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0년 8월 25일 딘 소장과 한국인들
일본이 항복한 뒤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각각 진입했고 그들은 군정을 꾸려 남북을 통치했다. 해방 이후 정부 수립 때까지 남한 행정의 총책임자는 미국의 별 셋짜리 장군 하지였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장군과 영관과 위관들이 신생국 한국의 구석구석까지 개입했고 지우기 힘든 흔적들을 남긴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인연이라면 이 사람을 들지 않을 수 없다. ...
1950년 8월 25일 딘 소장과 한국인들
일본이 항복한 뒤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각각 진입했고 그들은 군정을 꾸려 남북을 통치했다. 해방 이후 정부 수립 때까지 남한 행정의 총책임자는 미국의 별 셋짜리 장군 하지였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장군과 영관과 위관들이 신생국 한국의 구석구석까지 개입했고 지우기 힘든 흔적들을 남긴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인연이라면 이 사람을 들지 않을 수 없다. ...
윌리엄 딘 소장.
그는 4.3 사건 당시 미 군정장관이었고 사태를 온건하게 처리하려고 시도했던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제주도민들을 다 죽여도 좋다.”는 강경책을 주장하는 박진경을 후임으로 임명했던 사람이고, 그 이후 제주도민들이 당해야 했던 횡액과 불운에 책임이 없지 않은 사람이다. 또 친일파 처단에 관한 법에 대한 인준을 거부하면서 그가 남긴 말은 그 이후 벌어진 우리 역사의 역류를 반영하고 있다. “군정이 폐지된 후에 조선사람 자신이 친일파를 처벌하는 것은 자유일 것이나, 그렇게 되면 서로 많은 피를 흘려야 될 것이다. 점령 당시에 진주 목적의 하나로서 일제잔재를 소탕하겠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군국주의적인 일본식 제도를 민주주의화하겠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지, 친일파 운운한 것은 아니다. (<독립신문> 1947년 11월 14일자. 서중석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한울) 중)
하지 중장도 그랬다지만 이 윌리엄 딘 소장도 정치적 소양이 풍부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와 한국과의 본격적인 악연은 전쟁 후 24사단장으로서 인민군과 맞부딪치면서 일어난다. 경기도 오산 죽미령에서 처음 인민군과 조우했다가 붕괴돼 버린 스미드 특수 부대도 24사단 소속이긴 했지만 본격적인 미군 사단 병력이 인민군을 상대한 것은 대전 방어전에서였다. 인민군이 워낙 드세게 공격해 오자 “우리는 한국군이 아니야 이놈들아 우리는 미군이라고!”를 외칠 정도로 (즉 그러면 도망가리라고 믿고) 오만했던 미군들은 대전 전투에서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오죽하면 최고 지휘관인 딘 소장이 바주카포를 쏘아대면서 전투에 참가했을까. 그 와중에 딘 소장은 인민군의 포위망에 갇혀 버렸고 미군들은 당연히 비상이 걸린다. 듣도보도 못한 나라의 군대에게 미군 사단장이 죽음을 당하거나 포로가 된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던 미군들은 특공대를 결성하여 이미 사지가 되어 버린 대전으로 돌격해 들어간다. 이때 미군들이 이용한 것이 한국인 기관사가 모는 기관차였다.
대전 들어가는 곳곳에 매복해 있던 인민군들에게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맹렬하게 칙칙폭폭거리면서 들어오는 기관차는 그야말로 좋은 사냥감이었다. 대전에 들어가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앞뒤 분간할 수 없는 전장에서 딘 소장을 발견하지 못했고 돌아오는 길에 특공대는 몰살을 당한다. 33명 미군 특공대 중 1명만이 살아남았고 한국인 기관사 3명 가운데 김재현 기관사는 몸에 8발의 총알이 박혀 죽어가면서까지 마지막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딘 소장을 구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었다.
