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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8.11 북간도관리사 이범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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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3년 8월 11일 북변간도관리사 이범윤 임명

압록강과 두만강이 우리의 국경이라는 것이 지금의 상식이지만 100년 전에는 사뭇 사정이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일단 청나라와 조선의 관료들이 만나 세운 정계비에 양국의 국경은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토문강에 대한 해석이 조선과 청나라가 달랐고 그로 인해 영토 분쟁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860년대 이후 함경도 사람들이 간도...
지역에 많이 정착해 있었고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빼앗긴 청나라 역시 만주 지역에 대한 봉금령을 해제하고 자국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청은 국경을 넘은 조선인들은 변발을 하고 청나라 백성이 되던가 아니면 돌아가야 한다고 우겼다.

이 옥신각신 속에서 먼저 빛을 발휘한 사람은 이중하라는 사람이다. 그는 감계사, 즉 경계를 살피는 관리로 임명받아 청나라와 두 차례 담판에 나선다. 첫 담판은 1885년. 1885년이라면 임오군란 뒤 청나라가 대원군을 납치해 가고, 갑신정변으로 3일 천하를 이룬 김옥균 정권을 뭉개 버리고 조선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때였다. 이때 조선에 나와 있던 인물이 후일 아주 짧게나마 중국의 황제 노릇까지 하는 위안 스카이, 원세개다. 이런 판국에 청나라와 담판을 짓는다는 것은 아마도 비탈길 아랫쪽에서 족구하는 느낌과 비슷했으리라. 하지만 당찬 관료 이중하는 두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한 치도 밀리지 않는다.

사실 우리측 논리도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국경을 우리가 주장하는 토문강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가는)으로 정할라치면 거의 함경도의 몇 배나 되는 땅이 (심지어 연해주까지!) 조선 땅이 되는 셈이었는데 이건 좀 무리였던 것이다. 이중하 역시 두 번째 회담에서는 국경선을 두만강의 지류인 홍토수로 주장한다. 청나라는 이마저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고 이중하는 강단있게 맞선다. 까짓거 안되면 내 목을 가져가라고! 를 부르짖으면서. 결국 회담은 결렬되고 양국은 뚜렷한 국경선을 긋지 못하고 만다. 조선인들을 추방하면서 국경선을 분명히 긋자고 나섰던 청의 판정패였다. 이 불분명함이 조선측에는 기회가 된다.

조선인들은 계속 간도로 들어갔고 청나라는 이에 강경대응하는 가운데 국경 문제는 다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1897년 함경도 관찰사에 따르면 한국인 이주자는 수만 호에 이르렀고 모두 청나라의 압제를 받고 있는데 청나라 사람의 수는 그에 훨씬 못미친다고 했다. 압박에 못이겨 변발한 이도 있으나 그는 극히 일부이니 하시라도 빨리 경계가 정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년 후 청나라가 의화단의 난 등 내우외환으로 정신없는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간도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1903년 그 지역에 나가 있던 간도시찰사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해 버린 것이다. 즉 간도는 우리 땅이니 우리가 관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범윤은 헤이그 밀사 중 1인인 이위종의 삼촌이고 러시아 공사로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자결로 순절한 이범진의 형이다. 그는 고종 황제로부터 마패와 유척을 하사받고 간도관리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호구조사를 시행했고 군대 파견을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자 사포대라는 일종의 의용군을 조직하여 무력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중하가 담판을 통해 청나라의 요구를 꺾어 일종의 판을 마련했다면 이범윤은 그 판 위에서 실제로 간도 지역에서 살아가던 한국인들의 안위를 지켰다. 조그만 충돌 뿐 아니라 수백 명 단위의 ‘전투’도 벌어졌다 하니 간도 지역은 일종의 저강도 전쟁 상황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러일 전쟁 국면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청나라와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고 청나라 역시 전쟁 후에 제대로 경계를 정하자고 나와 대한제국 정부는 이범윤을 소환한다. 하지만 이범윤은 이에 응하지 않고 러시아령으로 넘어가 항일 투쟁에 나선다. 이범윤의 의병대 소속 '의병참모중장‘은 후일 간도 협약을 통해 간도를 완전히 청나라 영토로 못박은 일본의 이토오 히로부미를 암살하게 된다. 그 이름이 안중근이다.

이범윤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러시아령과 북만주 일대를 누비며 독립군의 지도자로서 활약한다. 13도 의병의 서울 진공 작전에도 그 이름을 올렸고,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한 기록이 보인다. 예전 대학가의 구전 가요 중에 “광야를 달리는 사나이 사나이 오늘은 북간도 내일은 만주 고향을 떠나온지가 몇 해이더냐 웃어 보는 얼굴에 날리는 수염.....”이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범윤은 그 가사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후손들에 따르면 그는 1940년 노령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서울로 돌아와 숨진다. 가끔 머리가 맑아질 때마다 “청산리 고지를 내가 맨 먼저 밟았다.”고 중얼거렸다고 하며, 죽은 뒤에는 일본 관헌이 두려와 화장했다고 한다. 간도 일대를 호령했고 이후에는 독립 투쟁에 모든 걸 바친 그는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간도는 우리 땅” 구호에 반대한다. 조선인들이 넘어가 땅을 개척하고 살았기에 간도가 부각된 것이지 조선이나 대한제국 정부가 그 땅에 행정권을 행사한 것은 그렇게 긴 세월이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중국 영토가 된지 100년이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국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기로 한 터에, 국경을 맞대고 있지도 않은 대한민국 정부가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해 본들 그만한 공염불이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임금의 아버지를 잡아가고, 일개 외국의 관리가 말을 타고 경복궁에 들어설만큼 위세 당당하던 청나라에 목숨을 걸고 맞서던 이중하의 기개와, 1903년 8월 11일 “간도관리사”가 되어 청나라의 압박에 무력으로 저항하며 자국인의 안전을 도모하려던 이범윤의 이름은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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