 장면을 수십 번 봐서 웃음도 안 나고 지키고 앉아 할 일도 없지만 반드시 그렇게 했어요.
......
성인 코미디를 하는 내 자신에 불만은 없었지만 후배들과 뭉쳐서 한다면 스스로 젊어지고 5년 할 걸 10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후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주는 일은 어찌 보면 내 파이를 나눠주는 거라 선뜻 용기가 안 났어요. 좋은 선배로 남고 싶은 욕심도 강하지만 내가 만든다고 그 무대에서 내가 오래 갈 것도 아니고 두려웠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코미디가 발전해야 결국 코미디언인 내 가치도 올라갈 거라고 판단했어요." (http://ch.yes24.com/Article/View/19851 최을영 인터뷰에서 인용)
아내가 간파한 대로 개그콘서트는 선배 코미디언 김미화가 후배들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무대를 나눠 주고 그들의 무대를 만들어 주려는 노력에서 큰 뿌리를 두었다. 그 뒤로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고 제작진과의 갈등 끝에 출연진들이 대거 타 방송사로 옮겨 가기도 하고, 시청률 침체로 위기를 맞기도 하는 등 부침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개그콘서트는 무려 <웃으면 복이와요>를 바짝 위협하는 최장수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잘 나가고 있다. 방청권을 얻으려면 제작본부장 빽도 안통한다는 인기를 구가하면서 말이다. (설마? 안믿어!)
그렇게 잘 나가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개그맨들의 피나는 머리 싸움이 있을 것이고 냉정하게 웃긴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제작진의 감과 판단력도 있을 것이며, 김미화가 모범을 보인 이래 쌓아져 온 선 후배들간의 애정과 팀웍도 한몫을 할 것이고, 김병만의 '달인'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 승리적 아이템까지도 몇 년을 이어가는 끈기도 그 비결이 될 수 있겠다. 그런데 나에게 그 이유 하나를 들라면 <개그 콘서트>가 단순한 슬랩스틱 코미디와 말장난을 넘어서서 사회에 대한 '촉'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들겠다. 누군가 누구를 때리고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는 낄낄대고 웃을 정도겠지만 상놈이 양반을 골탕먹이고 뺨을 갈기는 설정의 탈춤이나 마당극에서 관중들은 그 배를 쓸어쥐고 깔깔대며 웃었을 것이다. 진정한 코미디는 코미디언 구봉서의 말대로 "코미디에는 페이소스가 (관객에게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개콘이 유행시킨 유행어들을 돌이켜 보면 그것이 히트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부르짖을 때 국회의원 한선교는 흥분했다. 그는 kbs 김인규 사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김 사장이 취임한 뒤로도 이런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느냐." 비포(BEFORE) 김인규 시대라면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런 프로그램 좀 관리감독하라고 회전의자 내 준 거 아니냐는 힐난인 셈이며,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따위의 한탄보다는 "1등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승화시켜야 할 거 아니냐는 지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장 나만 해도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실컷 깨진 뒤에는 술잔을 기울이면서 개콘의 그 유행어를 따라 했었다. "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고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상상 형제> 코너를 보면서 상상으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가상적인 것으로 간접 경험하며 위안하는 형제의 모습을 보면서 웃다가도 서글퍼지는 경험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며,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야 안돼! 를 외친 뒤 말도 안되는 사설로 '대책'을 가로막는 '웃대가리들'의 모습에 웃다가도 혀를 찬 이들 역시 적지 않았으리라. <감수성>을 보면서 버럭 버럭 하다가도 상대가 뜻밖에 정색을 할 때 어어 왜 그래? 하면서 뒤통수를 긁었던 심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고, "나는 뭐뭐 했을 뿐이고!!!"를 들으며 웃을 때는 실제와 허상의 사이에서 방황해야 했던 우리 모두의 자화상에 웃으면서도 뒤통수가 서늘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혁이 형이 "등록금이 우리 아빠 혈압이야? 왜 내려갈 줄을 몰라?"라고 부르짖었을 때 객석을 가득 메웠던 젊은 청춘들의 환호는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오죽하면 한때 형편이 좋지 않았던, 지금도 그리 나아진 것 같지는 않은 kbs 유일의 시사 프로그램(?)이라는 명예까지 얻었겠는가 말이다. 개콘은 그것이 달랐다. 그것이 다른 코미디 프로그램과의 차별성이었다. 그들은 웃음의 소재를 '세상에서부터 가져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개콘 첫방송 무렵 꿍꿍 나자빠지던 아들은 지금 힘으로 하면 아버지를 찜쪄먹을 건장한 청소년이 돼 있고, 그때 세상에 없었던 딸도 개콘을 보며 소파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다. 이 아이들이 나이가 먹어도, 또 자식을 낳아도 개콘은 계속되길 바란다. 단순히 그 역사의 지속이 아니라 대한민국 코미디의 간을 더욱 키우고, 그 힘을 더욱 키우고, 더 많은 웃음 폭탄을 터뜨려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하는 폭포가 되고 잠시나마 찌든 세속의 때를 벗기는 사우나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기원하면서 나는 오늘도 아들을 보며 부르짖는다. <멘붕학교>의 선생처럼. "요즘 애들 왜 이래? 아 왜 이래?" 그럼 우리 아들이 갸루상이 되어 이렇게 대답하겠지. "나는 아들이 아니무니다. 돈 먹는 하마이무니다. 용돈이 너무 작스무니다."
