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8년 8월 8일 8888의 비극
영화 <왕과 나> 속에서 영국인 가정교사 안나는 세계 지도를 펴고 태국의 왕자와 공주들에게 가르친다. 그 지도 속에서 태국은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로 작다. 이에 태국 왕세자가 분연히 항의하고 안나는 영국 또한 태국보다도 작은 섬나라라고 말한다. 그래도 왕세자는 태국이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라고 기염을 토하는데, 사실 더 재밌는 장면은 그 전에 등장한다. 태국의 눈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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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8월 8일 8888의 비극
영화 <왕과 나> 속에서 영국인 가정교사 안나는 세계 지도를 펴고 태국의 왕자와 공주들에게 가르친다. 그 지도 속에서 태국은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로 작다. 이에 태국 왕세자가 분연히 항의하고 안나는 영국 또한 태국보다도 작은 섬나라라고 말한다. 그래도 왕세자는 태국이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라고 기염을 토하는데, 사실 더 재밌는 장면은 그 전에 등장한다. 태국의 눈으로 ...
본 세계 지도가 나오는 것이다. 그 지도에는 중국만큼 큰 태국이 있고 옆의 찌그러지도록 작은 나라 왕은 겁에 질려 도망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 나라는 버마였다.
버마는 태국의 이웃나라였고, 이상하게도 이웃국가끼리는 웬수인 법이라 태국과 꽤 오랜 기간 피튀기는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왕과 나>의 태국판 세계지도와는 달리 버마가 전반적으로 우세했다고 한다.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 (지금 왕조의 이전 왕조)는 버마군에 의해 참혹하게 멸망당하기도 했다. 지금 태국의 국보로서 온 나라가 애지중지하는 에머럴드 불상도 버마와의 전쟁 와중에 꽤 오랫 동안 행방이 묘연해진 적이 있었으니 대체로 태국의 열세였다고 하겠다. 그만큼 버마는 동남아에서 방귀깨나 뀌는 강대국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독립을 이룬 뒤에도 버마는 아시아에서 그 발전 가능성에서 손꼽히는 나라였다. 비옥한 토지에 지하자원도 동남아시아에서 으뜸이었다. 땅덩이도 좁고 자원도 빈약한데다 전쟁까지 치룬 극동의 가련한 나라와는 질적으로 다른 나라였다. 위상도 그랬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나오기 45년 전에 이미 이 나라의 우 탄트가 UN 사무총장을 역임할 정도였으니 비록 총장의 직위가 국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대충은 짐작이 갈 것이다.
소수민족 문제 등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유지해 오던 버마에 강철 군화 자국이 찍힌 것은 1962년이었다. 아웅산의 동료이자 국방장관이었던 네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배웠는지 아니면 한국에 가르쳐 준 것인지 ‘버마식 사회주의’(한국은 한국형 민주주의)를 내세워 버마 전체를 질식시켜 간다. 이 네윈이 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 당시 전두환에게 달려와 위로를 전했던 바로 그 사람이니 어지간히 오래도 해먹는다.
억압이 있는 땅에서는 저항이 있는 법. 주류 버마족에 맞서 싸우는 소수민족들도 그렇지만 버마 내부에서도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그것이 군부 독재의 철벽 틈 사이로 새어나왔던 사건이 1974년 우탄트 시신 탈취사건이다. 앞서 언급한 전 UN 사무총장 우 탄트가 사망하자 일군의 학생들이 우탄트의 장례식이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진행되는데 항의, 시신을 탈취하여 랭군 대학으로 옮긴 뒤 당국에 고인의 업적에 맞는 적절한 장례 절차를 요구한 것이다. 버마 군부는 계엄령으로 대응하고 학생들을 짓눌렀다.
1988년이 왔다. 버마의 실권자 네윈이 정권을 잡았던 1962년만 해도 가엾은 눈으로 지켜보던 나라는 바로 그 전 해 민주화를 위한 홍역을 치르고 이제는 올림픽을 치른다고 정신이 없던 시기였다. 그 해 봄부터 버마는 시끄러웠다. 3월. 랑군의 어느 찻집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패싸움으로 번져 수백 명의 경찰이 투입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큰 싸움이었는데 그 주도자 한 명이 방면된다. 아버지가 정부의 고관이었던 것. 여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군과 경찰은 하던 대로 학생들을 체포, 호송했는데 얼마나 꽉꽉 채워 넣었던지 그 가운데 41명의 학생이 질식사 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을 기화로 버마 전국은 들끓는다. 그리고 마침내 26년 군부독재에 대한 포한이 마침내 터지는 날이 왔다. 1988년 8월 8일이었다.
