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41,1987년 8월 30일 유진오와 홍난파
서울대는 꿈도 꾸지 말고 니 꼬라지가 연대 스타일은 아이다. 고대로 해라." 과는 대충 정해 놓고 학교를 고민할 때 담임 선생님이 내지른 한 마디로 내 진로는 결정됐다. 그래서 정식으로 원서를 넣기 훨씬 이전부터 고려대학교라는 학교에 꽤 관심이 많았다. 또 그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낳았던 학교이기도 했고. 87년 말,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
1941,1987년 8월 30일 유진오와 홍난파
서울대는 꿈도 꾸지 말고 니 꼬라지가 연대 스타일은 아이다. 고대로 해라." 과는 대충 정해 놓고 학교를 고민할 때 담임 선생님이 내지른 한 마디로 내 진로는 결정됐다. 그래서 정식으로 원서를 넣기 훨씬 이전부터 고려대학교라는 학교에 꽤 관심이 많았다. 또 그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낳았던 학교이기도 했고. 87년 말,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
고개를 돌리고 딴 곳을 쳐다보는 그 장면도 고대에서 있었던 일이며, 전대협 의장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는데다가 기타등등 그 학교 이름이 들먹여지는 일들이 꽤 많았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일이 1987년 8월 30일 한 사람의 사망으로 불거진다. 그 이름은 현민 유진오.
그때 사회 선생님이 "우리나라 헌법을 만든 사람"이라고 소개했거니와 그 소개가 크게 사실과 어긋나지 않았던 법학자. 일제 시대 KAPF, 즉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큰 테두리에서 그에 공감하며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그려낸 '동반작가' 중의 하나. 그리고 고려대학교 총장을 오래 하면서 그때 학교를 다닌 이들에게는 영원한 스승님처럼 마음 속에 좌정했던 이. 박정희에 맞선 야당 지도자이기도 했고 야권 후보 단일화의 결단을 내려 박정희의 숨을 가쁘게 하기도 했던 정치인. 유진오가 죽었다. 당연히 빈소는 고려대학교 안에 차려졌고, 고위층부터 옛 제지들까지 분향의 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9월 1일 아침 9시부터 다섯 명의 교수가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문영, 권창은, 이상신, 이만우, 윤용 교수였다. 그들은 "고려대학교는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될 수 없다."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인즉슨 현민 유진오의 업적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서, 또 친일 경력의 소유자로서 '민족고대'에 그 빈소를 두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교수들의 성명서 내용 일부를 보자.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를 불문에 붙이고 고인을 과대미화시킴으로써 그것이 악을 방관·조장하고 현재의 비리마저 정당화시키는 데 악용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행과 통념에 아부·순종하기보다는 이에 도전하여 이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 진정한 지성인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교육자로서 이미 일제 치하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을 노래했었고, 해방 직전까지도 "우리(일본 제국)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외치는 등 친일행각의 전력도 있거니와 야당 당수로서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처참한 광주의 불행과 직결된 정통성을 결여한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 다시금 변신했던 고 유진오 씨의 빈소가 고대에 차려진다는 것은 비교훈적이라고 생각하여 사회적 통념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항의 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가 되면서 학생들이 가세했다 2백여명의 학생들은 빈소로 몰려가 조화 가운데 7개를 철거하고 즈려밟았다. 아마도 '전두환'이나 '노태우' 정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던 조화였으리라. 파장은 컸다. 유족들은 빈소를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영원한 고대의 스승"은 안암동이 아니라 대학로에서 세상과 이별해야 했다. 5인방 교수들이 말한 바 "사회적 통념"과의 충돌은 극단적인 파열음을 낸다. 교우회는 선불맞은 멧돼지처럼 흥분하여 교수들을 제명하라고 요구하고 나섰고 어떤 고대 교수들은 '사죄의 서명'운동에 들어갔으며 학생 몇 명은 붙들려 갔고 교수들에게도 소환장이 날아갔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서진영 조광 교수 등 10여명의 교수들은 "5인의 교수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에 반대한다."는 재반박 성명도 터져 나오는 등 대한민국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유진오라는 인물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과도 같은 파문이었다.
