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9년 8월 10일 우장춘 서거
아주 오래 전 노래모임 ‘꽃다지’에서 <민들레처럼>이라는 노래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엉뚱한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특히 이 대목에서.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대도 민들레처럼”. 아무리 짓밟아도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살자는 것은 어느 위대한 위인이 평생 동안 간직했던 좌우명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이름은 우장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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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8월 10일 우장춘 서거
아주 오래 전 노래모임 ‘꽃다지’에서 <민들레처럼>이라는 노래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엉뚱한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특히 이 대목에서.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대도 민들레처럼”. 아무리 짓밟아도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살자는 것은 어느 위대한 위인이 평생 동안 간직했던 좌우명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이름은 우장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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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의 아버지는 우범선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민비가 비명에 죽어갔던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 대대장으로서 일본군과 함께 경복궁에 진입했던 이였으며 민비의 시신을 확인해 주었다고도 한다. 그는 부귀영화를 노린 친일파라기보다는 민비 일파의 전횡에 반대하는 신념을 가진 쪽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지만, 어쨌건 ‘국모’를 시해한 범인이 됐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아내를 잃은 고종은 절치부심 원수를 갚고자 했는데 그 집요함의 대상은 진범인 일본인들이 아니라 종범이라 할 망명한 조선인들로 귀결됐다. 우범선 역시 고영근이라는 사람 (이 사람의 일편단심도 알아줄만 하다. 그는 합방 후에도 고종과 민비의 능참봉이 되어 그 능을 지키고 살았다)에게 피살된다.
그때 우범선은 이미 일본 여인 사카이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두고 있었는데 그 중 장남이 장춘이었다. 남편은 남편의 조국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죽었고, 일본에도 기댈 언덕이 없었던 사카이는 큰아들 장춘을 잠시 고아원에 맡긴다. 그때 우장춘은 일본인 아이들에게 심한 이지메를 당하며 두들겨 맞았는데 이 일을 알게 된 어머니는 우장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길가에 핀 민들레를 보아라. 저 민들레는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운단다. 낙심말고 저 민들레처럼 어려운 일을 이겨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 말과 더불어 어린 우장춘에게 자존감이 되어 주었던 것은 어머니의 다음과 같은 다짐이었다. “너는 조선의 혁명가의 아들이다.”
그 후 우장춘은 놀라운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농학계의 총아로 성장한다. 그의 과학적 업적을 줄줄이 읊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별명은 ‘불독’이었다. 생김새도 불독을 떠올리게 하거니와 한 번 꽂힌 연구 과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품성의 사나이였다. 솔직히 나름의 의기를 발휘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야욕의 꼭둑각시가 되어 버린 아버지보다는 과부의 몸으로 별 일을 다 하면서 아들을 교육시키고,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너는 조선의 혁명가의 아들이다.”고 아금박았던 어머니의 영향이 더 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잘나가는 우장춘도 결국 조센징이었다. 그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 와다나베는 자신의 친정과 절연을 해야 했다. 반쪽이긴 해도 조센징의 핏줄이 어엿한 사범학교를 나온 처녀와 결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아내 또한 보통내기가 아니었는지 무려 30여년 동안 자신의 남편을 인정하지 않는 친정과 절연하고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우장춘도 자식 앞에선 한 수 접을 수 밖에 없었던지 딸이 태어난 후 아내의 지인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택하여 스나가라는 성을 얻어 스나가 나가하루가 된다. 하지만 영어 논문에는 어김없이 U라는 성을 사용하며 포기할 수만은 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지고 있었다. 또 후일 그를 한국으로 초대하는데 공을 세우는 김종을 비롯하여 이태규 등 한국 과학자들과 연을 맺으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바꿔 보려고 했지만 허무하게 실패하고 끝내 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던 나라의 이름은 점점 더 그의 마음 속에서 커 가게 된다.
마침내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한국이 독립했을 때 앞서 말한 김종을 중심으로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그를 한국으로 초청하자 우장춘은 귀국을 결심하고 스스로 귀국 조선인들을 수용하던 오오무라 수용소에 들어간다. 일본 정부는 기겁을 하고 그 귀국을 막으려 했지만 경성으로 출생 신고가 된 (우범선은 아들의 출생 신고를 경성, 즉 서울로 했다.) 호적 등본을 들이미는 데에는 도리가 없었다. 환국 추진위원회는 그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100만원을 보내 왔는데, 우장춘은 아내와 2남 4녀에게는 이 돈을 한푼도 주지 않고 종자들과 연구 기자재들을 잔뜩 사 들고 귀국한다. 그의 귀국 코멘트는 이것이었다.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으로서 일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일할 것이고 이곳에 뼈를 묻겠습니다.”
