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7년 8월 31일 아듀 증기기관차
1967년 8월 31일 낮 1시 50분 서울역. 남원을 출발하여 호남선을 달려 종착역인 서울역에 도착한 기차가 우람한 소리를 토해 냈다. 새벽 3시에 남원을 떠났던 파시 5형 증기기관차에 타고 있던 승객은 9백여명. 그들에게야 별다른 여행이 아니었지만 그들을 태우고 온 기차를 마중나온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운행이었다. 대한민국 철도 행정의 총책임자 철도...
1967년 8월 31일 아듀 증기기관차
1967년 8월 31일 낮 1시 50분 서울역. 남원을 출발하여 호남선을 달려 종착역인 서울역에 도착한 기차가 우람한 소리를 토해 냈다. 새벽 3시에 남원을 떠났던 파시 5형 증기기관차에 타고 있던 승객은 9백여명. 그들에게야 별다른 여행이 아니었지만 그들을 태우고 온 기차를 마중나온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운행이었다. 대한민국 철도 행정의 총책임자 철도...
청장이 근엄하게 서 있었고 그 수행원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이날은 대한민국 증기기관차가 공식적으로 퇴역하는 날이었다.
철도청장은 이날 마지막 증기기관차를 끌고 온 정헌철 기관사에게 표창장을 주었다. 그는 23년 8개월 동안 장기근속한 기관사였고 그가 몰고 온 기관차는 무려 31만 km를 달린 ‘장기근속차’였다. 이 증기기관차는 지구를 여덟 바퀴 반을 돌고서야 은퇴할 수 있었다. 1889년 경인선 철도에서 그 기적 소리를 울린 이래 근 한 세기 동안 한반도의 곳곳에서 빼액 소리를 울리며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철도와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얼마 전 유치원생들이 기차 놀이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앞사람 어깨를 꼭 쥔 고사리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병아리 목소리들이 합창하는 의성어는 칙칙폭폭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도 내가 어렸을 때 그대로였다.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이 칙칙폭폭 소리는 증기기관차의 소리다. 디젤 기관차는 요란한 굉음은 울릴 뿐이지 규칙적인 칙칙폭폭 소리는 내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기차 소리는 칙칙폭폭이다. 석탄을 때서 물을 끓이고 가끔은 꽤액 기적을 울리면서 은하철도 999의 바퀴처럼 규칙적으로 돌아가던 그 소리. 그 소리가 공식적으로는 오늘로 끝났다. 하지만 아직도 그 소리는 코레일 전화번호로도 남아 있다. 1544-7788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가서 / 빨리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 날개가진 새로도 못따르겠네. / 늙은이와 젊은이가 섞여 앉았고 / 우리 내외 외국인과 같이
탔으니/ 내외신소 다같이 익히 지내니/ 조그마한 땅 세상 절로 이뤘네.....“라면서 장장 67절의 경부철도가를 최남선이 노래한 것이 1908년이고 그 뒤 경의선과 호남선, 경원선, 그리고 부산항에서 함경북도까지 온 나라를 엮어 맸던 철로 위를 증기기관차는 수십 년 동안 달렸고 그 위로 온갖 사연들을 실어 날랐다.
독립투사들이 몸 안에 무기를 숨기고 압록강 건너 서울로 잠입할 때 그 기적 소리 들으며 의지를 다지던 경의선 기차였고 함경북도 무산에서 캐낸 철광석은 함경선을 통해 원산항으로 들어왔고 호남평야의 쌀은 이 기관차에 실려 군산항에 집결했다. 팔자 좋은 사람들은 경원선을 타고 금강산 구경을 갔고 일본에 가면 살길이 있을까 목을 내밀던 사람들은 부산역에서 내려 관부연락선 배표를 어루만졌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에 등장하는 “서울 가는 십이열차에 몸을 실은 젊은 나그네”의 십이열차는 부산역과 용산역에서 출발하여 열 두 시간 걸려 오가던 증기기관차의 이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인도나 방글라데시에서 기관차 지붕에까지 새까맣게 올라탄 사람들을 보면서 엽기라고 혀를 차지만 바로 전쟁 때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때로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사연들도 있었다. 1949년 죽령 터널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서울발 안동행 505열차가 원인 모르게 남한 철도에서 최장의 길이였던 죽령 터널 안에서 멈춰 서 버렸다. 당황한 기관사는 계속 불을 때서 연기를 내뿜었고 이는 380명의 승객 가운데 48명의 숨을 영원히 막아 버렸고 예순 네 명을 중태에 빠뜨렸다.
6.25 전쟁 때 미군 24사단장 딘 소장이 대전에서 소식이 두절되자 미군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구출작전에 나섰는데 이때 징발된 것은 미카3형- 129호 한국 기관차였다. 이 미카 129호는 이후로도 계속 운행하여 피난민들을 실어나르고 또 피난민들의 고향으로 다시 그들을 옮겼다. 이 기차는 증기기관차가 공식적으로 퇴역한 뒤에도 지방 관광 열차로도 이용되는데 80년대 초반에는 부산 경주, 그리고 90년대 초반에는 서울 금곡간을 운영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 공로와 역사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415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대전 국립 현충원에 보관되어 있다. 임진각에 보존되어 있는 경의선 증기기관차는 전쟁 중 평양에서 군수물자를 싣고 오다가 경의선 장단역에 정차하는 순간 미군의 폭격을 받는다. 불리해진 전황 속에 혹시 북한에 노획될 것을 두려워한 탓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북한군은 기관차 뒤의 25량을 탈취해 갔고 1020발의 총탄을 맞은 기관차는 지금도 임진각에서 우리를 맞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잠 자기도 부족한 3시간이면 거뜬한 세상에 살면서 증기기관차란 그야말로 구시대의 유물에 추억 속에서나 더듬을 과거지사에 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 70년, 길게는 한 세기 동안 칙칙폭폭 꽤액의 기차 소리는 그 증기기관차를 타 본 적 없는 세대에까지 길고도 깊게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는 왜 아기가 많을까 하는 우스개를 남기며, 칙칙폭폭 칙칙폭폭 21세기의 아이들에게도 그 정겨운 소리를 전해 주면서. 1967년 8월 31일 이별의 인사를나누고도 훨씬더우리곁에 머물면서.