고려대 5인방 교수들의 성명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또 다른 느낌을 가진다. 그들이 경계한 것은 반성없는 과거였고, 그를 통한 과대 미화와 그를 바탕으로 형성된 통념과 관행이었다. 즉 "이런 버르장머리없는 놈들 감히 현민 앞에서! 어르신 가시는 데 그런 말 입 밖에 내지 마!"라는 폭력적인 분위기에 맞선 지식인의 용기있는 행동이었다는 뜻이다. 주도자 이문영 교수조차 "친일보다는 국정자문위원이 더 문제"라고 회고했거니와, 유진오 정도 되는 인사의 친일 행각을, 그것도 죽은 사람 앞에서 모든 죄가 용서되는 특이한 분위기의 나라에서 드러낸다는 것 매우 의미가 큰 일이었다.
그런데 유진오의 친일행각은 사실 노골적이었다. 중일 전쟁 이후 그의 글을 보면 어이없고 낯뜨거울만큼 대일본제국 만세, 천황폐하 만세, 대동아성전 만세로 귀결되고 있다. 그때까지 사실 현민의 그 행적은 "불문에 붙여지고" 있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어쩌면 1987년 유진오는 죽을 때를 잘 골랐는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친일'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요즘에 현민이 죽었다면 아마 그는 조화 몇 개 부서지는 정도가 아니라 상욕을 들으며 북망산으로 떠나야 했을지 뉘 알겠는가.
장준하 선생의 철천지 원수 오카모토 미노루 소위 건도 그렇고 박근혜 후보에 대한 얘기도 그렇고 "친일파"라는 말이 홍수를 이룰 지경으로 많이 쓰이는 요즘이다. 우리 역사의 잘못 꿴 첫단추를 통탄하는 건 좋다. 유진오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친일 행각은 알려져야 하고, 이미 백골이 진토되었을망정 반민족적 행위로 호의호식했던 이들의 행동을 낱낱이 밝혀 후세의 귀감으로 만드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1987년도 아닌 2012년에 "친일파 척결"이 선거의 이슈로 부상하고 정치적 공격의 소재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친일파는 없다. 친일 행동을 직접적으로 한 이들은 모두 무덤 속에 들어가 있으며 지금은 그 후손들이 살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물을 수 있다고 연좌제의 공식 부활을 선언하지 않는 한, 21세기에 "친일파 척결"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일은 선거로 정권을 바꿔서 될 일이 아니라 혁명의 칼바람으로도 성사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친일' 논의가 지나치게 비이성적이고 논리 비약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41년 8월 30일에는 또 한 사람의 위인이 죽었다. 홍난파였다. "고향의 봄"부터 "울 밑에 선 봉선화"까지, "엄마 앞에서 짝짜꿍"에서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까지 우리 모두가 즐겨 불렀고 우리 아버지들이 가슴 적시며 불렀던 많은 노래들의 지은이다. 그는 1937년 죽기 4년 전까지 투옥될 정도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그리 고운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중일 전쟁 이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까지 일본군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다. 그 4년으로 인해 그는 친일파의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역으로 '친일파'라는 이유로 그가 기념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 4년으로 그의 이전의 보석같은 노래들을 친일파의 산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그의 일생과 우리의 자산이 아깝지 않은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아는 것이다. 불문에 붙이지 않는 것이다. 통념과 관행에 굴복하지 않고 할 말은 하는 것이다. 친일파를 친일파라고 부르지 못하던 시절에 대한 분노가 필요하다면, 친일파라는 얘기가 너무 쉽고도 성찰 없는 낙인으로 전락하는 때에 대한 경계도 필요할 것 같다. 친일파는 친일파다. 하지만 우리는 또 공부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경로로 친일파가 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떤 심리에서 그랬으며 그를 우리와 우리 후대가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떠해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지 친일파이니 돌아볼 것이 없다는 식이 되면 곤란할지도 모른다. 이 말을 하면 누군가 "바로 그게 친일파 비호 논리였소!"라고 부르짖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친일파들은 친일 행적 자체를 숨기려 했고, 그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기시했다. 즉 제대로 된 논의 자체를 봉쇄했다. "친일파 척결 세력"들은 그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진오와 홍난파..... 일제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와 정치인, 음악가와 문학가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를 '교훈적'으로 승화시켰으면 좋겠다.
