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8년 8월 5일 손창호 사망
어렸을 때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이 노래를 하라고 시키면 내 또래 아이들의 입에서는 CM 송이 많이 흘러나왔다. ‘동구 밖 과수원길’은 너무 심심하고 유행가를 따라부르기엔 좀 버거웠던 아이들에게 만만한 것이 CM송이었던 까닭이다. “열 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둘이서 만나요 브라보콜 살짝쿵 데이트 해태 부라보콘!”이며 “맛동산 먹고 즐거운 파티” 라든가 “아아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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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8월 5일 손창호 사망
어렸을 때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이 노래를 하라고 시키면 내 또래 아이들의 입에서는 CM 송이 많이 흘러나왔다. ‘동구 밖 과수원길’은 너무 심심하고 유행가를 따라부르기엔 좀 버거웠던 아이들에게 만만한 것이 CM송이었던 까닭이다. “열 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둘이서 만나요 브라보콜 살짝쿵 데이트 해태 부라보콘!”이며 “맛동산 먹고 즐거운 파티” 라든가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카시아껌” 등등 다양한 CM송들이 단가처럼 불리웠는데 그 가운데 내 기억에 남는 CM송 가운데 하나가 ‘시모나’다. “약속 시간 5분 늦게 달려갔더니 무뚝뚝한 그 남자 화가 났다네. 아차 시모나가 생각이 나서 시모나를 사다주니 화가 풀렸네. 과자 속의 아이스크림 해태 시모나.”
시모나는 붕어빵처럼 과자 속에 아이스크림이 든 빙과류의 시조격이라 할만한 제품인데 (그 전에 뭐가 있었다면 할 말 없음. 지적 바람) 그 CM송과 CM 그림은 매우 유쾌했다. 헐레벌떡 달려가는 여자와 삐져버린 남자, 아차! 할 때의 여자의 똥그란 눈, 아이스크림 보고 헤헤거리는 남자를 마치 그 가사를 그리다시피 보여 주었던 CM이었다. 이때 여자는 오늘날에는 푼수 비슷한 중년 여자로 즐겨 브라운관에 등장하지만 그때만 해도 청춘스타로 그 이름이 하늘에 닿았던 임예진이고, 남자 주인공이 '뚱띠‘ (어렸을 적 나와 내 친구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손창호였다.
손창호는 이미 1970년, 즉 내가 태어나던 해에 탤런트로 데뷔했었다. 그리고 70년대를 풍미한 ‘얄개’ 시리즈에 등장했고 나에게 ‘최유리’라는 이름과 더불어 요즘 말로 하면 ‘아이돌’ 배우로 기억되는 ‘이승현’을 골탕먹이거나 되레 골탕을 먹는 심술맞은 선배로 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얼마 전 페북 모임에서 그때 이승현의 애를 태우던, 공부 잘하고 얼굴도 이쁜 범생이였던 주희 역을 맡으셨던 여배우를 중년의 모습으로 만났을 때에도 머리가 천정에 닿도록 뛰어올랐거니와 이승현, 손창호, 진유영, 강주희, 임예진, 이덕화 등등의 이름은 나의 초딩 시절을 떠올려 주는 키 네임 (Key Name)들로 남아 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그의 슬픈 최후 직전 촬영됐던 <병원 24시> 편이다. <병원24시>는 제작진에게나 촬영 대상에게나 심지어 그 프로그램을 감수해야 할 외주 담당 PD에게나 매우 힘겨운 프로그램이었다. 흔히들 병원에 가 보면 건강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된다고 하거니와 일삼아 그 아픔과 불행의 현장을 취재하고 때로는 잔인하게 카메라를 들이대야 하며, 그를 어떻게든 스토리에 녹여 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고충은 며느리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손창호가 나왔다! 그는 당뇨와 신부전증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왕년의 ‘뚱띠’를 못알아 볼 만큼은 아니었지만 시커먼 얼굴과 허공을 향할 뿐인 흐린 눈동자, 시한부 통고를 받았음에도 담배를 피워대던 그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저 사람 어쩌다 저렇게 된 것인가. 영화 감독을 해 보겠다고 <동경 아리랑>을 찍었다는 얘긴 까마득하게 들었고, 그 영화가 재산 들어먹고 피폐해지도록 망쪼가 들었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어떻게 저렇게 될 수가. 이경규도 서세원도 그랬다가 살아났는데..... 왕년의 그 손창호가 부인과도 이혼하고 늙은 어머니의 눈물어린 수발을 받으며 시들어가고 있었다니. 영화판 소식에 정통한 선배 말로는 손창호의 성격이 워낙 좀 독불스러운 면이 있었다고 했다. 자기가 꽂히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야 했고, 좀 고까운 일을 만나면 부드럽게 넘어가기보다는 고집을 세우다가 때려치우게 되거나 그를 강요당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그는 병원 24시에서 해 보고 싶은 몇 가지를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하나가 바다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고 “월급쟁이를 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무슨 뜻이었을까. 어렸을 때에는 하이틴 스타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스타로 살았고, 말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맞닥뜨린 죽음 앞에서 인생의 바닥을 경험하는 롤러코스트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서 평범한 삶, 고만고만한 직장에서 수더분한 마누라 만나 아들 딸 낳고 월급이 적니 많으니 하루에 몇 번씩 사표 썼다가 찢고, 적금 타고 집 장만하고 애들 좋은 대학 가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절실하게 부러워졌던 것일까.
