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7년 8월 22일 이석규의 죽음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6월 항쟁이 끝났다. 6월 항쟁을 마감한 6.29 선언의 속내가 어떠하였건 사람들의 가슴엔 기쁨과 희망이 넘쳤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18년, 전두환 정권 7년의 압제 동안 숨죽여 왔던 욕구와 요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6월항쟁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대사건이었으나 상대적으로 6월 항쟁에 비해서는 그 의미가 축소된듯 보이는...
1987년 8월 22일 이석규의 죽음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6월 항쟁이 끝났다. 6월 항쟁을 마감한 6.29 선언의 속내가 어떠하였건 사람들의 가슴엔 기쁨과 희망이 넘쳤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18년, 전두환 정권 7년의 압제 동안 숨죽여 왔던 욕구와 요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6월항쟁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대사건이었으나 상대적으로 6월 항쟁에 비해서는 그 의미가 축소된듯 보이는...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은 그렇게 6월 항쟁의 꼬리를 물고 한반도를 뒤덮었다. 강남의 대규모 중화요리집부터 울산의 현대 각 공장에 이르기까지 노조 결성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눈보라 날리는 서울 철로 위로" 노동조합의 깃발이 그때처럼 힘차게 펄럭인 것은 아마도 1946년의 전평 총파업 이후 처음이 아니었을지.
노동자들은 그들이 당해 왔던 멸시와 천대의 굴레를 그들의 힘으로 박차고 일어났고 그들이 지닌 힘에 스스로 경악했다. 중장비를이끌고 울산 시내로 몰려나온 노동자들 앞에서 경찰은 쩔쩔맸고 툭하면 조인트를 까고 돌아다니던 왕회장님 앞에서 노동자 대표가 맞담배를 피워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누구인지 노동자들은 기계를 멈추면서 깨달아 갔다. 과격 분자들의 파업 난동 때문에 민주화 기회가 무산된다는 보수 언론의 악다구니가 요란했지만 한 번 터져버린 봇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1987년 8월 거제 대우 조선소에서 노조 깃발이 솟았다. 8월 8일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점심 시간이 끝나고 작업이 재개되려는 즈음,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호소가 중기부쪽에서 터져 나왔다. 옳다구나 노동자들은 함성을 지르며 훈련소 운동장으로 몰려들었다. 관리자들이 악을 쓰면서 작업 재개를 외쳤지만 이미 노동자들의 어깨와 발길에 실린 열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동자는 하나이다 좋다 좋아. 노동자는 하나이다 좋다 좋아....." 노동자들은 간단하지만 참으로 부르기 어려웠던 훌라송을 부르며 신명을 냈다. 대우조선노동조합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그는 지난한 과정의 첫발이기도 했다. 회사측의 방해 공작도 치열했고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반목이 있었다. 하지만 85년부터 임금이 하나도 오르지 않았고, 상시적인 해고의 공포에 질려 있던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불퇴전의 심정으로 '대우 가축' 아닌 '대우 가족'으로서의 권리를 부르짖는다.
그러던 중 8월 22일 사측과의 협의가 결렬된다. 현장수당 2만원과 가족 수당 1만원 신설이 조합의 요구였지만 회사측은 매정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분노한 나머지 당시 거제도 현지에 내려와 있던 김우중 회장을 직접 만나겠다고 몰려간다. 경찰이 이를 가만 보고 있을리 없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붙이며 이들을 저지한다. 이때의 풍경이 이소선 어머니의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 이렇게 실려 있다.
"다시 노동자들이 모여 스크럼을 짰어예. 경찰이 평화적으로 시위하면 길을 터 준다 카길래 그 말을 정말 철석같이 믿은기라. 그래서 오리걸음으로 갔습니더. 머리에 손 올리고 쭈그려 앉아 10분 가다 쉬고 10분 가다 쉬고 하면서 회장님 제발 불쌍한 우리 말 좀 들어 주시라고 애절하게 외치면서 갔어예. 회장님은 우리에게 왕이라. 왕을 만나려면 바닥을 기며 간거라.1"
이 정경을 떠올리는 자체가 고문이다. 불볕 더위가 아직은 꼬리를 휘감고 있었을 8월, 시커멓게 타버린 얼굴의 노동자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회장님을 만나기 위해" 머리에 손을 얹고 회장님 우리 회장님을 부르짖으면서 낑낑대며 기어가던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머리가 도리질쳐진다. 아마 김우중 회장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영락없는 오리 새끼들의 꽥꽥 행진 이상은 아니었을 것 같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그 부를 형성해 준 회장을 만나기 위해 오리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작 김우중이 머물던 호텔 앞에 이르자 이 오리들은 오리사냥을 당한다.
