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1년 8월 3일 두 번째 전대협 평양에 가다
삼성이 만든 카피 가운데 밥맛 떨어지는 것 중의 하나가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카피다. 그 얘기가 1등이 되기 위해서는 물불과 선악을 가리지 않는 삼성의 행태를 표현하는 것도 같고, 아예 그 1등주의 자체가 천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헌데 딴에는 그 말도 맞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삼성이 예를 든 것처럼, 대서양 최초 횡단자는 린드버...
1991년 8월 3일 두 번째 전대협 평양에 가다
삼성이 만든 카피 가운데 밥맛 떨어지는 것 중의 하나가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카피다. 그 얘기가 1등이 되기 위해서는 물불과 선악을 가리지 않는 삼성의 행태를 표현하는 것도 같고, 아예 그 1등주의 자체가 천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헌데 딴에는 그 말도 맞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삼성이 예를 든 것처럼, 대서양 최초 횡단자는 린드버...
그지만 그 뒤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고, 다른 예로,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통일의 꽃 임수경은 그를 후광으로 하여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던 반면 1991년 8월 3일 북한을 방문했던 두 번째 통일의 꽃(?) 박성희에 대해서는 그 관심과 배려의 농도가 무안할 정도로 차이가 나지 않는가 말이다.
91년 8월 북한에 들어갈 당시 박성희는 경희대 작곡과 4학년이었다. 졸업반이었다. 꿈많은 음악도로서 졸업 후에 펼쳐질 삶에 대한 고민도 계획도 많았을 것이지만 조국의 부름(?)에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원래 이들은 판문점에서 열기로 한 남북학생통일대축전 실무회담을 정부가 불허할 경우에 대비해 그해 6월 독일로 나왔다. 정북가 남북학생통일대축전을 허가할 리 만무했고, 전대협 지도부는 그들에게 전대협의 대표로서 베를린에서 북한 대표와 실무회담을 하라고 지시했고, 뒤이어 통일대축전 남측 대표로 북한에 갈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북한으로 갔다.
원래는 첫 번째 '통일의 꽃' 임수경처럼 판문점을 통해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전대협은 막막한 명령을 전해 온다.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범청학련 공동 연락 본부를 설치하라는 것. 조직의 명령에 따라 꿈 많은 졸업반 학생 두 명은 통일운동을 위한 망명가로 그 신분이 바뀐다. (라고 쓰고 국제미아가 됐다.라고 읽는다) 전대협에서 이들의 활동을 위해 얼마나 지원해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처지는 참혹할 지경이었다. 집도 절도 없이 가진 돈은 5백 달러. 그들은 그 상황에서 '범청학련'을 결성했다, 그 즈음을 박성희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제 마음 놓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들어가면 구속되겠지 몇 년 뒤에 석방되겠지. 제일 먼저 학교로 달려갈 것이다. 아마 군대 갔다 온 친구들은 그때 학교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들어와도 좋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차라리 거기 있으라고 했고 전대협은 '박대표가 공동사무국장을 맡는다'는 공문까지 보내 왔다. 범청학련이 결성되던 날 나는 가장 기뻤고 가장 슬펐다."
범청학련 사무국장님은 통일운동을 진행하는 한편으로 체류 연장 허가를 따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동구권에서 몰려든 수많은 난민들 틈에 끼어 번호표를 받기 위해 악다구니를 치던 박성희와 성용승. 그런데 번호표가 성용승에서 끊겼다. 망연한 눈빛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박성희를 돌아보면서 성용승은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박성희는 유독 키가 작은 편이었다. 알 수 없는 언어와 욕지거리의 홍수, 유리창이 깨져 나가는 난장판 속에 번호표도 받지 못한 채 덩그라니 선 작달막한 체구의 여자 동료라니. 나 같아도 눈물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 고생을 치르면서도 그들은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을 꾸려 나갔다. 하지만 독일과 국교가 없는 북한이 북한측 대표를 상주시킬 수는 없는 입장이었고, 해외통일운동 그룹에서 '대표'를 보낼 상황도 아니었으니 결국은 무늬만 공동사무국에 남쪽 대표 셋만 쎄쎄쎄를 하고 있을 판이었다. (지금은 뉴라이트에 있는 최홍재가 장군님에 대한 존경심이 각별하여 특별히 엄선했다는 최정남이라는 서울대생이 합류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생고생과 외로움과 설움보다도 더 큰 아픔에 직면해야 했다. 그것은 북한의 배신이었다. 범청학련은 남과 북, 그리고 해외 세 곳에 의장단을 두고 1년에 한 번 의장단 회의를 열어 사업구도를 결정하는 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93년 1월 북한에서 1월에 의장단 회의를 열자고 연락이 왔고 박성희쪽은 전대협과 협의 후 남한의 학교가 방학 중인 1월은 시기적으로 좋지 않다고 회신했는데 북측은 이를 깨끗이 무시하고 '의장단 결의대회'를 제멋대로 열었고, 노동신문에 '합의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박성희의 말대로 애초에 북한은 "베를린 공동사무국의 조절 기능을 인정하지 않고 북측의 지침을 관철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전대협의 뒤를 이었다는 '애국의 불패대오' 한총련은 그를 여과없이 받아들였고.