하지만 그는 천상 월급쟁이가 될 팔자는 못되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연기 학원에서 연기 지망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할 때의 그 눈빛은 병원에서의 그것과 보름달과 반딧불의 차이가 있었으니까. 내가 그를 마지막 본 연기자로서의 모습은 베스트 극장의 이름 모를 한 편이었다.
그는 거기서 일본인 역으로 나왔다. 일본에서는 하층 백수 건달이었지만 사업가로 한국에 건너오면서 기생관광을 비롯해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는데 하루는 술에 취해 자신에게 엄청나게 아부하던 한국인 사업가 앞에서 조센징 운운하다가 (한국인 사업가는 김용건씨였다. 배우 하정우의 아버지) 그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는다. 술에서 깬 다음날 걸려온 한국인 사업가의 전화를 받으면서 손창호는 먼저 사과하지만 돌아온 것은 더욱 정중하고 비굴하기까지 한 한국인의 사죄..... 손창호가 아주 비열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 드라마는 끝난다. 하지만 그 넓적한 얼굴에서 피어난 잔인하도록 비열한 미소는 선명히 내 기억의 박물관 속 한켠에 큼직하게 걸려 있다. 그는 명연기자였다.
그 딸 손화령이 탤런트로 활동 중이다. 언젠가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벽제 납골당에 계세요. 초라하고 조그만 공간에요. 그때는 저도 어렸고 사정도 어려워서. 꼭 성공해서 넓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모셔야겠지요. 그게 제 목표예요.” 그녀는 가정적으로는 좋은 아버지일 수 없었던 고인을 미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번도 장래 희망을 ‘배우’로 삼은 적이 없다고 하는데 피는 못속이는지 배우가 됐다. 그녀가 아버지의 영광을 이어받기를, 그리고 그 그림자는 결코 물려받지 않기를 바라 본다. 손창호의 연기를 보며 말똥말똥 스크린으로 빠져들었던 유년 시절을 추억의 자산으로 간직한 이로서의 기원이다
시모나는 붕어빵처럼 과자 속에 아이스크림이 든 빙과류의 시조격이라 할만한 제품인데 (그 전에 뭐가 있었다면 할 말 없음. 지적 바람) 그 CM송과 CM 그림은 매우 유쾌했다. 헐레벌떡 달려가는 여자와 삐져버린 남자, 아차! 할 때의 여자의 똥그란 눈, 아이스크림 보고 헤헤거리는 남자를 마치 그 가사를 그리다시피 보여 주었던 CM이었다. 이때 여자는 오늘날에는 푼수 비슷한 중년 여자로 즐겨 브라운관에 등장하지만 그때만 해도 청춘스타로 그 이름이 하늘에 닿았던 임예진이고, 남자 주인공이 '뚱띠‘ (어렸을 적 나와 내 친구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손창호였다.