아마도 그 프로그램은 <웃으면 복이와요>일 것이다. 나에게는 추억 속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명사가 되어 있는 이 프로그램은 1969년에 시작해서 1985년에 막을 내렸다가 그 뒤 잠깐 부활하고 사라졌다가 또 비슷한 이름으로 반짝 나왔다가 없어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국내 최장수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남아 있다. 그 뒤를 잇는 랭킹 2위의 프로그램이지만 아마도 내 아들과 딸에게는 나에게 <웃으면 복이 와요>와 같은 등급의 지존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남을 프로그램이 1999년 9월 4일 그 서막을 열어젖혔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개그 콘서트>다. 아마 아이들은 내가 그렇듯 평생 동안 <개콘>의 한 부분을 추억하며 웃음을 짓고 친구들 사이의 화제로 간직하고 과거를 되돌리는 타임머신의 엔진으로 갈무리해 둘 것이다.
유난히 성장이 빨랐던 아들은 돌잔치 때 뛰어나닐 정도였는데 또 유별나게 자주 넘어져 머리를 바닥에 박으면서 꿍꿍 소리를 내서 자지러지게 우는 바람에 제 엄마를 기겁을 시키기도 했다. 무슨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는 듯 헤헤거리고 걷다가 갑자기 뒤로 휘릭 넘어가서 바닥을 울리는데 제 엄마는 아주 칠색팔색을 했다. 요즘 말썽 부리는 것이 그때 넘어져 생긴 후유증이 아닐는지. 어느 날은 세상에 소파에 기어올라갔다가 다이빙해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참극이 발생했다. 또 엄마 얼굴은 파랗게 되고 한바탕 부산을 떤 다음 다시 싱글거리는 녀석을 앞에 두고 TV를 틀었는데 책을 보고 있던 나에게 아내가 말을 건네 왔다. "김미화 참 대단해."
무슨 소리냐? 화면을 보니 당시로서도 꽤 중견급이라 할 수 있는 개그맨 김미화씨가 무대에서 도통 듣도보도 못할 개그맨들과 어울려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꽤 나이가 든 선배일 텐데 저렇게 신인들하고 같이 어울리잖아. 대단한 것 같아." 그랬다. 쓰리랑 부부로 장안의 화제를 낳았을 때가 언제고, 그 뒤로도 방송인으로서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하고 있었던 그녀가 뭐하는지 모를 프로그램에서 신인들과 엉켜 춤을 추고 찧고 까불고 있네. 그 화면을 보고 아들 녀석은 또 엉덩이 실룩대며 춤(?)을 따라 하다가 또 뒤로 넘어갔다. 꽈당. 그게 개그 콘서트였다.
사실 개그 콘서트는 전유성 백재현 등과 함께 김미화가 만들다시피 한 프로그램이었다.
" 주저하는 KBS 본부장을 기획서 들고 쫓아다녔어요. 3개월간 신인들을 연습시킬 테니 기회를 달라, 파일럿을 떠보고 재미없으면 안 내보내면 되지 않냐고요. PD가 결정된 다음 전유성, 백재현 씨를 끌어들였죠. 그때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인기였는데 그걸 보면서 저런 공연은 방청객이 스스로 오는데 코미디는 왜 돈 주고 방청객을 불러야 할까 고민했거든요...... 신인들이 주인공이었죠. 거기서도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컨셉은 선배들이 후배들 공연을 뒤에 앉아 지켜본다는 거였어요. 김대희, 김영철 같은 2~3개월 된 친구들이 연기할 때 20~30년 선배들의 웃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면 시청자가 ‘얼마나 웃기기에 베테랑들이 웃을까’ 하고 인지하게 되니까요. 실상 우리는 연습 장면을 수십 번 봐서 웃음도 안 나고 지키고 앉아 할 일도 없지만 반드시 그렇게 했어요.
......
