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5년 8월 7일 어느 용감한 기독교인의 소천
한국 기독교의 본고장이라면 아무래도 평안도다. 통상을 핑계로 한 해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을 때 "이 양이들. 내 가만히 두디 안카서!"라고 일갈하며 폭탄을 들고 그 배에 올라 포로가 된 조선 관리를 구출해 왔던 간 큰 사내 박춘권이 '주님의 종'이 된 얘기는 즐겨 운위되거니와 조선의 여러 도 가운데 평안남북도 일원의 기독교세는 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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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7일 어느 용감한 기독교인의 소천
한국 기독교의 본고장이라면 아무래도 평안도다. 통상을 핑계로 한 해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을 때 "이 양이들. 내 가만히 두디 안카서!"라고 일갈하며 폭탄을 들고 그 배에 올라 포로가 된 조선 관리를 구출해 왔던 간 큰 사내 박춘권이 '주님의 종'이 된 얘기는 즐겨 운위되거니와 조선의 여러 도 가운데 평안남북도 일원의 기독교세는 실로...
당당했다. 진남포도 그 중의 하나였다. 온누리교회로 그 명망이 드높은 하용조 목사가 진남포 출신이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나의 은인이며 사상은 달라도 위대한 애국자"라는 극찬을 들었던 손정도 목사도 진남포에서 목회를 했다. 그리고 1927년 한 기독교인이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변선환이다.
그는 모태신앙은 아니었고 열여덟살 때쯤 스스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특히 그를 기독교인으로 바꿔 놓은 사람은 신석구 목사였다. 그는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1인으로 이후 기독교의 암흑 시기에도 신사참배와 일본의 전승 기념 예배를 거부한 감리교 목사였다. 해방 후 북한의 공산화 과정에서 월남 권유를 들었지만 "내 양들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북한에 남았던 그는 매우 독특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목사 가운을 입지 않았고 로만 칼라도 하지 않은 그는 항상 두루마기를 펄럭이고 다녔다. 또 동양적인 것이라면 눈살부터 찌푸리고 손을 젓던 많은 목사들과는 달리 동양 경전에 해박했다.
신석구에 따르면 유교는 기독교 이전의 유태교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대중을 기독교로 이끌기 위한 일종의 '몽학선생'이었다. "다른 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우치게 하여 예수께로 소개하는 '蒙學先生'이요, 예수는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참 길이시니...." (감신대 이덕주 교수의 글 중에서) 이만해도 배타성에서는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한국 개신교에서는 별종이라 할 만했다. 신석구 자신 타종교를 인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변선환은 자신이 '신앙의 아버지'라 불렀던 신석구를 넘어선 청출어람을 창출하게 된다. 신앙에서도 "호부에 견자없다"는 말이 성립하나보다.
또 감리교는 신석구 목사 외에도 타 종교에 개방적인 면모를 보인 목사들의 전통이 있었다. 유학자 출신의 최병헌 목사는 이미 1912년에 유불선과 기독교의 교리를 설파하는 4인의 대화 형식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었고 양주삼 목사는 비슷한 시기에 구약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을 던지고 다녔었다. 이런 토양 위에서 신석구가 있었고 결국은 변선환이 나온 것이리라.
이미 스위스 바젤 신학대학에 유학하던 시절부터 그의 방 벽에는 중국 선불교의 새 장을 연 육조혜능 선사의 '神秀의 偈'가 걸려 있었다고 하거니와 "영혼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불교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들의 대화"를 스스로 불러 일으켰던 그는 "종교의 등불은 달라도 그 빛은 하나"라는 생각에 도달했고, 기독교 밖에서도 구원은 있으며, 기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은 신학적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는 일부 꼴통 개신교인들의 엉덩이에 찔린 바늘과 같았다. 당연히 그들은 미쳐 날뛰었다.
"예수를 거부한 땅이기에 쓰나미가 왔다."는 악마적 설교로 유명한 금란교회 목사 김홍도가 그 선봉이었다. 그의 말은 매카시즘과 무식함과 종교재판관의 사악함이 골고루 곁들여져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북한으로 가지 않고 국가를 혼란시키려 하는 것이나 무신론자들이 기독교의 탈을 쓰고 교회를 파괴하려 드는 것은 사탄의 간계다. 그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서 학문의 자유로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변선환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기로 한다.
1992년 5월 7일 20세기의 ‘종교 재판’이 열린다. 재판정은 어디 감신교 관련 건물도 아니고, 기독교회관도 아닌 김홍도 목사가 시무하는 금란교회였다. 이미 재판이 아니라 십자가형의 선고장이었고 인민재판의 기독교식이었다. 신자들이 악을 쓰고 야유하는 가운데 스승의 무죄를 항변하는 감신대생들은 입이 틀어막혔고 끌려 나갔다. 여기서 감신교 재판위원회는 변선환에게 감리교회법상 최고형인 출교 처분을 내린다. 감리교회 목사직 파면은 기본, 신자 자격까지 빼앗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대학원생들이 하나같이 그에게 학위 지도를 받으려 했기 때문에 한 교수가 학생 6명 이상을 지도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법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이정배 교수)였던 감리교 신학대학장은 그로써 사탄의 졸개로 공식적으로 규정된다. 신석구와 최병헌이 이를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랴. 감리교의 시원이라 할 웨슬리는 또 이를 보고 뭐라고 했을까.
