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8년 8월 24일 ‘애국시대’의 종말, 통혁당 검거 발표
대학 초년병 시절 선배들이 소나기처럼 권하던 여러 책 가운데 ‘애국시대’라는 소설이 있었다. 그 내용을 고려해 볼 때 만약 지금 출판되었다면 경을 쳐도 여러 번 칠 성질의 책이었다. 그 책의 영웅적인 주인공은 전쟁 이후 최대의 조직 사건이라 할 통일혁명당 서울 시당위원장 김종태였던 것이다. 기실 소설 자체는 좀 엉성하고 지루해서 볼 것이 없...
1968년 8월 24일 ‘애국시대’의 종말, 통혁당 검거 발표
대학 초년병 시절 선배들이 소나기처럼 권하던 여러 책 가운데 ‘애국시대’라는 소설이 있었다. 그 내용을 고려해 볼 때 만약 지금 출판되었다면 경을 쳐도 여러 번 칠 성질의 책이었다. 그 책의 영웅적인 주인공은 전쟁 이후 최대의 조직 사건이라 할 통일혁명당 서울 시당위원장 김종태였던 것이다. 기실 소설 자체는 좀 엉성하고 지루해서 볼 것이 없...
었지만, 소설이 다루고 있는 내용만큼은 극히 충격적이었다. 이른바 ‘조작 사건’이 아닌 '진짜 간첩‘(?)이 등장하고 김일성 장군 운운이 튀어나왔으니 내 눈 또한 화등잔만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는 남한 내의 지하 정당이었던 통일혁명당 검거를 발표한다. 이 발표는 남한 사람들을 경악시키고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해방 이래 국내 최대의 지하당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에다가 “거물급은 쟁쟁한 일류대학 출신이고, 정계·학계·군부 등에 인맥관계를 가지고 깊게 침투”해 들어갔다는 것이며, 실제로 신영복이나 박성준 등 쟁쟁한 엘리트들이 이 당과 관련하여 체포됐고 당 간부들 몇 명은 그 시절 금단 중의 금단의 땅이었던 북한에 버젓이 다녀오기까지 했다는 충격적 사실에 취재 기자들도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들이 덜미를 잡힌 것은 그 한 달 전 전라도 지역의 통혁당이 일망타진되면서부터였다.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좌익 운동을 하다가 전쟁 후 은인자중하고 있던 정태묵과 최영도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을 확대해 나가던 중 아편쟁이였던 정태묵의 동생이 정보부에 찔렀다고 하는데 이 사건의 발표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직접 나서서 할만큼 '대박‘이었고, 급기야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통혁당 중앙당이 털리게 된 것이다. 이 통혁당 중앙당의 중심 인물이 김종태라는 사람이었다. 전남 지역 통혁당의 지도급이었던 최영도의 친구이자 포항 동지상고 교사 출신인 이 사람 (몇년만 더 근무했으면 가카의 은사가 될 뻔한)은 일제 때부터 사회 운동에 발을 들이고 있었고, 4,19 이후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확신으로 지하 정당 운동을 나서게 된다.
전쟁은 끝나고 반공 이데올로기의 벽이 만리장성처럼 쌓였지만 남한 사회에 회의를 가지고 그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북한이란 어쨌건 비빌 언덕이었다. 그 북한도 1961년 “남조선에서 전투적이면서도 탄력성이 있는 맑스레닌주의 당을 건설하고 그 지도적 역할을 높이는 것은 혁명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절박한 요구로 되고 있다” (4차 조선노동당 당대회)고 하면서 남한 내부의 독자적인 혁명적 당 건설노선을 지지하고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이 통혁당을 오로지 북한의 사주에 의해 만들어지고 북한에 의해 조종되는 조직이었다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김종태와 함께 체포되고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그 조카 김질락에 따르면 김종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직 가운데 북한의 선이 절대로 침투해 들어와서는 안되며 그들과의 접촉은 단절되거나 사전에 봉쇄되어야 한다.” (1965년 통혁당 서울시당 창당결성시) 북한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 도움을 받는 것이며 북한의 명령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그는 월북을 해서도 박헌영과 남로당이 숙청된 사실에 대해 진지하게 문제 제기를 했고, 북한 당국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않아 북한의 정치 일꾼들 애를 먹이기도 했다는 전설이다.