"경찰 들이 약속을 깨고 갑자기 최루탄을 발사하고 지랄을 하는 거라예.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입니꺼. 쭈그려 앉아 걷고 있는데 날벼락을 맞은 거라. 눈물 콧물이 쏟아지고 정신이 없었어예.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도 가고 사람에 밀려 시멘트 바닥에 쓰러지고 그런 난리가 없었어예. 근데 사람이 쓰러졌다는 소리가 들렸어예. 달려가니 최루탄이 오른쪽 가슴을 정통으로 때려서 석규가 그 자리에서 죽은 거라예."
이석규. 당시 나이 스물 두 살. 중학교를 마치고 직업훈련원을 거쳐 병역의 의무를 위해 방위산업체인 대우 조선에 와서 4년 동안 억척스럽게 일한 푸르르다 못해 새파랗던 청춘. 잔업 특근 한 번 빼놓지 않고 주야로 일하던 한 청년, 3년 동안 박봉을 쪼개 12만원씩 저금하여 550만원을 만들었노라 형에게 자랑하던 근면한 노동자, 편지 쓰기를 즐겨 1천 통이 넘는 편지를 가족 친지와 나누던 다정다감했던 젊은이는 회장님 얼굴 좀 뵙자고 외치면서 찌는 태양 아래를 오리걸음으로 걷다가 숨지고 말았다. 그 두 달 전 연세대생 이한열은 머리 바로 위에서 터진 최루탄 파편에 희생됐지만 이석규는 마치 최루탄을 총 삼아 쏜 듯한 직격 최루탄에 가슴을 맞았다. 경찰들은 정말로 오리 사냥을 했던 것일까.
그 죽음은 여러 파장을 불러 왔다. 동료의 죽음 앞에서 노동자들은 격분했고 완강히 버티던 사측도 한발짝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8월 27일 임금협상이 타결됐고, 28일 장례식이 결정됐다. 하지만 고인의 가족들은 고향에 묻겠다고 했지만 노동자들은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기에서 사단이 난다. (나는 망월동 부분은 합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쨌건 망월동으로 향하던 영구차는 경찰의 습격을 받는다. 그리고 고인의 시신이 탈취되어 고향 땅에 묻히게 된다. 김우중 회장은 그 묘소 앞에 대리석으로 된 묘비를 세워 두었다. "가장 성실하게 살고자 했던 대우가족 이석규군. 파란꿈 피우지 못한 채 이 시대의 아픔을 안고 여기 잠들다. 대우 회장 김우중" 오늘날 이 묘비에서 '대우가족'과 김우중 회장의 이름은 누군가 지워 놓았다.
과거 전국을 싸돌아다니던 무렵, 울산과 거제는 출장 기피 지역이었다. 숙박비를 비롯, 물가가 서울을 추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장님 뵙자고 오리걸음을 해야 했던 그 공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서울의 중산층을 넘어서는 수입을 올리고 있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87년 이석규를 비롯한 그들의 선배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머리가 깨져가며 싸워서 심은 나무의 열매이지만, 그들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또 다른 이석규들, 박봉에 고된 노동에 멸시에, 87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동일노동 차별임금'까지 감수해야 하는 이석규에 대해서 '이석규의 후예'여야 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1987년 8월 22일 죽어간 노동자 이석규가 오늘을 본다면 누구를 자신의 동지로 부를까.
산
노동자들은 그들이 당해 왔던 멸시와 천대의 굴레를 그들의 힘으로 박차고 일어났고 그들이 지닌 힘에 스스로 경악했다. 중장비를이끌고 울산 시내로 몰려나온 노동자들 앞에서 경찰은 쩔쩔맸고 툭하면 조인트를 까고 돌아다니던 왕회장님 앞에서 노동자 대표가 맞담배를 피워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누구인지 노동자들은 기계를 멈추면서 깨달아 갔다. 과격 분자들의 파업 난동 때문에 민주화 기회가 무산된다는 보수 언론의 악다구니가 요란했지만 한 번 터져버린 봇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1987년 8월 거제 대우 조선소에서 노조 깃발이 솟았다. 8월 8일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점심 시간이 끝나고 작업이 재개되려는 즈음,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호소가 중기부쪽에서 터져 나왔다. 옳다구나 노동자들은 함성을 지르며 훈련소 운동장으로 몰려들었다. 관리자들이 악을 쓰면서 작업 재개를 외쳤지만 이미 노동자들의 어깨와 발길에 실린 열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동자는 하나이다 좋다 좋아. 노동자는 하나이다 좋다 좋아....." 노동자들은 간단하지만 참으로 부르기 어려웠던 훌라송을 부르며 신명을 냈다. 대우조선노동조합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그는 지난한 과정의 첫발이기도 했다. 회사측의 방해 공작도 치열했고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반목이 있었다. 하지만 85년부터 임금이 하나도 오르지 않았고, 상시적인 해고의 공포에 질려 있던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불퇴전의 심정으로 '대우 가축' 아닌 '대우 가족'으로서의 권리를 부르짖는다.