그로부터 몇 년 후 1995년 8월 7일 "나는 한국에 실려온 병신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 분은 선교사가 오기 전부터 이 땅위에서 활동하고 계셨다."고 속이 다 시원하게 얘기하던 변선환은 그가 평생 해온 것처럼 서재 위에서 펜과 종이와 씨름하다가 홀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유고는 "한일양국의 근대화와 종교"였다. 마지막 글을 쓰다가 느닷없이 찾아든 하늘의 명령 앞에서 그가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머리 속에 떠올린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 말이 아니었을지. "동족끼리 종교인들끼리 싸우지 말고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거대한 악마적인 권세와 싸우라' 그리고 제자들이 찾아오면 항상 찾았다는 우래옥 냉면집의 정다운 대화가 그가 떠올린 마지막 풍경이 아니었을지.
그는 모태신앙은 아니었고 열여덟살 때쯤 스스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특히 그를 기독교인으로 바꿔 놓은 사람은 신석구 목사였다. 그는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1인으로 이후 기독교의 암흑 시기에도 신사참배와 일본의 전승 기념 예배를 거부한 감리교 목사였다. 해방 후 북한의 공산화 과정에서 월남 권유를 들었지만 "내 양들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북한에 남았던 그는 매우 독특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목사 가운을 입지 않았고 로만 칼라도 하지 않은 그는 항상 두루마기를 펄럭이고 다녔다. 또 동양적인 것이라면 눈살부터 찌푸리고 손을 젓던 많은 목사들과는 달리 동양 경전에 해박했다.
신석구에 따르면 유교는 기독교 이전의 유태교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대중을 기독교로 이끌기 위한 일종의 '몽학선생'이었다. "다른 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우치게 하여 예수께로 소개하는 '蒙學先生'이요, 예수는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참 길이시니...." (감신대 이덕주 교수의 글 중에서) 이만해도 배타성에서는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한국 개신교에서는 별종이라 할 만했다. 신석구 자신 타종교를 인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변선환은 자신이 '신앙의 아버지'라 불렀던 신석구를 넘어선 청출어람을 창출하게 된다. 신앙에서도 "호부에 견자없다"는 말이 성립하나보다.
또 감리교는 신석구 목사 외에도 타 종교에 개방적인 면모를 보인 목사들의 전통이 있었다. 유학자 출신의 최병헌 목사는 이미 1912년에 유불선과 기독교의 교리를 설파하는 4인의 대화 형식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었고 양주삼 목사는 비슷한 시기에 구약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을 던지고 다녔었다. 이런 토양 위에서 신석구가 있었고 결국은 변선환이 나온 것이리라.
이미 스위스 바젤 신학대학에 유학하던 시절부터 그의 방 벽에는 중국 선불교의 새 장을 연 육조혜능 선사의 '神秀의 偈'가 걸려 있었다고 하거니와 "영혼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불교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들의 대화"를 스스로 불러 일으켰던 그는 "종교의 등불은 달라도 그 빛은 하나"라는 생각에 도달했고, 기독교 밖에서도 구원은 있으며, 기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은 신학적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는 일부 꼴통 개신교인들의 엉덩이에 찔린 바늘과 같았다. 당연히 그들은 미쳐 날뛰었다.
"예수를 거부한 땅이기에 쓰나미가 왔다."는 악마적 설교로 유명한 금란교회 목사 김홍도가 그 선봉이었다. 그의 말은 매카시즘과 무식함과 종교재판관의 사악함이 골고루 곁들여져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북한으로 가지 않고 국가를 혼란시키려 하는 것이나 무신론자들이 기독교의 탈을 쓰고 교회를 파괴하려 드는 것은 사탄의 간계다. 그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서 학문의 자유로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변선환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기로 한다.
1992년 5월 7일 20세기의 ‘종교 재판’이 열린다. 재판정은 어디 감신교 관련 건물도 아니고, 기독교회관도 아닌 김홍도 목사가 시무하는 금란교회였다. 이미 재판이 아니라 십자가형의 선고장이었고 인민재판의 기독교식이었다. 신자들이 악을 쓰고 야유하는 가운데 스승의 무죄를 항변하는 감신대생들은 입이 틀어막혔고 끌려 나갔다. 여기서 감신교 재판위원회는 변선환에게 감리교회법상 최고형인 출교 처분을 내린다. 감리교회 목사직 파면은 기본, 신자 자격까지 빼앗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대학원생들이 하나같이 그에게 학위 지도를 받으려 했기 때문에 한 교수가 학생 6명 이상을 지도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법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이정배 교수)였던 감리교 신학대학장은 그로써 사탄의 졸개로 공식적으로 규정된다. 신석구와 최병헌이 이를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랴. 감리교의 시원이라 할 웨슬리는 또 이를 보고 뭐라고 했을까.
그로부터 몇 년 후 1995년 8월 7일 "나는 한국에 실려온 병신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 분은 선교사가 오기 전부터 이 땅위에서 활동하고 계셨다."고 속이 다 시원하게 얘기하던 변선환은 그가 평생 해온 것처럼 서재 위에서 펜과 종이와 씨름하다가 홀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유고는 "한일양국의 근대화와 종교"였다. 마지막 글을 쓰다가 느닷없이 찾아든 하늘의 명령 앞에서 그가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머리 속에 떠올린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 말이 아니었을지. "동족끼리 종교인들끼리 싸우지 말고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거대한 악마적인 권세와 싸우라' 그리고 제자들이 찾아오면 항상 찾았다는 우래옥 냉면집의 정다운 대화가 그가 떠올린 마지막 풍경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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