김형욱의 회고에 따르면 김형욱은 수하들에게 김종태를 특별히 지독하게 다루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종태는 그에 굴하지 않는다. 몸소 법정에 나선 김형욱과의 대화를 보면 오히려 김형욱이 밀리는 느낌을 준다. “당신이나 박정희가 특권층을 대변하는 민주공화당을 결성하였는데 우리도 민중을 대변하는 통혁당을 결성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묻는 김종태에게 김형욱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알고 있는가?”라고 묻자 김종태는 우리는 그것을 인정한 일이 없다.“고 씹어 버린다. 이에 김형욱이 “우리는 우리 법으로 당신을 재판한다! 당신 한 명 죄명만 181가지다.”라고 으름장을 놓자 김종태는 이렇게 되받아친다. “왜 181가지인가 탄압을 가한다면 1810가지 죄명을 씌워도 좋지 않은가.”
어차피 사형이 확실한 그였지만 그는 181가지 죄목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세상에 교도소 창문으로 모포를 엮어 만든 로프를 드리우고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었던 것이다. 북한은 이 김종태를 구하러 특수부대까지 파견했다가 실패했고 김종태가 죽자 영웅 칭호를 부여하고 학교나 기관에 김종태의 이름을 붙인다. (이런 식의 이름 붙이기는 원래 북한의 특기인데 최근 영남대학교에 ‘박정희대학원’이 생긴다는 말을 들으며 종북주의가 유행이긴 유행이구나 싶었다) 전쟁 이래 최대의 지하 조직의 영수에 대한 예우를 한 셈이다.
통혁당 사건 관련자 신영복 교수가 짧게 정리했듯 “모든 변혁운동의 뿌리는 그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 있는 것”(<이론> 1992년 겨울호) 이라고 본다면, 그는 일종의 자생적 공산주의자와 자생적 주사파의 원조가 아니었을지. 남한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고민을 하다 보니 맑스 레닌주의에 대한 본원적 관심을 가지게 됐고, 더하여 제국주의의 존재와 기능에 대한 분노, “민족 문제가 해결되어야 노동 문제가 해결된다."는 정치적 판단은 그를 점차 북한과 연결시켰던 게 아닐까.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맑스-레닌주의를 현시대와 우리 조국현실에 독창적으로 구현한 김일성 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이라고 선언했을지언정 북한에 자기 당 내 정보 보고서를 갖다 바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요즘의 종북주의자들과는 좀 차원이 달랐던 것도 같다. 하물며 그때는 북한이 남한보다 여러 모로 우위에 있을 때였다. 그래도 그는 북한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할 줄 알았고, 이의를 제기할 줄도 알았다. 세계 최빈국 수준이 된 북한의 현실과 탈북자 수만 명 시대에 “북한에 대한 정보가 없다.”며 설레발치는 얼치기 종북주의자들에게 그는 오늘 뭐라고 할까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는 남한 내의 지하 정당이었던 통일혁명당 검거를 발표한다. 이 발표는 남한 사람들을 경악시키고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해방 이래 국내 최대의 지하당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에다가 “거물급은 쟁쟁한 일류대학 출신이고, 정계·학계·군부 등에 인맥관계를 가지고 깊게 침투”해 들어갔다는 것이며, 실제로 신영복이나 박성준 등 쟁쟁한 엘리트들이 이 당과 관련하여 체포됐고 당 간부들 몇 명은 그 시절 금단 중의 금단의 땅이었던 북한에 버젓이 다녀오기까지 했다는 충격적 사실에 취재 기자들도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들이 덜미를 잡힌 것은 그 한 달 전 전라도 지역의 통혁당이 일망타진되면서부터였다.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좌익 운동을 하다가 전쟁 후 은인자중하고 있던 정태묵과 최영도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을 확대해 나가던 중 아편쟁이였던 정태묵의 동생이 정보부에 찔렀다고 하는데 이 사건의 발표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직접 나서서 할만큼 '대박‘이었고, 급기야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통혁당 중앙당이 털리게 된 것이다. 이 통혁당 중앙당의 중심 인물이 김종태라는 사람이었다. 전남 지역 통혁당의 지도급이었던 최영도의 친구이자 포항 동지상고 교사 출신인 이 사람 (몇년만 더 근무했으면 가카의 은사가 될 뻔한)은 일제 때부터 사회 운동에 발을 들이고 있었고, 4,19 이후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확신으로 지하 정당 운동을 나서게 된다.