그러던 중 8월 22일 사측과의 협의가 결렬된다. 현장수당 2만원과 가족 수당 1만원 신설이 조합의 요구였지만 회사측은 매정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분노한 나머지 당시 거제도 현지에 내려와 있던 김우중 회장을 직접 만나겠다고 몰려간다. 경찰이 이를 가만 보고 있을리 없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붙이며 이들을 저지한다. 이때의 풍경이 이소선 어머니의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 이렇게 실려 있다.
"다시 노동자들이 모여 스크럼을 짰어예. 경찰이 평화적으로 시위하면 길을 터 준다 카길래 그 말을 정말 철석같이 믿은기라. 그래서 오리걸음으로 갔습니더. 머리에 손 올리고 쭈그려 앉아 10분 가다 쉬고 10분 가다 쉬고 하면서 회장님 제발 불쌍한 우리 말 좀 들어 주시라고 애절하게 외치면서 갔어예. 회장님은 우리에게 왕이라. 왕을 만나려면 바닥을 기며 간거라.1"
이 정경을 떠올리는 자체가 고문이다. 불볕 더위가 아직은 꼬리를 휘감고 있었을 8월, 시커멓게 타버린 얼굴의 노동자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회장님을 만나기 위해" 머리에 손을 얹고 회장님 우리 회장님을 부르짖으면서 낑낑대며 기어가던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머리가 도리질쳐진다. 아마 김우중 회장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영락없는 오리 새끼들의 꽥꽥 행진 이상은 아니었을 것 같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그 부를 형성해 준 회장을 만나기 위해 오리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작 김우중이 머물던 호텔 앞에 이르자 이 오리들은 오리사냥을 당한다.
"경찰 들이 약속을 깨고 갑자기 최루탄을 발사하고 지랄을 하는 거라예.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입니꺼. 쭈그려 앉아 걷고 있는데 날벼락을 맞은 거라. 눈물 콧물이 쏟아지고 정신이 없었어예.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도 가고 사람에 밀려 시멘트 바닥에 쓰러지고 그런 난리가 없었어예. 근데 사람이 쓰러졌다는 소리가 들렸어예. 달려가니 최루탄이 오른쪽 가슴을 정통으로 때려서 석규가 그 자리에서 죽은 거라예."
이석규. 당시 나이 스물 두 살. 중학교를 마치고 직업훈련원을 거쳐 병역의 의무를 위해 방위산업체인 대우 조선에 와서 4년 동안 억척스럽게 일한 푸르르다 못해 새파랗던 청춘. 잔업 특근 한 번 빼놓지 않고 주야로 일하던 한 청년, 3년 동안 박봉을 쪼개 12만원씩 저금하여 550만원을 만들었노라 형에게 자랑하던 근면한 노동자, 편지 쓰기를 즐겨 1천 통이 넘는 편지를 가족 친지와 나누던 다정다감했던 젊은이는 회장님 얼굴 좀 뵙자고 외치면서 찌는 태양 아래를 오리걸음으로 걷다가 숨지고 말았다. 그 두 달 전 연세대생 이한열은 머리 바로 위에서 터진 최루탄 파편에 희생됐지만 이석규는 마치 최루탄을 총 삼아 쏜 듯한 직격 최루탄에 가슴을 맞았다. 경찰들은 정말로 오리 사냥을 했던 것일까.
그 죽음은 여러 파장을 불러 왔다. 동료의 죽음 앞에서 노동자들은 격분했고 완강히 버티던 사측도 한발짝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8월 27일 임금협상이 타결됐고, 28일 장례식이 결정됐다. 하지만 고인의 가족들은 고향에 묻겠다고 했지만 노동자들은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기에서 사단이 난다. (나는 망월동 부분은 합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쨌건 망월동으로 향하던 영구차는 경찰의 습격을 받는다. 그리고 고인의 시신이 탈취되어 고향 땅에 묻히게 된다. 김우중 회장은 그 묘소 앞에 대리석으로 된 묘비를 세워 두었다. "가장 성실하게 살고자 했던 대우가족 이석규군. 파란꿈 피우지 못한 채 이 시대의 아픔을 안고 여기 잠들다. 대우 회장 김우중" 오늘날 이 묘비에서 '대우가족'과 김우중 회장의 이름은 누군가 지워 놓았다.
과거 전국을 싸돌아다니던 무렵, 울산과 거제는 출장 기피 지역이었다. 숙박비를 비롯, 물가가 서울을 추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장님 뵙자고 오리걸음을 해야 했던 그 공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서울의 중산층을 넘어서는 수입을 올리고 있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87년 이석규를 비롯한 그들의 선배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머리가 깨져가며 싸워서 심은 나무의 열매이지만, 그들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또 다른 이석규들, 박봉에 고된 노동에 멸시에, 87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동일노동 차별임금'까지 감수해야 하는 이석규에 대해서 '이석규의 후예'여야 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1987년 8월 22일 죽어간 노동자 이석규가 오늘을 본다면 누구를 자신의 동지로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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