평생을 일본인으로 살았던 그는 우리 말을 하지 못했다. 귀국하고 나서도 연구할 일이 많은데 언어 공부까지 할 시간이 없다면서 굳이 우리 말을 배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듣는 건 다 알아들었고, 한글도 깨우쳤지만) 그리고 ‘국모를 시해한 자의 아들’이라는 딱지도 항상 따라다녔다. 하루는 꽤 떵떵거리는 정치인이 왜 우리 말을 배우지 않느냐고 힐난하자 우장춘은 이렇게 웃어 넘겼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말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저 정도는 굳이 입 다물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한민국의 수만 인명을 구했다. 제주도를 감귤의 본고장으로 만든 것, 감자의 병충해 문제를 해결하여 강원도 지역의 유수한 생산품으로 만든 것,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개량형 배추를 만들어 낸 것 등등 그의 업적은 열거하기 귀찮을 정도로 많고,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위대하다.
1953년 8월 어머니 사카이가 일본에서 죽었다. 그러나 우장춘은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온 가족을 일본에 두고 온, 일본말밖에 모르는 농학자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덜컥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쩌랴 싶은 걱정이 든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은 것이다. 우장춘은 동래 원예 시험장에 영구 없는 빈소를 차리고 상복을 입었다. 약소국의 망명 정객의 아내가 되어 남편을 그 조국의 자객에 잃고 무서운 가난을 딛고 자식을 세계적인 농학자로 키워 낸 사카이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고 한다. “아들을 장하게 길러내어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였으니 이제는 지하에 가서 남편을 만나도 충분히 면목이 선다,”
우장춘은 어머니가 죽은 6년 뒤 1959년 8월 10일 세상을 뜬다. 병석에 누워서도 그는 링게르병과 함께 시험관에 든 품종을 머리맡에 두고 있었고, 한국인의 주식인 벼의 개량 연구에도 마지막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뜨기 3일전 농림부 장관이 그의 병실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문화 포장을 전달한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에 이은 두 번째의 문화 포장이었다. 반세기를 반쪽짜리 일본인으로서 일본에서 살았던 우장춘은 9년밖에 자신의 또 하나의 조국에 기거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큰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뜬다. 훈장을 받으며 그는 말했다. “나는 이제 여한이 없네. 조국이 나를 알아 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다네.”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시아의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살아야 했던, 그 때문에 그 아내까지도 친정과 수십 년 연을 끊고 살아야 했고, 또 역시 그 때문에 목숨 걸고 자신을 키웠던 어머니의 임종마저도 지키지 못했던, 자신의 두 조국 모두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던 한 과학자는 그렇게 죽었다. 나는 그를 위대한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지만, 그는 탁월한 일본인이기도 했고, 더욱 위대한 일본인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그때 우범선은 이미 일본 여인 사카이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두고 있었는데 그 중 장남이 장춘이었다. 남편은 남편의 조국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죽었고, 일본에도 기댈 언덕이 없었던 사카이는 큰아들 장춘을 잠시 고아원에 맡긴다. 그때 우장춘은 일본인 아이들에게 심한 이지메를 당하며 두들겨 맞았는데 이 일을 알게 된 어머니는 우장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길가에 핀 민들레를 보아라. 저 민들레는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운단다. 낙심말고 저 민들레처럼 어려운 일을 이겨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 말과 더불어 어린 우장춘에게 자존감이 되어 주었던 것은 어머니의 다음과 같은 다짐이었다. “너는 조선의 혁명가의 아들이다.”