버마 국민들은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학생들과 승려들이 앞장섰고 시민들이 뒤를 따랐다. 군이 발포하자 돌을 던지거나 자전거 살을 화살 삼아 쏘면서 맞섰고 상당수의 공무원, 군인, 심지어 정보기관원들까지도 시위에 나섰다. 우리 귀에 역시 낯익은 아웅산 수지도 이때 등장하여 인민을 위한 임시 정부 수립을 목청껏 외친다. 필리핀에 이어 한국, 다음은 버마까지 피플 파워가 승리하는가 싶었지만 버마에는 군부가 있었다. 네윈은 8월 8일 이전에 정권에서 축출됐지만 이런 불길한 경고를 남긴다. ““민주주의와 복수 정당 제도를 허용할 것이지만 만약 국민들이 시위를 하게 되면 군인들은 총구를 그들에게 곧바로 겨누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군부는 어김없이 이 그 경고를 이행한다. 수천 명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시체로 변했다. 버마 군부는 “얼마든지 죽이겠다,”는 각오가 확연한 상태였다. 네윈이 수십 년간 병영 체제로 길러온 국가의 군인들은 ‘보이는 대로 죽여라’는 명령에 기계처럼 대응했고 그 앞에서는 피플 파워도, 아웅산 수지의 외침도 외국의 규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실베스타 스탤론의 노화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영화 <람보 4>에 등장하는 잔혹한 군인들은 바로 이 버마 군들인바, 그들은 자국민을 완벽하게 도살했고 마침내 ‘질서’를 회복한다. 그리고 아웅산 수지는 가택에 연금된 채로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간다. 몇 해 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버마를 취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버마인의 목소리를 전한다. “미국이 우리나라는 안 쳐들어오나.” 맨손으로 저항했다가 피의 폭풍에 휩쓸려버린 나라의 민중의 가냘픈 숨소리였다. 차라리 외국의 침입이 축복이라는 것이었다.
1988년 8월 8일의 버마는 그런 것을 가르쳐 준다. 아무리 민중의 분노가 크고,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젊은이들과 시민들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와도, 무력을 쥔 자들이 이지러짐이나 망설임 없이 ‘단결하여’ 그 무력을 행사한다면 처참하게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 언젠가는 승리할지는 모르겠지만, 비참한 패배감 속에 무력하게 지낼 수도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런 질문이 참 역겹고 싫다. “그 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왜 인민들이 저항하지 않겠는가.” 1988년 8월 8일, 갓 창간했던 한겨레 신문 기사를 보며 버마 민중들의 항쟁을 응원했던 사람으로서 언젠가는 정말로 언젠가는 버마 민중들이 영화 <왕과 나>에 등장했던 겁에 질린 버마 왕처럼, 자신들의 지배자들의 혼을 빼놓고 그 엉덩이를 차 줄 날이 오기를 기원해 본다.
버마는 태국의 이웃나라였고, 이상하게도 이웃국가끼리는 웬수인 법이라 태국과 꽤 오랜 기간 피튀기는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왕과 나>의 태국판 세계지도와는 달리 버마가 전반적으로 우세했다고 한다.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 (지금 왕조의 이전 왕조)는 버마군에 의해 참혹하게 멸망당하기도 했다. 지금 태국의 국보로서 온 나라가 애지중지하는 에머럴드 불상도 버마와의 전쟁 와중에 꽤 오랫 동안 행방이 묘연해진 적이 있었으니 대체로 태국의 열세였다고 하겠다. 그만큼 버마는 동남아에서 방귀깨나 뀌는 강대국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독립을 이룬 뒤에도 버마는 아시아에서 그 발전 가능성에서 손꼽히는 나라였다. 비옥한 토지에 지하자원도 동남아시아에서 으뜸이었다. 땅덩이도 좁고 자원도 빈약한데다 전쟁까지 치룬 극동의 가련한 나라와는 질적으로 다른 나라였다. 위상도 그랬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나오기 45년 전에 이미 이 나라의 우 탄트가 UN 사무총장을 역임할 정도였으니 비록 총장의 직위가 국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대충은 짐작이 갈 것이다.
소수민족 문제 등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유지해 오던 버마에 강철 군화 자국이 찍힌 것은 1962년이었다. 아웅산의 동료이자 국방장관이었던 네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배웠는지 아니면 한국에 가르쳐 준 것인지 ‘버마식 사회주의’(한국은 한국형 민주주의)를 내세워 버마 전체를 질식시켜 간다. 이 네윈이 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 당시 전두환에게 달려와 위로를 전했던 바로 그 사람이니 어지간히 오래도 해먹는다.