진절머리가 난 박성희는 공동(共同)사무국인지 공동(空洞)사무국인지에서 손을 떼 버린다. 독일 유학생과 결혼도 하고 망명자 신분으로 아이를 키우는데 이놈의 애국의 불패대오에서는 자꾸만 '밀사'들을 보내 왔다. 대관절 이 무렵의 한총련을 '지도'하던 이들의 지능지수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지만 뭔 일이 있을 때마다 베를린에는 조국 통일의 열정에 불타 오르는 학생들이 찾아왔다. 자신의 처지를 들려주며 한 사람의 방북을 막으면 이번에는 "변절자 박성희"(하여간 이 사람들은 툭하면 세작, 프락치, 아니면 변절자)를 맹렬히 규탄하며 또 다른 사람들을 보냈고, 그들은 박성희는 안기부에 포섭됐으니 대화도 하지 말라는 한총련측의 신신당부를 듣고 있었다. 박성희는 또 그들을 간절히 설득했다. 멀쩡한 청춘들을 자기 같은 신세로 만들 수 없다는 믿음으로. 결국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은 한총련이 보낸 이들의 손에 의해 문을 닫는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었을 때, 박성희는 꿈에 그리던 귀국에 나선다. 그리고 그 곁에는 최정남, 유세홍, 도종화 등 한총련이 보낸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한총련이나 요즘의 당권파같은 이들의 시각에서 보면 완벽한 변절자이겠지만, 그들만큼 북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안에 없었다. 박성희의 글이다.
"북의 체제는 모든 진리와 자주성을 수령이 독점하는 체제다. 거기에서는 인민의 자주성과 창발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혁명적 군인정신’과 ‘유격대식 기풍’이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되는 북한에서 사회의 민주주의는 질식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 통일에 있어서의 핵심은 사회적 정체성의 확보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의 핵심은 바로 민주주의다. 남쪽에서 발전되어온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북에서 민주화를 진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통일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제반 문제를 완충시키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 "
그리고 두 번째 통일의 꽃 박성희 일행이 돌아온 며칠 뒤 한총련은 또 북한에 사람을 보냈다.
91년 8월 북한에 들어갈 당시 박성희는 경희대 작곡과 4학년이었다. 졸업반이었다. 꿈많은 음악도로서 졸업 후에 펼쳐질 삶에 대한 고민도 계획도 많았을 것이지만 조국의 부름(?)에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원래 이들은 판문점에서 열기로 한 남북학생통일대축전 실무회담을 정부가 불허할 경우에 대비해 그해 6월 독일로 나왔다. 정북가 남북학생통일대축전을 허가할 리 만무했고, 전대협 지도부는 그들에게 전대협의 대표로서 베를린에서 북한 대표와 실무회담을 하라고 지시했고, 뒤이어 통일대축전 남측 대표로 북한에 갈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북한으로 갔다.
원래는 첫 번째 '통일의 꽃' 임수경처럼 판문점을 통해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전대협은 막막한 명령을 전해 온다.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범청학련 공동 연락 본부를 설치하라는 것. 조직의 명령에 따라 꿈 많은 졸업반 학생 두 명은 통일운동을 위한 망명가로 그 신분이 바뀐다. (라고 쓰고 국제미아가 됐다.라고 읽는다) 전대협에서 이들의 활동을 위해 얼마나 지원해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처지는 참혹할 지경이었다. 집도 절도 없이 가진 돈은 5백 달러. 그들은 그 상황에서 '범청학련'을 결성했다, 그 즈음을 박성희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제 마음 놓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들어가면 구속되겠지 몇 년 뒤에 석방되겠지. 제일 먼저 학교로 달려갈 것이다. 아마 군대 갔다 온 친구들은 그때 학교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들어와도 좋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차라리 거기 있으라고 했고 전대협은 '박대표가 공동사무국장을 맡는다'는 공문까지 보내 왔다. 범청학련이 결성되던 날 나는 가장 기뻤고 가장 슬펐다."