그 후 우장춘은 놀라운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농학계의 총아로 성장한다. 그의 과학적 업적을 줄줄이 읊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별명은 ‘불독’이었다. 생김새도 불독을 떠올리게 하거니와 한 번 꽂힌 연구 과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품성의 사나이였다. 솔직히 나름의 의기를 발휘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야욕의 꼭둑각시가 되어 버린 아버지보다는 과부의 몸으로 별 일을 다 하면서 아들을 교육시키고,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너는 조선의 혁명가의 아들이다.”고 아금박았던 어머니의 영향이 더 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잘나가는 우장춘도 결국 조센징이었다. 그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 와다나베는 자신의 친정과 절연을 해야 했다. 반쪽이긴 해도 조센징의 핏줄이 어엿한 사범학교를 나온 처녀와 결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아내 또한 보통내기가 아니었는지 무려 30여년 동안 자신의 남편을 인정하지 않는 친정과 절연하고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우장춘도 자식 앞에선 한 수 접을 수 밖에 없었던지 딸이 태어난 후 아내의 지인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택하여 스나가라는 성을 얻어 스나가 나가하루가 된다. 하지만 영어 논문에는 어김없이 U라는 성을 사용하며 포기할 수만은 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지고 있었다. 또 후일 그를 한국으로 초대하는데 공을 세우는 김종을 비롯하여 이태규 등 한국 과학자들과 연을 맺으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바꿔 보려고 했지만 허무하게 실패하고 끝내 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던 나라의 이름은 점점 더 그의 마음 속에서 커 가게 된다.
마침내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한국이 독립했을 때 앞서 말한 김종을 중심으로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그를 한국으로 초청하자 우장춘은 귀국을 결심하고 스스로 귀국 조선인들을 수용하던 오오무라 수용소에 들어간다. 일본 정부는 기겁을 하고 그 귀국을 막으려 했지만 경성으로 출생 신고가 된 (우범선은 아들의 출생 신고를 경성, 즉 서울로 했다.) 호적 등본을 들이미는 데에는 도리가 없었다. 환국 추진위원회는 그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100만원을 보내 왔는데, 우장춘은 아내와 2남 4녀에게는 이 돈을 한푼도 주지 않고 종자들과 연구 기자재들을 잔뜩 사 들고 귀국한다. 그의 귀국 코멘트는 이것이었다.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으로서 일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일할 것이고 이곳에 뼈를 묻겠습니다.”
평생을 일본인으로 살았던 그는 우리 말을 하지 못했다. 귀국하고 나서도 연구할 일이 많은데 언어 공부까지 할 시간이 없다면서 굳이 우리 말을 배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듣는 건 다 알아들었고, 한글도 깨우쳤지만) 그리고 ‘국모를 시해한 자의 아들’이라는 딱지도 항상 따라다녔다. 하루는 꽤 떵떵거리는 정치인이 왜 우리 말을 배우지 않느냐고 힐난하자 우장춘은 이렇게 웃어 넘겼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말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저 정도는 굳이 입 다물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한민국의 수만 인명을 구했다. 제주도를 감귤의 본고장으로 만든 것, 감자의 병충해 문제를 해결하여 강원도 지역의 유수한 생산품으로 만든 것,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개량형 배추를 만들어 낸 것 등등 그의 업적은 열거하기 귀찮을 정도로 많고,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위대하다.
1953년 8월 어머니 사카이가 일본에서 죽었다. 그러나 우장춘은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온 가족을 일본에 두고 온, 일본말밖에 모르는 농학자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덜컥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쩌랴 싶은 걱정이 든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은 것이다. 우장춘은 동래 원예 시험장에 영구 없는 빈소를 차리고 상복을 입었다. 약소국의 망명 정객의 아내가 되어 남편을 그 조국의 자객에 잃고 무서운 가난을 딛고 자식을 세계적인 농학자로 키워 낸 사카이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고 한다. “아들을 장하게 길러내어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였으니 이제는 지하에 가서 남편을 만나도 충분히 면목이 선다,”
우장춘은 어머니가 죽은 6년 뒤 1959년 8월 10일 세상을 뜬다. 병석에 누워서도 그는 링게르병과 함께 시험관에 든 품종을 머리맡에 두고 있었고, 한국인의 주식인 벼의 개량 연구에도 마지막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뜨기 3일전 농림부 장관이 그의 병실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문화 포장을 전달한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에 이은 두 번째의 문화 포장이었다. 반세기를 반쪽짜리 일본인으로서 일본에서 살았던 우장춘은 9년밖에 자신의 또 하나의 조국에 기거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큰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뜬다. 훈장을 받으며 그는 말했다. “나는 이제 여한이 없네. 조국이 나를 알아 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다네.”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시아의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살아야 했던, 그 때문에 그 아내까지도 친정과 수십 년 연을 끊고 살아야 했고, 또 역시 그 때문에 목숨 걸고 자신을 키웠던 어머니의 임종마저도 지키지 못했던, 자신의 두 조국 모두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던 한 과학자는 그렇게 죽었다. 나는 그를 위대한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지만, 그는 탁월한 일본인이기도 했고, 더욱 위대한 일본인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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