성인 코미디를 하는 내 자신에 불만은 없었지만 후배들과 뭉쳐서 한다면 스스로 젊어지고 5년 할 걸 10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후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주는 일은 어찌 보면 내 파이를 나눠주는 거라 선뜻 용기가 안 났어요. 좋은 선배로 남고 싶은 욕심도 강하지만 내가 만든다고 그 무대에서 내가 오래 갈 것도 아니고 두려웠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코미디가 발전해야 결국 코미디언인 내 가치도 올라갈 거라고 판단했어요." (http://ch.yes24.com/Article/View/19851 최을영 인터뷰에서 인용)
아내가 간파한 대로 개그콘서트는 선배 코미디언 김미화가 후배들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무대를 나눠 주고 그들의 무대를 만들어 주려는 노력에서 큰 뿌리를 두었다. 그 뒤로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고 제작진과의 갈등 끝에 출연진들이 대거 타 방송사로 옮겨 가기도 하고, 시청률 침체로 위기를 맞기도 하는 등 부침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개그콘서트는 무려 <웃으면 복이와요>를 바짝 위협하는 최장수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잘 나가고 있다. 방청권을 얻으려면 제작본부장 빽도 안통한다는 인기를 구가하면서 말이다. (설마? 안믿어!)
그렇게 잘 나가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개그맨들의 피나는 머리 싸움이 있을 것이고 냉정하게 웃긴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제작진의 감과 판단력도 있을 것이며, 김미화가 모범을 보인 이래 쌓아져 온 선 후배들간의 애정과 팀웍도 한몫을 할 것이고, 김병만의 '달인'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 승리적 아이템까지도 몇 년을 이어가는 끈기도 그 비결이 될 수 있겠다. 그런데 나에게 그 이유 하나를 들라면 <개그 콘서트>가 단순한 슬랩스틱 코미디와 말장난을 넘어서서 사회에 대한 '촉'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들겠다. 누군가 누구를 때리고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는 낄낄대고 웃을 정도겠지만 상놈이 양반을 골탕먹이고 뺨을 갈기는 설정의 탈춤이나 마당극에서 관중들은 그 배를 쓸어쥐고 깔깔대며 웃었을 것이다. 진정한 코미디는 코미디언 구봉서의 말대로 "코미디에는 페이소스가 (관객에게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개콘이 유행시킨 유행어들을 돌이켜 보면 그것이 히트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부르짖을 때 국회의원 한선교는 흥분했다. 그는 kbs 김인규 사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김 사장이 취임한 뒤로도 이런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느냐." 비포(BEFORE) 김인규 시대라면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런 프로그램 좀 관리감독하라고 회전의자 내 준 거 아니냐는 힐난인 셈이며,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따위의 한탄보다는 "1등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승화시켜야 할 거 아니냐는 지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장 나만 해도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실컷 깨진 뒤에는 술잔을 기울이면서 개콘의 그 유행어를 따라 했었다. "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고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상상 형제> 코너를 보면서 상상으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가상적인 것으로 간접 경험하며 위안하는 형제의 모습을 보면서 웃다가도 서글퍼지는 경험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며,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야 안돼! 를 외친 뒤 말도 안되는 사설로 '대책'을 가로막는 '웃대가리들'의 모습에 웃다가도 혀를 찬 이들 역시 적지 않았으리라. <감수성>을 보면서 버럭 버럭 하다가도 상대가 뜻밖에 정색을 할 때 어어 왜 그래? 하면서 뒤통수를 긁었던 심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고, "나는 뭐뭐 했을 뿐이고!!!"를 들으며 웃을 때는 실제와 허상의 사이에서 방황해야 했던 우리 모두의 자화상에 웃으면서도 뒤통수가 서늘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혁이 형이 "등록금이 우리 아빠 혈압이야? 왜 내려갈 줄을 몰라?"라고 부르짖었을 때 객석을 가득 메웠던 젊은 청춘들의 환호는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오죽하면 한때 형편이 좋지 않았던, 지금도 그리 나아진 것 같지는 않은 kbs 유일의 시사 프로그램(?)이라는 명예까지 얻었겠는가 말이다. 개콘은 그것이 달랐다. 그것이 다른 코미디 프로그램과의 차별성이었다. 그들은 웃음의 소재를 '세상에서부터 가져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개콘 첫방송 무렵 꿍꿍 나자빠지던 아들은 지금 힘으로 하면 아버지를 찜쪄먹을 건장한 청소년이 돼 있고, 그때 세상에 없었던 딸도 개콘을 보며 소파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다. 이 아이들이 나이가 먹어도, 또 자식을 낳아도 개콘은 계속되길 바란다. 단순히 그 역사의 지속이 아니라 대한민국 코미디의 간을 더욱 키우고, 그 힘을 더욱 키우고, 더 많은 웃음 폭탄을 터뜨려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하는 폭포가 되고 잠시나마 찌든 세속의 때를 벗기는 사우나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기원하면서 나는 오늘도 아들을 보며 부르짖는다. <멘붕학교>의 선생처럼. "요즘 애들 왜 이래? 아 왜 이래?" 그럼 우리 아들이 갸루상이 되어 이렇게 대답하겠지. "나는 아들이 아니무니다. 돈 먹는 하마이무니다. 용돈이 너무 작스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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