그때 사회 선생님이 "우리나라 헌법을 만든 사람"이라고 소개했거니와 그 소개가 크게 사실과 어긋나지 않았던 법학자. 일제 시대 KAPF, 즉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큰 테두리에서 그에 공감하며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그려낸 '동반작가' 중의 하나. 그리고 고려대학교 총장을 오래 하면서 그때 학교를 다닌 이들에게는 영원한 스승님처럼 마음 속에 좌정했던 이. 박정희에 맞선 야당 지도자이기도 했고 야권 후보 단일화의 결단을 내려 박정희의 숨을 가쁘게 하기도 했던 정치인. 유진오가 죽었다. 당연히 빈소는 고려대학교 안에 차려졌고, 고위층부터 옛 제지들까지 분향의 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9월 1일 아침 9시부터 다섯 명의 교수가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문영, 권창은, 이상신, 이만우, 윤용 교수였다. 그들은 "고려대학교는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될 수 없다."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인즉슨 현민 유진오의 업적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서, 또 친일 경력의 소유자로서 '민족고대'에 그 빈소를 두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교수들의 성명서 내용 일부를 보자.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를 불문에 붙이고 고인을 과대미화시킴으로써 그것이 악을 방관·조장하고 현재의 비리마저 정당화시키는 데 악용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행과 통념에 아부·순종하기보다는 이에 도전하여 이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 진정한 지성인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교육자로서 이미 일제 치하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을 노래했었고, 해방 직전까지도 "우리(일본 제국)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외치는 등 친일행각의 전력도 있거니와 야당 당수로서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처참한 광주의 불행과 직결된 정통성을 결여한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 다시금 변신했던 고 유진오 씨의 빈소가 고대에 차려진다는 것은 비교훈적이라고 생각하여 사회적 통념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항의 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가 되면서 학생들이 가세했다 2백여명의 학생들은 빈소로 몰려가 조화 가운데 7개를 철거하고 즈려밟았다. 아마도 '전두환'이나 '노태우' 정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던 조화였으리라. 파장은 컸다. 유족들은 빈소를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영원한 고대의 스승"은 안암동이 아니라 대학로에서 세상과 이별해야 했다. 5인방 교수들이 말한 바 "사회적 통념"과의 충돌은 극단적인 파열음을 낸다. 교우회는 선불맞은 멧돼지처럼 흥분하여 교수들을 제명하라고 요구하고 나섰고 어떤 고대 교수들은 '사죄의 서명'운동에 들어갔으며 학생 몇 명은 붙들려 갔고 교수들에게도 소환장이 날아갔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서진영 조광 교수 등 10여명의 교수들은 "5인의 교수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에 반대한다."는 재반박 성명도 터져 나오는 등 대한민국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유진오라는 인물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과도 같은 파문이었다.
고려대 5인방 교수들의 성명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또 다른 느낌을 가진다. 그들이 경계한 것은 반성없는 과거였고, 그를 통한 과대 미화와 그를 바탕으로 형성된 통념과 관행이었다. 즉 "이런 버르장머리없는 놈들 감히 현민 앞에서! 어르신 가시는 데 그런 말 입 밖에 내지 마!"라는 폭력적인 분위기에 맞선 지식인의 용기있는 행동이었다는 뜻이다. 주도자 이문영 교수조차 "친일보다는 국정자문위원이 더 문제"라고 회고했거니와, 유진오 정도 되는 인사의 친일 행각을, 그것도 죽은 사람 앞에서 모든 죄가 용서되는 특이한 분위기의 나라에서 드러낸다는 것 매우 의미가 큰 일이었다.