딘 소장은 끝내 미군과 연락이 끊긴 채 마지막 철수 부대와 함께 대전을 빠져나왔다. 그러던 중 부상당한 부하에게 먹일 물을 뜨러 계곡으로 내려가다 실족하여 굴러 떨어진 이후 길을 잃고 말았다. 그 뒤 근 한 달 동안 그는 미군 부대를 찾아 헤맸지만 길을 잘못들고 있었다.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로 가야 했지만 엉뚱하게 무주 진안 쪽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맘씨 좋은 한국인들 가족에 몸을 의탁하기도 하고 밥도 얻어먹으면서 인민군의 감시를 피했지만 그의 도피 생활은 엉뚱하게 끝난다. 한두규와 또 다른 한 사람이 그와 마주친 것이다. 한두규는 의용 소방대 등 해방 공간에서 우익 활동을 한 이로서 세상이 뒤집혔으니 자수라도 해서 살아 보자고 진안읍내로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딘 소장의 증언과 공식 기록에 따르면 한규두와 그 일행은 딘 소장을 잡아 인민군에게 넘겼고 그로 인해 인민군으로부터 보상도 받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딘 소장은 3년간의 포로 생활을 한다. 90킬로그램에 육박하던 당당하던 체구는 귀환했을 때 58킬로그램에 불과했다. 헤비급이 페더급이 된 셈.
그런데 딘 소장이라는 거물을 북한에 넘긴, 아니 정확히는 넘겼다고 얘기되는 한두규와 그 동료는 월북하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고 그냥 남한에 머물러 있다가 체포됐다. 심지어 한두규는 체포 당시 ‘자유당 안천면당 국민부장’의 감투를 쓰고 있었다. 한두규는 의사소통의 문제로 딘이 자신들을 오해한 것이며, 자신들이 딘 소장을 넘긴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인민군과 마주친 것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1심에서는 사형 언도까지 받는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이승만이 사고를 낸 한국군 병사를 사형시키라고 했다고 미군이 만류한 일화가 있으니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그 서슬푸른 재판에서도 유력한 증거는 없었던지 징역 5년이라는 가벼운(?) 형벌에 처해지고 딘 소장도 관대한 처벌을 탄원하여 3년여만에 풀려났다고 한다.
그런데 한두규는 1995년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자신은 무죄이며 딘 소장을 넘긴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정에서 “여러분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참으로 억울하고 기가 막힙니다.”라고 울부짖었다 (새전북신문 2009. 10.8)는 그는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딘 소장을 돈 몇 푼에 팔아넘긴 ‘불법체포자’ (그의 죄명)로 남아 있다. 한두규는 자신이 딘 소장을 만나고 또 인민군과 마주했던 우연 때문에 자신의 7남매들마저 온갖 불이익을 당해야 했던 사실에 평생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한 불운한 외국인 장군과 더 불운했던 평범한 한국인의 ‘잘못된 만남’의 비애가 가슴을 찌릿하게 할 뿐.
1950년 8월 25일, 딘 소장이 코리아라는 나라와의 사이에서 쌓았던 악연 가운데에서도 서로에게 최악의 악연을 쌓은 날이었다. 미 24사단장 딘은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 그날은 그의 결혼기념일기도 했다.
그는 4.3 사건 당시 미 군정장관이었고 사태를 온건하게 처리하려고 시도했던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제주도민들을 다 죽여도 좋다.”는 강경책을 주장하는 박진경을 후임으로 임명했던 사람이고, 그 이후 제주도민들이 당해야 했던 횡액과 불운에 책임이 없지 않은 사람이다. 또 친일파 처단에 관한 법에 대한 인준을 거부하면서 그가 남긴 말은 그 이후 벌어진 우리 역사의 역류를 반영하고 있다. “군정이 폐지된 후에 조선사람 자신이 친일파를 처벌하는 것은 자유일 것이나, 그렇게 되면 서로 많은 피를 흘려야 될 것이다. 점령 당시에 진주 목적의 하나로서 일제잔재를 소탕하겠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군국주의적인 일본식 제도를 민주주의화하겠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지, 친일파 운운한 것은 아니다. (<독립신문> 1947년 11월 14일자. 서중석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한울) 중)
하지 중장도 그랬다지만 이 윌리엄 딘 소장도 정치적 소양이 풍부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와 한국과의 본격적인 악연은 전쟁 후 24사단장으로서 인민군과 맞부딪치면서 일어난다. 경기도 오산 죽미령에서 처음 인민군과 조우했다가 붕괴돼 버린 스미드 특수 부대도 24사단 소속이긴 했지만 본격적인 미군 사단 병력이 인민군을 상대한 것은 대전 방어전에서였다. 인민군이 워낙 드세게 공격해 오자 “우리는 한국군이 아니야 이놈들아 우리는 미군이라고!”를 외칠 정도로 (즉 그러면 도망가리라고 믿고) 오만했던 미군들은 대전 전투에서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오죽하면 최고 지휘관인 딘 소장이 바주카포를 쏘아대면서 전투에 참가했을까. 그 와중에 딘 소장은 인민군의 포위망에 갇혀 버렸고 미군들은 당연히 비상이 걸린다. 듣도보도 못한 나라의 군대에게 미군 사단장이 죽음을 당하거나 포로가 된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던 미군들은 특공대를 결성하여 이미 사지가 되어 버린 대전으로 돌격해 들어간다. 이때 미군들이 이용한 것이 한국인 기관사가 모는 기관차였다.
