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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8.23 실미도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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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1년 8월 23일 실미도의 아침

약 천만 명이 1971년 8월 23일의 아침을 보았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며, 그날 죽고 산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어슴푸레 기억할 것이다. 영화 <실미도>를 통해서다. 1968년 청와대 까러 온 김신조와 그 동료들 31명에 똑같이 맞추어 31명으로 편성된 대북 특수 부대요원들이 이날 실미도를 쑥밭으로 만들고 뭍으로 나온다. 영화에서 부대...
원들에게 '부대 말소' 사실을 흘리고 자결하는 부대장은 실제로는 비참하게 맞아죽는다. (물론 그 사실을 흘린 것 또한 설정이다.) 그리고 '부대 말소 명령'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변소에 숨어들어 살았던 기간병의 이야기는 사실이고 (지금도 그때 변소가 실미도에 남아 있다는데) 정든 기간병을 죽이지 못해 살려준 특수부대원의 이야기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간병들이 이날 새벽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만큼 처참하게 죽어간 것은 사실이다.

이들이 어떤 훈련을 받았고 왜 그렇게 행동했으며 그 행보가 어땠고 어디에 죽었는지는 영화를 통해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지금도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근처에 가면 여기까지 실미도 부대가 왔었구나 싶은 생각을 하곤 하니까 말이다. 다 비슷할 것이다. 천만 명이 그 영화를 보고 추석 설날 명절 때 툭하면 틀어주는 영화인데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적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잘 알고 있을까.

영화 속 주인공은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로 고생하며 바닥을 기다가 결국 깡패가 되었고 사람을 죽인다. 그는 사형수가 되지만 '국가'에서 나온 이들이 그를 찾아온다. 값없이 죽을래 국가를 위해 봉사할래. 영화 속에서 실미도 부대원들은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로 채워진 것으로 나온다. 이른바 사회의 쓰레기들, 양아치들,사형수들, 기타 죄수들 등등. 하지만 청와대를 까러 왔던 124군 부대를 되짚어 보자. 그들 31명은 어중이 떠중이를 훈련시킨 것이 아니라 전원 인민군 장교들이었다. 사실 이런 류의 막중한 임무에 사형수나 기타 죄수들만의 부대를 만들어 투입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아니할말로 여기서 바닥 이하였던 사람들이 무슨 사명감이 불타올라서 김일성의 목을 딴단 말인가. 관련자들의 증언을 들어 봐도 실미도 부대원들 중 전과자는 있었지만 그들 31명 (7명은 훈련 중 사망) 이 전원 죄수들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발생한다. 모두 죄수들이었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들 일부 또는 대다수가 죄수가 아니었다면 대체 어떤 식으로 실미도 부대원이 됐고, 그들은 누구였는가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그들이 유한양행 앞에서 자폭하기 전 한 대원은 기자에게 자신의 출신과 이름을 밝힌다. "충북 옥천 사람 박기수" 이는 그 당시 신문에 실리기도 했던 사실이고, 실제로 충북 옥천에는 박기수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 가족들이 서울에 올라와 기자를 찾았을 때는 이미 기자는 아무 말도 못한다는 입장이었고 그예 흐지부지된다. 그런데 충북 옥천에서 사라진 것은 박기수 뿐만이 아니었다. 또래 친구들끼리 어울려 다니던 7명이 동시에 사라진 것이다. 군대를 필한 이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들은 "조금만 고생하면 평생을 먹고 산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분명한 것은 그 7명 가운데 범죄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미도 부대 옥천 사람" - 이안재 옥천신문 대표) 이 사건을 수사했던 김중권 전 민주당 의원도 "대전역 근처에서 모집한 건달들"이라고 했다.

유한양행 앞에서 수류탄 폭발이 일어난 상황에서도 4명은 살아남았다. 그들은 군인 신분이 아니었지만 군법 재판을 받았고 2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채 대법원 상고를 포기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중권 민주당 의원은 그들이 상고해 봤자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했다고 증언한다. "사형 집행 당시 한 명은 ‘김일성 모가지에 총구멍을 내지 못하고 가는 게 한스럽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들은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최후진술에서도 그렇게 진술했습니다. 살려달라고 애걸하지도 않았으며, 예상보다 의연했습니다."

하기사 그들 손에 수십 명의 인명이 사라진 이상 살지 못할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것은 결국 국가였다. 그들은 왜 '특수범'으로 낙인찍혀야 했으며, 옥천 사람 7명을 제외한 이들은 다 어디에서 끌려온 누구이며, 그들은 왜 청와대로 가려고 했을까. 평양 침투 훈련을 받은 이들이 산개하여 숨어들었다면 오히려 다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왜 한데 어울려 버스를 타고 서울로 서울로 달려왔던 것일까. 난동이 시작되기 이전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는 어떤 보상이 있었을까. 국가는 과연 약속을 지켰을까. 하다못해 실미도의 악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그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을 괴로움 속에 살았는데 국가는 그들에게 넉넉했을까. 죽음 앞에서도 김일성 모가지를 따지 못해 한스럽다던 사형수 앞에서 '반공제일주의 국가'는 부끄럼이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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