전쟁은 끝나고 반공 이데올로기의 벽이 만리장성처럼 쌓였지만 남한 사회에 회의를 가지고 그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북한이란 어쨌건 비빌 언덕이었다. 그 북한도 1961년 “남조선에서 전투적이면서도 탄력성이 있는 맑스레닌주의 당을 건설하고 그 지도적 역할을 높이는 것은 혁명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절박한 요구로 되고 있다” (4차 조선노동당 당대회)고 하면서 남한 내부의 독자적인 혁명적 당 건설노선을 지지하고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이 통혁당을 오로지 북한의 사주에 의해 만들어지고 북한에 의해 조종되는 조직이었다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김종태와 함께 체포되고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그 조카 김질락에 따르면 김종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직 가운데 북한의 선이 절대로 침투해 들어와서는 안되며 그들과의 접촉은 단절되거나 사전에 봉쇄되어야 한다.” (1965년 통혁당 서울시당 창당결성시) 북한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 도움을 받는 것이며 북한의 명령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그는 월북을 해서도 박헌영과 남로당이 숙청된 사실에 대해 진지하게 문제 제기를 했고, 북한 당국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않아 북한의 정치 일꾼들 애를 먹이기도 했다는 전설이다.
김형욱의 회고에 따르면 김형욱은 수하들에게 김종태를 특별히 지독하게 다루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종태는 그에 굴하지 않는다. 몸소 법정에 나선 김형욱과의 대화를 보면 오히려 김형욱이 밀리는 느낌을 준다. “당신이나 박정희가 특권층을 대변하는 민주공화당을 결성하였는데 우리도 민중을 대변하는 통혁당을 결성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묻는 김종태에게 김형욱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알고 있는가?”라고 묻자 김종태는 우리는 그것을 인정한 일이 없다.“고 씹어 버린다. 이에 김형욱이 “우리는 우리 법으로 당신을 재판한다! 당신 한 명 죄명만 181가지다.”라고 으름장을 놓자 김종태는 이렇게 되받아친다. “왜 181가지인가 탄압을 가한다면 1810가지 죄명을 씌워도 좋지 않은가.”
어차피 사형이 확실한 그였지만 그는 181가지 죄목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세상에 교도소 창문으로 모포를 엮어 만든 로프를 드리우고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었던 것이다. 북한은 이 김종태를 구하러 특수부대까지 파견했다가 실패했고 김종태가 죽자 영웅 칭호를 부여하고 학교나 기관에 김종태의 이름을 붙인다. (이런 식의 이름 붙이기는 원래 북한의 특기인데 최근 영남대학교에 ‘박정희대학원’이 생긴다는 말을 들으며 종북주의가 유행이긴 유행이구나 싶었다) 전쟁 이래 최대의 지하 조직의 영수에 대한 예우를 한 셈이다.
통혁당 사건 관련자 신영복 교수가 짧게 정리했듯 “모든 변혁운동의 뿌리는 그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 있는 것”(<이론> 1992년 겨울호) 이라고 본다면, 그는 일종의 자생적 공산주의자와 자생적 주사파의 원조가 아니었을지. 남한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고민을 하다 보니 맑스 레닌주의에 대한 본원적 관심을 가지게 됐고, 더하여 제국주의의 존재와 기능에 대한 분노, “민족 문제가 해결되어야 노동 문제가 해결된다."는 정치적 판단은 그를 점차 북한과 연결시켰던 게 아닐까.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맑스-레닌주의를 현시대와 우리 조국현실에 독창적으로 구현한 김일성 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이라고 선언했을지언정 북한에 자기 당 내 정보 보고서를 갖다 바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요즘의 종북주의자들과는 좀 차원이 달랐던 것도 같다. 하물며 그때는 북한이 남한보다 여러 모로 우위에 있을 때였다. 그래도 그는 북한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할 줄 알았고, 이의를 제기할 줄도 알았다. 세계 최빈국 수준이 된 북한의 현실과 탈북자 수만 명 시대에 “북한에 대한 정보가 없다.”며 설레발치는 얼치기 종북주의자들에게 그는 오늘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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