손창호는 이미 1970년, 즉 내가 태어나던 해에 탤런트로 데뷔했었다. 그리고 70년대를 풍미한 ‘얄개’ 시리즈에 등장했고 나에게 ‘최유리’라는 이름과 더불어 요즘 말로 하면 ‘아이돌’ 배우로 기억되는 ‘이승현’을 골탕먹이거나 되레 골탕을 먹는 심술맞은 선배로 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얼마 전 페북 모임에서 그때 이승현의 애를 태우던, 공부 잘하고 얼굴도 이쁜 범생이였던 주희 역을 맡으셨던 여배우를 중년의 모습으로 만났을 때에도 머리가 천정에 닿도록 뛰어올랐거니와 이승현, 손창호, 진유영, 강주희, 임예진, 이덕화 등등의 이름은 나의 초딩 시절을 떠올려 주는 키 네임 (Key Name)들로 남아 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그의 슬픈 최후 직전 촬영됐던 <병원 24시> 편이다. <병원24시>는 제작진에게나 촬영 대상에게나 심지어 그 프로그램을 감수해야 할 외주 담당 PD에게나 매우 힘겨운 프로그램이었다. 흔히들 병원에 가 보면 건강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된다고 하거니와 일삼아 그 아픔과 불행의 현장을 취재하고 때로는 잔인하게 카메라를 들이대야 하며, 그를 어떻게든 스토리에 녹여 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고충은 며느리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손창호가 나왔다! 그는 당뇨와 신부전증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왕년의 ‘뚱띠’를 못알아 볼 만큼은 아니었지만 시커먼 얼굴과 허공을 향할 뿐인 흐린 눈동자, 시한부 통고를 받았음에도 담배를 피워대던 그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저 사람 어쩌다 저렇게 된 것인가. 영화 감독을 해 보겠다고 <동경 아리랑>을 찍었다는 얘긴 까마득하게 들었고, 그 영화가 재산 들어먹고 피폐해지도록 망쪼가 들었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어떻게 저렇게 될 수가. 이경규도 서세원도 그랬다가 살아났는데..... 왕년의 그 손창호가 부인과도 이혼하고 늙은 어머니의 눈물어린 수발을 받으며 시들어가고 있었다니. 영화판 소식에 정통한 선배 말로는 손창호의 성격이 워낙 좀 독불스러운 면이 있었다고 했다. 자기가 꽂히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야 했고, 좀 고까운 일을 만나면 부드럽게 넘어가기보다는 고집을 세우다가 때려치우게 되거나 그를 강요당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그는 병원 24시에서 해 보고 싶은 몇 가지를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하나가 바다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고 “월급쟁이를 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무슨 뜻이었을까. 어렸을 때에는 하이틴 스타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스타로 살았고, 말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맞닥뜨린 죽음 앞에서 인생의 바닥을 경험하는 롤러코스트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서 평범한 삶, 고만고만한 직장에서 수더분한 마누라 만나 아들 딸 낳고 월급이 적니 많으니 하루에 몇 번씩 사표 썼다가 찢고, 적금 타고 집 장만하고 애들 좋은 대학 가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절실하게 부러워졌던 것일까.
하지만 그는 천상 월급쟁이가 될 팔자는 못되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연기 학원에서 연기 지망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할 때의 그 눈빛은 병원에서의 그것과 보름달과 반딧불의 차이가 있었으니까. 내가 그를 마지막 본 연기자로서의 모습은 베스트 극장의 이름 모를 한 편이었다.
그는 거기서 일본인 역으로 나왔다. 일본에서는 하층 백수 건달이었지만 사업가로 한국에 건너오면서 기생관광을 비롯해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는데 하루는 술에 취해 자신에게 엄청나게 아부하던 한국인 사업가 앞에서 조센징 운운하다가 (한국인 사업가는 김용건씨였다. 배우 하정우의 아버지) 그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는다. 술에서 깬 다음날 걸려온 한국인 사업가의 전화를 받으면서 손창호는 먼저 사과하지만 돌아온 것은 더욱 정중하고 비굴하기까지 한 한국인의 사죄..... 손창호가 아주 비열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 드라마는 끝난다. 하지만 그 넓적한 얼굴에서 피어난 잔인하도록 비열한 미소는 선명히 내 기억의 박물관 속 한켠에 큼직하게 걸려 있다. 그는 명연기자였다.
그 딸 손화령이 탤런트로 활동 중이다. 언젠가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벽제 납골당에 계세요. 초라하고 조그만 공간에요. 그때는 저도 어렸고 사정도 어려워서. 꼭 성공해서 넓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모셔야겠지요. 그게 제 목표예요.” 그녀는 가정적으로는 좋은 아버지일 수 없었던 고인을 미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번도 장래 희망을 ‘배우’로 삼은 적이 없다고 하는데 피는 못속이는지 배우가 됐다. 그녀가 아버지의 영광을 이어받기를, 그리고 그 그림자는 결코 물려받지 않기를 바라 본다. 손창호의 연기를 보며 말똥말똥 스크린으로 빠져들었던 유년 시절을 추억의 자산으로 간직한 이로서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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