대전 들어가는 곳곳에 매복해 있던 인민군들에게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맹렬하게 칙칙폭폭거리면서 들어오는 기관차는 그야말로 좋은 사냥감이었다. 대전에 들어가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앞뒤 분간할 수 없는 전장에서 딘 소장을 발견하지 못했고 돌아오는 길에 특공대는 몰살을 당한다. 33명 미군 특공대 중 1명만이 살아남았고 한국인 기관사 3명 가운데 김재현 기관사는 몸에 8발의 총알이 박혀 죽어가면서까지 마지막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딘 소장을 구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었다.
딘 소장은 끝내 미군과 연락이 끊긴 채 마지막 철수 부대와 함께 대전을 빠져나왔다. 그러던 중 부상당한 부하에게 먹일 물을 뜨러 계곡으로 내려가다 실족하여 굴러 떨어진 이후 길을 잃고 말았다. 그 뒤 근 한 달 동안 그는 미군 부대를 찾아 헤맸지만 길을 잘못들고 있었다.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로 가야 했지만 엉뚱하게 무주 진안 쪽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맘씨 좋은 한국인들 가족에 몸을 의탁하기도 하고 밥도 얻어먹으면서 인민군의 감시를 피했지만 그의 도피 생활은 엉뚱하게 끝난다. 한두규와 또 다른 한 사람이 그와 마주친 것이다. 한두규는 의용 소방대 등 해방 공간에서 우익 활동을 한 이로서 세상이 뒤집혔으니 자수라도 해서 살아 보자고 진안읍내로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딘 소장의 증언과 공식 기록에 따르면 한규두와 그 일행은 딘 소장을 잡아 인민군에게 넘겼고 그로 인해 인민군으로부터 보상도 받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딘 소장은 3년간의 포로 생활을 한다. 90킬로그램에 육박하던 당당하던 체구는 귀환했을 때 58킬로그램에 불과했다. 헤비급이 페더급이 된 셈.
그런데 딘 소장이라는 거물을 북한에 넘긴, 아니 정확히는 넘겼다고 얘기되는 한두규와 그 동료는 월북하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고 그냥 남한에 머물러 있다가 체포됐다. 심지어 한두규는 체포 당시 ‘자유당 안천면당 국민부장’의 감투를 쓰고 있었다. 한두규는 의사소통의 문제로 딘이 자신들을 오해한 것이며, 자신들이 딘 소장을 넘긴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인민군과 마주친 것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1심에서는 사형 언도까지 받는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이승만이 사고를 낸 한국군 병사를 사형시키라고 했다고 미군이 만류한 일화가 있으니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그 서슬푸른 재판에서도 유력한 증거는 없었던지 징역 5년이라는 가벼운(?) 형벌에 처해지고 딘 소장도 관대한 처벌을 탄원하여 3년여만에 풀려났다고 한다.
그런데 한두규는 1995년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자신은 무죄이며 딘 소장을 넘긴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정에서 “여러분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참으로 억울하고 기가 막힙니다.”라고 울부짖었다 (새전북신문 2009. 10.8)는 그는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딘 소장을 돈 몇 푼에 팔아넘긴 ‘불법체포자’ (그의 죄명)로 남아 있다. 한두규는 자신이 딘 소장을 만나고 또 인민군과 마주했던 우연 때문에 자신의 7남매들마저 온갖 불이익을 당해야 했던 사실에 평생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한 불운한 외국인 장군과 더 불운했던 평범한 한국인의 ‘잘못된 만남’의 비애가 가슴을 찌릿하게 할 뿐.
1950년 8월 25일, 딘 소장이 코리아라는 나라와의 사이에서 쌓았던 악연 가운데에서도 서로에게 최악의 악연을 쌓은 날이었다. 미 24사단장 딘은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 그날은 그의 결혼기념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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