억압이 있는 땅에서는 저항이 있는 법. 주류 버마족에 맞서 싸우는 소수민족들도 그렇지만 버마 내부에서도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그것이 군부 독재의 철벽 틈 사이로 새어나왔던 사건이 1974년 우탄트 시신 탈취사건이다. 앞서 언급한 전 UN 사무총장 우 탄트가 사망하자 일군의 학생들이 우탄트의 장례식이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진행되는데 항의, 시신을 탈취하여 랭군 대학으로 옮긴 뒤 당국에 고인의 업적에 맞는 적절한 장례 절차를 요구한 것이다. 버마 군부는 계엄령으로 대응하고 학생들을 짓눌렀다.
1988년이 왔다. 버마의 실권자 네윈이 정권을 잡았던 1962년만 해도 가엾은 눈으로 지켜보던 나라는 바로 그 전 해 민주화를 위한 홍역을 치르고 이제는 올림픽을 치른다고 정신이 없던 시기였다. 그 해 봄부터 버마는 시끄러웠다. 3월. 랑군의 어느 찻집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패싸움으로 번져 수백 명의 경찰이 투입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큰 싸움이었는데 그 주도자 한 명이 방면된다. 아버지가 정부의 고관이었던 것. 여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군과 경찰은 하던 대로 학생들을 체포, 호송했는데 얼마나 꽉꽉 채워 넣었던지 그 가운데 41명의 학생이 질식사 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을 기화로 버마 전국은 들끓는다. 그리고 마침내 26년 군부독재에 대한 포한이 마침내 터지는 날이 왔다. 1988년 8월 8일이었다.
버마 국민들은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학생들과 승려들이 앞장섰고 시민들이 뒤를 따랐다. 군이 발포하자 돌을 던지거나 자전거 살을 화살 삼아 쏘면서 맞섰고 상당수의 공무원, 군인, 심지어 정보기관원들까지도 시위에 나섰다. 우리 귀에 역시 낯익은 아웅산 수지도 이때 등장하여 인민을 위한 임시 정부 수립을 목청껏 외친다. 필리핀에 이어 한국, 다음은 버마까지 피플 파워가 승리하는가 싶었지만 버마에는 군부가 있었다. 네윈은 8월 8일 이전에 정권에서 축출됐지만 이런 불길한 경고를 남긴다. ““민주주의와 복수 정당 제도를 허용할 것이지만 만약 국민들이 시위를 하게 되면 군인들은 총구를 그들에게 곧바로 겨누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군부는 어김없이 이 그 경고를 이행한다. 수천 명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시체로 변했다. 버마 군부는 “얼마든지 죽이겠다,”는 각오가 확연한 상태였다. 네윈이 수십 년간 병영 체제로 길러온 국가의 군인들은 ‘보이는 대로 죽여라’는 명령에 기계처럼 대응했고 그 앞에서는 피플 파워도, 아웅산 수지의 외침도 외국의 규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실베스타 스탤론의 노화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영화 <람보 4>에 등장하는 잔혹한 군인들은 바로 이 버마 군들인바, 그들은 자국민을 완벽하게 도살했고 마침내 ‘질서’를 회복한다. 그리고 아웅산 수지는 가택에 연금된 채로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간다. 몇 해 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버마를 취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버마인의 목소리를 전한다. “미국이 우리나라는 안 쳐들어오나.” 맨손으로 저항했다가 피의 폭풍에 휩쓸려버린 나라의 민중의 가냘픈 숨소리였다. 차라리 외국의 침입이 축복이라는 것이었다.
1988년 8월 8일의 버마는 그런 것을 가르쳐 준다. 아무리 민중의 분노가 크고,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젊은이들과 시민들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와도, 무력을 쥔 자들이 이지러짐이나 망설임 없이 ‘단결하여’ 그 무력을 행사한다면 처참하게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 언젠가는 승리할지는 모르겠지만, 비참한 패배감 속에 무력하게 지낼 수도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런 질문이 참 역겹고 싫다. “그 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왜 인민들이 저항하지 않겠는가.” 1988년 8월 8일, 갓 창간했던 한겨레 신문 기사를 보며 버마 민중들의 항쟁을 응원했던 사람으로서 언젠가는 정말로 언젠가는 버마 민중들이 영화 <왕과 나>에 등장했던 겁에 질린 버마 왕처럼, 자신들의 지배자들의 혼을 빼놓고 그 엉덩이를 차 줄 날이 오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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