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41년 8월 14일 거룩! 막시밀리안 꼴베
나찌 독일은 거의 전 유럽을 석권했다. 프랑스는 초반에 무너졌고 노르웨이도 나찌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바야흐로 지중해에서 발틱해까지, 노르망디의 해변부터 폴란드의 평원까지 히틀러 휘하의 독일군은 승승장구하며 온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 승리를 토대로 나찌는 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인간 이하’의 종족들에 대한 격리 작업에도 착수했다. 각지에 수용소...
1941년 8월 14일 거룩! 막시밀리안 꼴베
나찌 독일은 거의 전 유럽을 석권했다. 프랑스는 초반에 무너졌고 노르웨이도 나찌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바야흐로 지중해에서 발틱해까지, 노르망디의 해변부터 폴란드의 평원까지 히틀러 휘하의 독일군은 승승장구하며 온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 승리를 토대로 나찌는 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인간 이하’의 종족들에 대한 격리 작업에도 착수했다. 각지에 수용소...
가 세워졌고 유태인, 집시, 폴란드 인 등 이른바 열등한 인종들과 나찌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은 그곳에 수용되어 혹독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1940년 5월 세워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 가운데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1941년 초, 한 명의 폴란드인 신부가 잡혀 들어왔다. 유태인들을 보호하고 폴란드 레지스탕스 신문 발행에 관여한 혐의였다. 이름은 막시밀리안 꼴베. 몇 년 전에는 일본에서 선교한 적도 있고, 출판, 방송 등 대중 매체를 통해 가톨릭의 가르침을 전하며 정력적인 활동을 해 온 사제였다. 그런데 수용소에서 탈출 사고가 일어났다. 소식이 알려지자 수용소는 엄청난 공포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것은 수용소장이 누군가 탈주할 경우 무작위로 10명을 뽑아 아사(餓死) 감방에 넣겠다고 선포해 놨던 탓이다.
아사 감방이란 음식도 심지어 물도 주지 않은 채 굶겨 죽이는 감방을 말하는 것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감방 안에서 말라 죽어간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턱턱 막혀 온다. 무정한 나찌 수용소 간수들은 열을 지어 선 수인들 가운데 10명을 지명했다. 손가락질 하나 하나에 생사가 갈렸고 손가락총을 맞은 이들은 그만 털썩 털썩 곳곳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차라리 총알 한 방에 머리가 뚫리는 게 낫지, 며칠일지 모를 기간 죽음같은 기갈에 시달리다 죽어가야 하다니. 그 가운데 한 명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나는 아내와 어린 딸이 있다구요. 나는 죽을 수 없어요.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남은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면서도 나찌 간수가 그를 동정하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나찌 간수가 그를 살려 준다면 다른 사람이 그 지옥으로 들어가야 하므로.
그때 꼴베 신부가 나섰다. “저 사람 대신 내가 들어가게 해 주시오. 나는 가족이 없는 가톨릭 신부니까 괜찮소.” 나찌들도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신부건 무엇이건 죽음이 틀림이 없는 방 안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사람이라니. 그것도 며칠 동안이 될지 모르는 죽음 이상의 고통 끝에 죽음을 맞아야 하는데. 하지만 곧 정리됐다. “마음대로 하게 하라.” 난데없이 나선 신부 때문에 죽음 직전에서 놓여 난 이의 이름은 가요비니체코였다. 그는 그 순간 꼴베 신부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멍하니 신부를 쳐다보았을 뿐이고, 꼴베 신부는 되레 환한 미소로 그와 이별했다. 가요비니체코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끝내 전쟁 후까지 살아남았고 1995년 아흔 셋의 나이로 죽는다. 적어도 그는 허무하게 죽지는 않고 살아남아 꼴베 신부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무 옷도 걸치기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 아사 감방에 처넣어진 10명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목마름과 굶주림에 지쳐 죽어간다. 그들의 마지막을 지킨 이는 꼴베 신부였다. 시신을 확인하려 들어온 나찌 간수들 앞에서도 꼴베 신부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어 그들을 되레 질리게 만들었다. 괴로운 신음 사이에서도 기도와 성가 소리는 끊이지 않고 울려 나왔고 아홉 명의 희생자들은 가냘프지만 든든한 신부의 배웅 속에 처참한 이승과 고별할 수 있었다. “꼴베 신부가 가요비니체코씨를 구하기 위해 대신 죽겠다고 신청한 것이 아니라 신부는, 사실은 아사 감방에 함께 넣어진 9명을 구하기 위해 신청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는 꼴베 기념관장 오자키 신부의 말은 그래서 적절한지도 모른다.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의 마지막 소임을 위해, 그가 평생을 섬긴 천주님은 꼴베 신부에게 초인적인 생명력을 선물했다, 물도 음식도 일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젊은 희생자들이 다 죽어 나간 뒤에도 17일 동안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완전히 질려 버린 것은 나찌 쪽이었다. 마지막 양심인지 아니면 성미가 급한 탓이었던지 그들은 꼴베 신부에게 독주사를 놓아 안락사시키기로 한다. 꼴베 신부는 앙상한 팔을 내밀어 나찌의 마지막 주사를 맞고서 천국으로 떠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처럼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말이 없다. 더구나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는 요한복음 15장 13절 말씀에 이르면 당신같은 신의 아들이나 가능하지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는 볼멘 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 볼멘 소리가 무색해지는 것은 그런 ‘큰 사람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데에 아연해지기 때문이며,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헛수고는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일 것 같다.
