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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8.27 이주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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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2년 8월 27일 이주일 사망

나의 유년 시절을 가르는 위인은 단연 박정희 대통령이다. 내 기억은 대개 ‘박정희 전’과 ‘박정희 죽은 후’로 나뉜다. 이를테면 소풍 가서 벼랑에서 굴렀던 건 박정희 죽기 전이었으니까 3학년때 소풍이었다는 식이다. 그 박정희가 죽던 해 실로 기상천외한 연예인이 혜성과 함께 나타났다. 전두환이 등장해서 없애 버렸던 TBC에서 했던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이라는 프로그램에...
서였다. 타잔 역을 하던 윤수일이 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실수로 누군가 부딪치는 바람에 그 사람은 물에 빠졌다가 기어 나왔다. 그런데 그 몰골이 가히 몇 년 뒤에 나왔던 영화 ET가 물에 젖은 급이어서 방청객들은 경악 속에 배꼽을 잡았다. 쟤 누구냐?

그것이 ‘데뷔’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방송 데뷔가 처음은 아니었다. 몇 달 전 술자리에서 만난 MBC PD의 섭외로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했다가 “어디서 저런 구역질나는 인물을 출연시키느냐”는 시청자의 항의와 “방송용이 아니다”는 내부 평가로 바로 잘린 바 있었고, KBS <여의도 청백전>에서는 ‘수지큐’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뒤로 빼로 걷는, 그 후로 전설이 된 동작을 선보인 바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이었다. 물에 빠진 ET 이후 두 번째 출연 코너에서 그는 골든벨을 울린다. 환자 눈을 까뒤집으면서 “운명하셨습니다.” 한 마디를 하는 역이었는데 긴장을 했는지 설정이었는지 이 못생긴 의사 선생님이 자기 눈을 뒤집으며 “운명하셨습니다.”고 해 버린 것이다. 환자의 용태를 묻던 뚱보 코미디언 최용순은 웃음을 참느라 눈물까지 끅끅거렸고 방청객은 물론이고 스탭들까지 자지러졌다. 단 2주일만에 그는 스타가 됐다. 그래서 그 이름도 정주일에서 이주일로 바꿨다. 코미디언의 황제 이주일의 등장이었다.

원래 그는 강원도 고성의 부유한 집의 독자였다. 전쟁의 참화는 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산 정권이 들어선 후 압박을 이기지 못해 38선 이남으로 왔던 이주일의 가족은 전쟁이 터지자 산속으로 피난을 했고 국군이 다시 수복한 이후 물정을 알아보러 아버지만 돌아갔는데 그만 1.4 후퇴 때 빠져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좌익들은 이 반동분자에게 이후 건강을 잃어버릴 정도로 잔인한 테러를 가했다. 또 그 땅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 좌익분자들은 공개석상에 세워져 그 죄상을 고발당했고 이주일은 아버지를 괴롭힌 놈들을 죽이겠다고 설쳤는데 그때 아버지는 분노로 입술이 찢기도록 입을 깨물면서도 “적을 사랑하라는 옛 어른 말씀을 모르느냐?”라고 아들을 꾸짖었다고 한다.

운동 신경이 유난히 뛰어났던 그는 축구의 명문으로 유명한 춘천고의 주전 라이트 윙이었고 친구 박종환과 함께 축구 명문 경희대학교에 입학이 결정된다. 그렇게 정해진 코스로 갔다면 한국 축구사의 한 획을 그은 박종환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축구계 인사로 인생을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고향에서 보내온 입학금을 섰다판에서 날리는 불상사만 없었더라면. 이 불상사로 바로 머리 깎고 군에 입대한 그는 예능적인 끼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문선대의 총아가 된다. 불량끼 있는대로 발산하던 고교 시절 여학생 때문에 시비가 붙어 “다 덤벼!”라고 호기를 발휘하다가 보트 젓는 노에 면상을 강타당해 내려앉은 코를 중심으로 한 그의 외모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랫 동안 무명이었다. 그 못생긴 외모로 도움도 받았지만 설움도 무지하게 받았다. 기껏 어딘가에 자리를 얻으면 “뭐 저런 걸 쓰느냐?”는 지청구는 예사고 심지어는 발길질 당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그렇게 쫓겨난 뒤 설움을 달래러 해장국집에서 소주 한 잔 하려는데 아침부터 못생긴게 재수없다고 주인이 또 쫓아냈을 때에는 아마도 국으로 죽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는 스타가 됐다. 2주일만에. 그런데 또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수백 명 사람 죽이고 들어서서 ‘정의 사회 구현’을 부르짖던 정권이 ‘퇴폐 연예인’으로 낙인을 찍고 출연정지를 시켜 버린 것이다. 이주일도 경탄해 마지않을 코미디였다. 하지만 이주일은 TV보다도 밤무대에서 더 위대한 황제로 군림했다. 극장 식당 물랭루즈, 유흥업소였지만 갈비집 이름 같았던 ‘초원의 집’ 등에서 그는 거침없는 입담으로 최고의 줏가를 올렸다. “제가 방송 출연이 정지된 것은 중계방송을 못해서 그런 겁니다. 연날리기 대회였습니다. .... 한 년, 두 년.... 온갖 잡년은 다 모였습니다. ‘턱 나온 년’도 있고 ‘까진 연놈’도 있습니다.....” 턱 나온 년과 까진 연놈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적어도 그 시절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연예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철저한 프로였다. 일찌기 이리 다이나마이트 폭발 사고때 엉멍이 된 공연장에서 당시 극단의 최고 스타 하춘화를 구해 나오다가 하춘화가 담에서 뛰어내리기를 주저하자 “내 머리를 밟고 뛰어내리라.”고 외쳤던 그 근성으로 그는 코미디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알았고 철저히 수행했다. 그와 같이 정씨 가문의 독자였던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3일 뒤 그는 SBS 개국 축하 기념연에 등장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박철언씨와의 관계 개선을 해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천연덕스럽게 사람들을 웃긴다. 그 죽음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그를 풀기 위한 흡연으로 자신도 죽음을 맞이할만큼 큰 충격이었으면서도.

친구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이 오일 달러를 내세운 사우디와의 경기에서 말도 안되는 심판 판정으로 5대4로 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바로 싱가포르로 달려가 한국 응원단 앞에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응원을 주도했던 그는 죽음 앞에서 한때 그의 전반부 인생을 밝혔던 축구 경기를 위해 마지막 외출을 감행한다. 2002년 한국의 16강 진출을 결정하던 포르투갈 경기를 그는 휠체어를 탄 채 지켜 보았고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동심과 젊음으로 돌아간다. 그 오리걸음을 흉내내려고 애썼던 시간들, “일단 한 번 와 보시라니깐요.”의 코맹맹이 소리를 연방 따라하던 친구들의 웃음 소리. “말 되네.”라는 유행어 (순전히 개인적인 추정으로 이전의 한국어에서 말이 안된다는 말은 있었지만 말 되네! 소리는 이주일의 카피 이후 생긴 게 아닌가 한다)를 연발하여 후루룩거리던 라면, 그의 수십년 전 외상값까지 긁어내던 대한민국 정보 기관의 진짜 코미디, 그리고 국회의원을 마치고 “코미디 잘 배우고 간다.”던 냉소적인 코멘트까지. 그 모든 것을 남기고 이주일은 갔다.


이 포스팅은 고 이주일이 쓴 ‘이력서’를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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