철도청장은 이날 마지막 증기기관차를 끌고 온 정헌철 기관사에게 표창장을 주었다. 그는 23년 8개월 동안 장기근속한 기관사였고 그가 몰고 온 기관차는 무려 31만 km를 달린 ‘장기근속차’였다. 이 증기기관차는 지구를 여덟 바퀴 반을 돌고서야 은퇴할 수 있었다. 1889년 경인선 철도에서 그 기적 소리를 울린 이래 근 한 세기 동안 한반도의 곳곳에서 빼액 소리를 울리며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철도와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얼마 전 유치원생들이 기차 놀이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앞사람 어깨를 꼭 쥔 고사리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병아리 목소리들이 합창하는 의성어는 칙칙폭폭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도 내가 어렸을 때 그대로였다.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이 칙칙폭폭 소리는 증기기관차의 소리다. 디젤 기관차는 요란한 굉음은 울릴 뿐이지 규칙적인 칙칙폭폭 소리는 내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기차 소리는 칙칙폭폭이다. 석탄을 때서 물을 끓이고 가끔은 꽤액 기적을 울리면서 은하철도 999의 바퀴처럼 규칙적으로 돌아가던 그 소리. 그 소리가 공식적으로는 오늘로 끝났다. 하지만 아직도 그 소리는 코레일 전화번호로도 남아 있다. 1544-7788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가서 / 빨리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 날개가진 새로도 못따르겠네. / 늙은이와 젊은이가 섞여 앉았고 / 우리 내외 외국인과 같이
탔으니/ 내외신소 다같이 익히 지내니/ 조그마한 땅 세상 절로 이뤘네.....“라면서 장장 67절의 경부철도가를 최남선이 노래한 것이 1908년이고 그 뒤 경의선과 호남선, 경원선, 그리고 부산항에서 함경북도까지 온 나라를 엮어 맸던 철로 위를 증기기관차는 수십 년 동안 달렸고 그 위로 온갖 사연들을 실어 날랐다.
독립투사들이 몸 안에 무기를 숨기고 압록강 건너 서울로 잠입할 때 그 기적 소리 들으며 의지를 다지던 경의선 기차였고 함경북도 무산에서 캐낸 철광석은 함경선을 통해 원산항으로 들어왔고 호남평야의 쌀은 이 기관차에 실려 군산항에 집결했다. 팔자 좋은 사람들은 경원선을 타고 금강산 구경을 갔고 일본에 가면 살길이 있을까 목을 내밀던 사람들은 부산역에서 내려 관부연락선 배표를 어루만졌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에 등장하는 “서울 가는 십이열차에 몸을 실은 젊은 나그네”의 십이열차는 부산역과 용산역에서 출발하여 열 두 시간 걸려 오가던 증기기관차의 이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인도나 방글라데시에서 기관차 지붕에까지 새까맣게 올라탄 사람들을 보면서 엽기라고 혀를 차지만 바로 전쟁 때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때로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사연들도 있었다. 1949년 죽령 터널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서울발 안동행 505열차가 원인 모르게 남한 철도에서 최장의 길이였던 죽령 터널 안에서 멈춰 서 버렸다. 당황한 기관사는 계속 불을 때서 연기를 내뿜었고 이는 380명의 승객 가운데 48명의 숨을 영원히 막아 버렸고 예순 네 명을 중태에 빠뜨렸다.
6.25 전쟁 때 미군 24사단장 딘 소장이 대전에서 소식이 두절되자 미군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구출작전에 나섰는데 이때 징발된 것은 미카3형- 129호 한국 기관차였다. 이 미카 129호는 이후로도 계속 운행하여 피난민들을 실어나르고 또 피난민들의 고향으로 다시 그들을 옮겼다. 이 기차는 증기기관차가 공식적으로 퇴역한 뒤에도 지방 관광 열차로도 이용되는데 80년대 초반에는 부산 경주, 그리고 90년대 초반에는 서울 금곡간을 운영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 공로와 역사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415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대전 국립 현충원에 보관되어 있다. 임진각에 보존되어 있는 경의선 증기기관차는 전쟁 중 평양에서 군수물자를 싣고 오다가 경의선 장단역에 정차하는 순간 미군의 폭격을 받는다. 불리해진 전황 속에 혹시 북한에 노획될 것을 두려워한 탓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북한군은 기관차 뒤의 25량을 탈취해 갔고 1020발의 총탄을 맞은 기관차는 지금도 임진각에서 우리를 맞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잠 자기도 부족한 3시간이면 거뜬한 세상에 살면서 증기기관차란 그야말로 구시대의 유물에 추억 속에서나 더듬을 과거지사에 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 70년, 길게는 한 세기 동안 칙칙폭폭 꽤액의 기차 소리는 그 증기기관차를 타 본 적 없는 세대에까지 길고도 깊게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는 왜 아기가 많을까 하는 우스개를 남기며, 칙칙폭폭 칙칙폭폭 21세기의 아이들에게도 그 정겨운 소리를 전해 주면서. 1967년 8월 31일 이별의 인사를나누고도 훨씬더우리곁에 머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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