1941년 초, 한 명의 폴란드인 신부가 잡혀 들어왔다. 유태인들을 보호하고 폴란드 레지스탕스 신문 발행에 관여한 혐의였다. 이름은 막시밀리안 꼴베. 몇 년 전에는 일본에서 선교한 적도 있고, 출판, 방송 등 대중 매체를 통해 가톨릭의 가르침을 전하며 정력적인 활동을 해 온 사제였다. 그런데 수용소에서 탈출 사고가 일어났다. 소식이 알려지자 수용소는 엄청난 공포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것은 수용소장이 누군가 탈주할 경우 무작위로 10명을 뽑아 아사(餓死) 감방에 넣겠다고 선포해 놨던 탓이다.
아사 감방이란 음식도 심지어 물도 주지 않은 채 굶겨 죽이는 감방을 말하는 것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감방 안에서 말라 죽어간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턱턱 막혀 온다. 무정한 나찌 수용소 간수들은 열을 지어 선 수인들 가운데 10명을 지명했다. 손가락질 하나 하나에 생사가 갈렸고 손가락총을 맞은 이들은 그만 털썩 털썩 곳곳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차라리 총알 한 방에 머리가 뚫리는 게 낫지, 며칠일지 모를 기간 죽음같은 기갈에 시달리다 죽어가야 하다니. 그 가운데 한 명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나는 아내와 어린 딸이 있다구요. 나는 죽을 수 없어요.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남은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면서도 나찌 간수가 그를 동정하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나찌 간수가 그를 살려 준다면 다른 사람이 그 지옥으로 들어가야 하므로.
그때 꼴베 신부가 나섰다. “저 사람 대신 내가 들어가게 해 주시오. 나는 가족이 없는 가톨릭 신부니까 괜찮소.” 나찌들도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신부건 무엇이건 죽음이 틀림이 없는 방 안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사람이라니. 그것도 며칠 동안이 될지 모르는 죽음 이상의 고통 끝에 죽음을 맞아야 하는데. 하지만 곧 정리됐다. “마음대로 하게 하라.” 난데없이 나선 신부 때문에 죽음 직전에서 놓여 난 이의 이름은 가요비니체코였다. 그는 그 순간 꼴베 신부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멍하니 신부를 쳐다보았을 뿐이고, 꼴베 신부는 되레 환한 미소로 그와 이별했다. 가요비니체코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끝내 전쟁 후까지 살아남았고 1995년 아흔 셋의 나이로 죽는다. 적어도 그는 허무하게 죽지는 않고 살아남아 꼴베 신부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무 옷도 걸치기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 아사 감방에 처넣어진 10명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목마름과 굶주림에 지쳐 죽어간다. 그들의 마지막을 지킨 이는 꼴베 신부였다. 시신을 확인하려 들어온 나찌 간수들 앞에서도 꼴베 신부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어 그들을 되레 질리게 만들었다. 괴로운 신음 사이에서도 기도와 성가 소리는 끊이지 않고 울려 나왔고 아홉 명의 희생자들은 가냘프지만 든든한 신부의 배웅 속에 처참한 이승과 고별할 수 있었다. “꼴베 신부가 가요비니체코씨를 구하기 위해 대신 죽겠다고 신청한 것이 아니라 신부는, 사실은 아사 감방에 함께 넣어진 9명을 구하기 위해 신청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는 꼴베 기념관장 오자키 신부의 말은 그래서 적절한지도 모른다.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의 마지막 소임을 위해, 그가 평생을 섬긴 천주님은 꼴베 신부에게 초인적인 생명력을 선물했다, 물도 음식도 일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젊은 희생자들이 다 죽어 나간 뒤에도 17일 동안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완전히 질려 버린 것은 나찌 쪽이었다. 마지막 양심인지 아니면 성미가 급한 탓이었던지 그들은 꼴베 신부에게 독주사를 놓아 안락사시키기로 한다. 꼴베 신부는 앙상한 팔을 내밀어 나찌의 마지막 주사를 맞고서 천국으로 떠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처럼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말이 없다. 더구나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는 요한복음 15장 13절 말씀에 이르면 당신같은 신의 아들이나 가능하지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는 볼멘 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 볼멘 소리가 무색해지는 것은 그런 ‘큰 사람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데에 아연해지기 때문이며,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헛수고는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