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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8.13 불쌍한 악마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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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5년 8월 13일 불쌍한 악마의 출현

1975년 8월 13일 자정을 갓 넘긴 시간 전남 광산의 한 외딴 집에 괴한이 나타났다. 바짝 마른 체구에 크지 않은 키. 길쭉한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부부 둘이 곤한 잠을 자고 있던 집에 스며든 괴한은 낫을 휘둘러 남편을 죽이고 아내는 절굿대로 때려 실신시킨 뒤 물건을 훔쳐 도망간다. 그가 훔친 물건은 플래쉬 1개였다. 이 어처구니없는 범행은 대한민국 ...
범죄사에서 연쇄살인마의 원조로 운위되는 김대두의 첫 살인이었다.

당시 폭행 전과 2범이던 김대두는 일단 사람을 죽인 뒤 더욱 피에 굶주린 악마가 되어 갔다. 공범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공범이 없을 때에도 그는 단독으로 가정집에 침입, 거침없이 사람을 죽였다. 그에 깃들었던 악마의 잔혹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평택의 외딴집에 침입한 그는 70대 할머니와 일곱 살 , 다섯 살 난 손자들을 때려 죽였다. 얼굴을 못알아볼 정도로 둔기로 난타했다. 열 한 살 난 손녀는 뒷산으로 끌고 올라가 나무에 묶어놓고 똑같이 죽였다. 그나마 자신의 얼굴을 봤으니 죽였다는 변명이 성립한다고 치자. 하지만 시흥에서 벌어진 참상은 그야말로 최악 그 이하의 최악이었다. 20대 주부를 성폭행하고 죽인 것은 그렇다고 치지만 생후 3개월짜리 아이까지 짓밟아 죽였다. 21세기의 유영철도 강호순도 어린아이를 그렇게 죽인 적은 없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밝혀진 것으로는)

그는 그렇게 17명을 죽였다. 8월 13일 첫 범행 후 치안당국은 무려 50여일이 넘도록 공조 수사를 벌이지 못하고 독립된 사건 하나 하나에 매달렸다. 연쇄살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을 때였던 것이다. 그가 체포된 것은 어찌보면 어처구니없는 행동 때문이었다. 자신이 꼬드겨 공범을 만들고자 했지만 되레 물건을 훔쳐 도망친 청년을 기어코 찾아내 죽인 뒤 그 피 튀긴 바지를 버젓이 세탁소에 맡긴 것이다. 세탁소 주인이 웬 피냐고 물었을 때 그는 코피를 흘린 것이라 했고, 세탁소 주인은 순간 머리가 쭈뼛 선다. 코피를 다리에 흘리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세탁소 주인은 파출소로 달려갔고 김대두는 체포된다. 그가 연쇄살인범임이 밝혀진 것은 그 스스로 범행을 털어놨기 때문이다.

현장검증에서 김대두는 검을 쩍쩍 씹으며 자신의 범행을 재연해서 보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빨리 끝내자”면서 짜증까지 부렸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씨나락도 없어 보였다. 왜 그렇게 사람을 죽였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몸이 약해 내가 먼저 죽이기 전에는 당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허약체질로 군대 입대조차 거부당한 사람이었다. 도무지 악마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김대두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한 것은 호남 사람들이었다. 김대두의 고향이 호남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지존파 사건 때도 비슷했다. (연쇄살인마 강호순의 고향이 충청도고, 유영철은 경기도이며, 정두영의 경우 부산이지만 기묘하게도 그들의 고향은 화제에 오르지 않는다.)

당시만 해도 요즘 말로 ‘프로파일링’ 같은 것은 있지도 않을 때였고, 범죄심리학이라는 말도 생소했을 때인지라 그가 어떤 심리 상태에서 무슨 의도로 그런 짐승같은 살인들을 저질렀는지의 분석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저 17명을 죽인 악마였을 뿐이다. 그런데 사형수로서 살아가면서 그는 여러모로 변화한다. (물론 그가 사회에 다시 나갔더라면 그 변화가 이어졌을지는 의문이다.) 처음에는 변호사에게 당신도 결국 검찰의 앞잡이라며 자신이 겪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거친 욕설만 토로하던 그는 변호사와 교화사의 설득으로 점차 그 살기의 날을 거두어 간다. 담당 이상혁 변호사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네 이름 대두는 큰 대(大)에 말 두(斗)인데 결국 `큰 사람''이란 뜻 아닌가. 사형을 받아 죽을 몸이고, 인격체로서의 시간은 짧게 남아있지만 유용하게 크게 살아라. 그 길만이 인간다운 모습 되찾는 것이고 피해자에게 회개하는 길이다.” (광주일보 2004.3.17)

특히 김대두는 자신을 맡은 교화사와 많은 교류를 가졌고 그녀와 그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도무지 살인마답지 않은 단면을 드러낸다. 위 기사에서 퍼와 본다.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의지할 곳없는 이 못난 죄인이 사모님에게 첫 세배를 올립니다.… 아무개 아무개 꼬마께서 보내주신 카드는 잘 받아 보았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이런 카드를 받아보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1976년 1월 1일의 편지였다. “△△이! 어머니 말씀들으니 감기에 걸렸다는 데 다 나았는지. 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공부열심히 하고 착한 꼬마 아저씨에게 감기를 걸리게 하셨는지, 하나님도 무정하셔!…△△이 그럼 공부 열심히 해요.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5월은 어린이날, 어린이 세상...'' 교화사의 아이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리고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죽었다. 그의 유언은 이것이었다,.

“전과자들에게도 꿈은 있습니다. 어두운 그늘에 있었던 그들이기에 그 꿈은 더욱 간절하고 큽니다. 그러나 그 꿈은 세상의 냉대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납니다. 사회가 출소자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갱생의 길을 열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교도소에서도 초범자와 재범자를 분리수용하여, 죄를 배워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저 같은 불행한 젊은이가 다시는 없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저를 돌봐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만납시다.”

죽음 앞에서 선해지지 않는 자가 흔하겠는가. 요즘 나는 사형제가 유명무실할지언정 폐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서고 있다. 생후 3개월된 아이를 밟아죽인 자의 회개를 어찌 그리 쉽게 믿을 수 있을까. 그래도 그의 유언은 잠시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나는 성범죄자들의 신상 공개를 지지한다. 전자발찌에도 찬성한다. 그런데 어쨌건 법적 처벌을 받은 그들은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까. 그들을 공개하고 차별하고 우리 앞에 드러내고 우리가 피하면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물론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 짐승들까지 우리가 신경써 줘야 할 이유는 없다는 데에도 나는 동의한다. 그런데 해결되는 일이 없다는 게 문제다. 아예 격리하거나 죽여 버리지 않는 한.

물론 세상 살다 보면 별 놈이 많을 것이다. 악마도 있고 짐승도 생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건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포기하는 순간 지옥도는 더 넓고 크게 펼쳐지기 시작한다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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