그런데 유진오의 친일행각은 사실 노골적이었다. 중일 전쟁 이후 그의 글을 보면 어이없고 낯뜨거울만큼 대일본제국 만세, 천황폐하 만세, 대동아성전 만세로 귀결되고 있다. 그때까지 사실 현민의 그 행적은 "불문에 붙여지고" 있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어쩌면 1987년 유진오는 죽을 때를 잘 골랐는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친일'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요즘에 현민이 죽었다면 아마 그는 조화 몇 개 부서지는 정도가 아니라 상욕을 들으며 북망산으로 떠나야 했을지 뉘 알겠는가.
장준하 선생의 철천지 원수 오카모토 미노루 소위 건도 그렇고 박근혜 후보에 대한 얘기도 그렇고 "친일파"라는 말이 홍수를 이룰 지경으로 많이 쓰이는 요즘이다. 우리 역사의 잘못 꿴 첫단추를 통탄하는 건 좋다. 유진오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친일 행각은 알려져야 하고, 이미 백골이 진토되었을망정 반민족적 행위로 호의호식했던 이들의 행동을 낱낱이 밝혀 후세의 귀감으로 만드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1987년도 아닌 2012년에 "친일파 척결"이 선거의 이슈로 부상하고 정치적 공격의 소재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친일파는 없다. 친일 행동을 직접적으로 한 이들은 모두 무덤 속에 들어가 있으며 지금은 그 후손들이 살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물을 수 있다고 연좌제의 공식 부활을 선언하지 않는 한, 21세기에 "친일파 척결"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일은 선거로 정권을 바꿔서 될 일이 아니라 혁명의 칼바람으로도 성사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친일' 논의가 지나치게 비이성적이고 논리 비약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41년 8월 30일에는 또 한 사람의 위인이 죽었다. 홍난파였다. "고향의 봄"부터 "울 밑에 선 봉선화"까지, "엄마 앞에서 짝짜꿍"에서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까지 우리 모두가 즐겨 불렀고 우리 아버지들이 가슴 적시며 불렀던 많은 노래들의 지은이다. 그는 1937년 죽기 4년 전까지 투옥될 정도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그리 고운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중일 전쟁 이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까지 일본군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다. 그 4년으로 인해 그는 친일파의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역으로 '친일파'라는 이유로 그가 기념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 4년으로 그의 이전의 보석같은 노래들을 친일파의 산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그의 일생과 우리의 자산이 아깝지 않은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아는 것이다. 불문에 붙이지 않는 것이다. 통념과 관행에 굴복하지 않고 할 말은 하는 것이다. 친일파를 친일파라고 부르지 못하던 시절에 대한 분노가 필요하다면, 친일파라는 얘기가 너무 쉽고도 성찰 없는 낙인으로 전락하는 때에 대한 경계도 필요할 것 같다. 친일파는 친일파다. 하지만 우리는 또 공부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경로로 친일파가 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떤 심리에서 그랬으며 그를 우리와 우리 후대가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떠해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지 친일파이니 돌아볼 것이 없다는 식이 되면 곤란할지도 모른다. 이 말을 하면 누군가 "바로 그게 친일파 비호 논리였소!"라고 부르짖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친일파들은 친일 행적 자체를 숨기려 했고, 그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기시했다. 즉 제대로 된 논의 자체를 봉쇄했다. "친일파 척결 세력"들은 그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진오와 홍난파..... 일제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와 정치인, 음악가와 문학가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를 '교훈적'으로 승화시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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