범청학련 사무국장님은 통일운동을 진행하는 한편으로 체류 연장 허가를 따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동구권에서 몰려든 수많은 난민들 틈에 끼어 번호표를 받기 위해 악다구니를 치던 박성희와 성용승. 그런데 번호표가 성용승에서 끊겼다. 망연한 눈빛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박성희를 돌아보면서 성용승은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박성희는 유독 키가 작은 편이었다. 알 수 없는 언어와 욕지거리의 홍수, 유리창이 깨져 나가는 난장판 속에 번호표도 받지 못한 채 덩그라니 선 작달막한 체구의 여자 동료라니. 나 같아도 눈물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 고생을 치르면서도 그들은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을 꾸려 나갔다. 하지만 독일과 국교가 없는 북한이 북한측 대표를 상주시킬 수는 없는 입장이었고, 해외통일운동 그룹에서 '대표'를 보낼 상황도 아니었으니 결국은 무늬만 공동사무국에 남쪽 대표 셋만 쎄쎄쎄를 하고 있을 판이었다. (지금은 뉴라이트에 있는 최홍재가 장군님에 대한 존경심이 각별하여 특별히 엄선했다는 최정남이라는 서울대생이 합류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생고생과 외로움과 설움보다도 더 큰 아픔에 직면해야 했다. 그것은 북한의 배신이었다. 범청학련은 남과 북, 그리고 해외 세 곳에 의장단을 두고 1년에 한 번 의장단 회의를 열어 사업구도를 결정하는 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93년 1월 북한에서 1월에 의장단 회의를 열자고 연락이 왔고 박성희쪽은 전대협과 협의 후 남한의 학교가 방학 중인 1월은 시기적으로 좋지 않다고 회신했는데 북측은 이를 깨끗이 무시하고 '의장단 결의대회'를 제멋대로 열었고, 노동신문에 '합의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박성희의 말대로 애초에 북한은 "베를린 공동사무국의 조절 기능을 인정하지 않고 북측의 지침을 관철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전대협의 뒤를 이었다는 '애국의 불패대오' 한총련은 그를 여과없이 받아들였고.
진절머리가 난 박성희는 공동(共同)사무국인지 공동(空洞)사무국인지에서 손을 떼 버린다. 독일 유학생과 결혼도 하고 망명자 신분으로 아이를 키우는데 이놈의 애국의 불패대오에서는 자꾸만 '밀사'들을 보내 왔다. 대관절 이 무렵의 한총련을 '지도'하던 이들의 지능지수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지만 뭔 일이 있을 때마다 베를린에는 조국 통일의 열정에 불타 오르는 학생들이 찾아왔다. 자신의 처지를 들려주며 한 사람의 방북을 막으면 이번에는 "변절자 박성희"(하여간 이 사람들은 툭하면 세작, 프락치, 아니면 변절자)를 맹렬히 규탄하며 또 다른 사람들을 보냈고, 그들은 박성희는 안기부에 포섭됐으니 대화도 하지 말라는 한총련측의 신신당부를 듣고 있었다. 박성희는 또 그들을 간절히 설득했다. 멀쩡한 청춘들을 자기 같은 신세로 만들 수 없다는 믿음으로. 결국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은 한총련이 보낸 이들의 손에 의해 문을 닫는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었을 때, 박성희는 꿈에 그리던 귀국에 나선다. 그리고 그 곁에는 최정남, 유세홍, 도종화 등 한총련이 보낸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한총련이나 요즘의 당권파같은 이들의 시각에서 보면 완벽한 변절자이겠지만, 그들만큼 북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안에 없었다. 박성희의 글이다.
"북의 체제는 모든 진리와 자주성을 수령이 독점하는 체제다. 거기에서는 인민의 자주성과 창발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혁명적 군인정신’과 ‘유격대식 기풍’이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되는 북한에서 사회의 민주주의는 질식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 통일에 있어서의 핵심은 사회적 정체성의 확보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의 핵심은 바로 민주주의다. 남쪽에서 발전되어온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북에서 민주화를 진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통일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제반 문제를 완충시키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 "
그리고 두 번째 통일의 꽃 박성희 일행이 돌아온 며칠 뒤 한총련은 또 북한에 사람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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