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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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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년 8월 21일 할렐루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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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741년 8월 21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입식 교육의 희생자이면서 모범적인 이수자였던 나는 아주 오랫 동안 한 음악가의 성별을 착각했었다. 모짜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의 선율은 몰라도 그의 별명이 “음악의 신동”이었음은 알았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은 몰라도 그가 ‘악성’(樂聖)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기억했으며 쇼팽의 폴로네이즈 선율은 구별 못해도 그를 일컫는 이름이 ‘피아노의 시인’인...
건 종종 시험에 나와서 틀려봐서 안다. 그리고 음악의 아버지는 바하였고 음악의 어머니는 헨델이었다. 착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다. ‘음악의 어머니’라는 별명 때문에 나는 근1년 동안 결코 앉아서 오줌 눈 적이 없었을 (그 시절엔 특히!) 헨델을 여자로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자였다.

독일인이었지만 이탈리아에서 음악 활동을 오래 했고 영국에서 오래 살다 죽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하기사 당시의 영국 왕실도 혈연을 따지다보니 어영부영 왕이 된 독일 귀죽 출신의 하노버 왕가였으니 그가 영국에서 오래 살고 그곳에 뼈를 묻은 것이 꼭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헨델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우선 그의 출신부터. 모짜르트건 베토벤이건 대개는 음악적 소양과 자질이 충만하거나 최소한 그쪽에 발을 걸친 집안 출신들이었지만 헨델의 경우는 가족 중 음악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헨델의 아버지는 헨델이 음악에 관심을 보일라치면 매섭고도 무섭게 아들의 관심을 틀어막았다. “넌 법률 공부를 해야 해.” (20세기 한국에도 이런 일이 흔했다.)

하지만 헨델은 아버지의 눈을 속이고 혼자 다락방에서 클라비코드 (피아노의 전신쯤 되는 악기)를 뚱땅거리면서 연습했고 이는 어디선가 들리는 낭랑한 소리를 추적해 들어간 아버지에게 발각되기까지 지속됐다. 동서고금 어디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법이라 헨델의 아버지는 헨델에게 음악의 길을 허락하게 된다. 예술가들이 흔히 그렇지만 헨델 또한 격정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음악적 해석의 차이로 다툼을 빚은 동료 음악가와 결투를 벌인 것은 유명하다. 이때 동료 음악가의 칼끝이 헨델의 가슴팍을 찌르고 들어갔지만 그 조끼 단추에 걸려 구사일생 생명을 건졌다고 한다.

음악의 아버지 바하가 사실 그 대표곡 중의 하나인 <마태 수난곡>이 멘델스존에 의해 발견되는 등 당대보다는 후세에 더욱 ‘음악의 아버지’로서의 명성을 쌓았다면 헨델은 당대에 인정받았던 작곡가였다. “독일적 중후함과 프랑스적인 장려함, 이탈리아적인 명료함” (전 객석 편집장 류태형)을 두루 갖춘 그의 재능은 한창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던 영국에서 화려하게 피어났다. 그는 독일의 하노버 선제후의 악단장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국에서의 활동에 정신이 팔려 돌아가지 않았는데 별안간 이 하노버 선제후가 영국 왕 조지 1세로 등극하는 인생의 새옹지마를 경험한다. 배신의 죄를 어떻게든 사함받아야 했던 헨델이 낸 아이디어는 매우 로맨틱했다. 조지 1세가 템스 강에 배를 띄우자 자신의 악단을 그에 접근시켜 음악을 통해 조지 1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것이 <수상 음악>이다.

잘나가는 인생이든 그렇지 못한 삶이든 부침이 없을 수는 없다. 항상 절정의 인기를 누려 온 음악가 헨델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일종의 워커홀릭이었다. 작곡 뿐 아니라 극장 운영이나 하다못해 무대의 디자인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되어야 할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누가 지운 책임이든 책임이 많으면 고통이 큰 법이다. 작곡한 오페라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파산에 직면했을 때 빚쟁이들은 그의 오선지에서 콩나물이라도 거둬 가겠다는 듯 집요하게 찾아와 괴롭혔으며, 비평가들은 독설을 쏟아냈고 청중들은 그의 작품들을 외면했다. 급기야 1736년 그는 뇌졸중에 걸려 쓰러지고 만다. 의사의 진단은 반신불수였다. 음악가로는 사형선고였던 셈이다. 그러나 헨델은 온천행 등 갖가지 방법을 통해 기적적으로 몸을 회복하고 그 이전보다 더한 열정으로 작곡에 매달린다.

1741년 8월 21일 헨델은 그로부터 근 2주일 동안 광기와도 같고 열병과도 같은 영감에 시달린다. 그는 거의 침식을 잃은 채 일종의 종교적 환희에 사로잡혀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써낸다. 즉 1741년 8월 21일은 잘나가다 코 깨지고 맘 상한 음악가의 재기에 대한 열정과 종교적인 영감, 그리고 뭔가 대박을 터뜨리고 싶은 한 음악가의 세속적 열망이 짬뽕이 되고 서로의 하이라이트만 뽑아 내어 인류에게 커다란 예술적 선물로 구성하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 유명한 <할렐루야> 대합창을 비롯해서.

월간정보자 <예술의 전당> 기자였던 노승림에 따르면 이 오라토리오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완성한 후 근 하루를 밥도 안 먹고 쓰러져 잤다는 헨델은 또 욕심을 낸다. 입장료 수입을 감안한 나머지 이 경건한 종교 음악을 교회에서 연주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일종의 유흥 지역인 코벤트 가든에서 연주하려고 했고 그로 인한 괘씸죄에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결국 초연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이뤄진다. 이때 “최초 공연 수익금은 환자와 죄수들을 위해 헌정되지만 기타 수익금은 작곡가의 몫”이라고 말하는 아일랜드인 앞에서 헨델은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감동적인 멘트를 날린다. “이 작품에서 나오는 돈은 한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나 또한 다른 분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나 자신도 환자였습니다. 지금은 건강해졌지만요. 나 또한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음악이 나를 해방시켰습니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쯔바이크, 자작나무)

그렇게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행해진 <메시아> 초연은 경이적인 환호를 불러일으키고 다시 런던으로 수입된다. <할렐루야> 합창이 울려퍼질 때 영국 왕 조지 2세가 무아지경의 감동에 빠져 일어서고 나머지 청중들이 따라 일어선 이래 이 합창이 울려퍼질 때 기립하는 전통이 세워진 것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할렐루야>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또 종교적 신심을 북돋우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겠지만 그 작품이 처음으로 그 마음을 움직인 사람은 다름아닌 작곡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실패보다는 성공에 익숙했고 바닥보다는 구름 위를 주로 거닐었던 인기 작곡가가 바닥을 경험한 후, 그리고 탐욕의 복수까지도 맞닥뜨린 후 자신의 작품에 대해 던진 한 마디는 그 음악만큼이나 울림이 크다. “나 또한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음악이 나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물론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의 경우 이 노래를 들으며 아멘을 부르짖으면서 더 죄인이 되어 가는 느낌이 있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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