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4년 8월 2일 통킹만과 맥나마라
1964년 8월 2일 미 해군 구축함 매덕스 호는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의 공격을 받는다. 가벼운 기관총 사격 정도로 미군의 사상자는 없었고 피해도 경미했지만 응징은 꽤 야무져서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파손되고 수 명의 사망자도 발생했다. 이것이 1차 통킹만 사건이다. 미국은 자국 군함에 대한 공격은 자국에 대한 공격이라고 쌍심지를 켰고 북베트남은 영해를 침범한 데 대한...
1964년 8월 2일 통킹만과 맥나마라
1964년 8월 2일 미 해군 구축함 매덕스 호는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의 공격을 받는다. 가벼운 기관총 사격 정도로 미군의 사상자는 없었고 피해도 경미했지만 응징은 꽤 야무져서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파손되고 수 명의 사망자도 발생했다. 이것이 1차 통킹만 사건이다. 미국은 자국 군함에 대한 공격은 자국에 대한 공격이라고 쌍심지를 켰고 북베트남은 영해를 침범한 데 대한...
자위적 행위라고 반박했다. 영해에 대한 규정 (북베트남 12해리, 미국 3해리)이 서로 달랐으니 그 바다가 뉘 바다냐는 논쟁은 애당초 의미가 없었다. 이게 1차 통킹만 사건이다. 요즘 흔히 오해받는 것처럼 통킹만 사건 자체가 조작된 것은 아니었다. 충돌이 있긴 했다. 그나마 미국이 먼저 공격했다는 설도 있긴 하지만. 그런데 이틀 뒤 또 엉뚱한 사건이 터진다.
8월 4일 미국 정부가 역시 매덕스 호와 다른 군함 터너조이 호가 또 공격을 받았다며 거품을 문 것이다. 그런데 사건 설명이 좀 이상했다. “실제적인 공격은 없었지만, 공격을 위한 수중음파탐지기와 무선 신호를 발견”하여 이에 대한 대응 공격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당시 해역에 북베트남 해군이 없었다는 보고가 뒤따랐지만 이는 깔끔하게 무시됐다. 사건 발생 16시간 뒤에야 “어뢰 비슷한 소리는 듣긴 했는데 어뢰는 발견 못했다,”는 보고가 전달됐으나 이미 존슨 대통령은 2001년의 9.11 당시의 CNN 처럼 “U.S under attack!"을 선언하고 있었다. ”이 구욱들이 두 번씩이나 미국을 공격하다니!“ 깐깐한 미국 의회도 뭘 잘못 먹었는지 만장일치로 대통령에게 "공격을 격퇴하고 더 이상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할 수 있는 권리를 헌납했다. 이로써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을 향해 멋진 포즈로 다이빙해 들어간다.
이 통킹만 사건 당시, 그리고 그 이전부터, 또 그 이후로도 오랫 동안 미국 군대와 전쟁의 사령탑은 로버트 맥나마라라는 양반이었다. 이 사람은 군인이 아니었다. 계량화된 수치를 신봉하는 통계학자였고 포드 자동차의 사장이었으며 국방장관보다는 재무부 장관을 내심 기대하던 책상물림이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비대해진 국방부를 통제할 인물로 그를 꼽았고 국방장관으로 입각시키게 된다.
2차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육군 항공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전 종전 후 육군 항공대가 기존의 B17 폭격기를 태평양으로 이동, 사용하고자 했을 때 그보다 신형 B29를 대량생산하여 전선에 투입하는 것이 효율적임을 수치를 통해 증명했다.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든 대공습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맥나마라의 계산에 의거하여 선택된 B29 편대에 의해 이뤄졌다. 이런 예에서 보듯, 맥나마라는 숫자로 모든 것을 파악하고, 또 그를 논리적 근거로 삼는 데에 특출한 사람이었다.
하다못해 조그마한 회사에서 회의를 해도 숫자를 들이미는 쪽이 이기거늘, 방대한 정보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명확한 숫자로 들이미는 맥나마라는 승승장구했다. 이 맥나마라의 계량화된 수치와 빈틈없는 계산은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반면에 어떠한 폐해를 불러왔고 그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가뜨렸는지는 블로거 최동석님의 포스팅인 http://mindprogram.co.kr/185 를 읽으시면 되겠다.
어쨌든 미국은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줄줄이 무너질 수 있다는 '도미노 이론‘에 따라 동남아에서 번져가는 공산주의를 근절하고자 했고 그 최전방은 분단된 베트남이었다. 그는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북베트남 폭격을 시작한다. 이후 그는 전쟁 내내 매일 폭격 출격 횟수, 퍼부은 폭탄의 양, 사살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수를 보고하라고 할 정도로 극성맞은 국방장관이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과 힘 앞에 북베트남은 곧 두 손을 들어야 했고, 미군들은 큰 상처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 발발 3년만에 그는 무려 50만 명이 넘는 미군을 베트남에 하염없이 쓸어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1996년 회고록에서 그는 통킹만 사건이 미국의 의도에 의해 조작된 사건임을 토로하면서, 자신의 실패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이것을 든다. “당시 우리들은 상대방에 대한 그릇된 판단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내셔널리즘의 힘을 과소평가하였다.”는 것이다. 수치로 계산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것, 인간의 열정과 의지와 정신력의 크기를 간과했다는 자기고백이었다. 사실 미군과 베트콩, 또는 북베트남군의 희생자 비율은 1대 150이 훨씬 넘었고 무슨 수치로든 미국은 질 수가 없는 전쟁을 했지만 졌고 베트남은 끝내 이겼다. 상처 뿐인 영광이었다 하더라도.
그런데 통킹만과 맥나마라의 사연들을 주욱 훑어보면서 홀연 나는 문득 요즘 우리에게, 특히 진보라 자처하고 그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절실한 건 ‘정신력’이 아니라 맥나마라의 능력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워낙 ‘정신승리’를 논하는 이들이 진보의 종가인양 행세하고 앉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승리의 신심과 불굴의 투지보다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객관화된 수치를 산출할 능력이 시급한 게 아닌가 하는 초조감이 드는 것이다. 맥나마라는 그의 회고록에서 “틀렸다. 끔찍하게 틀렸다.”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하지만 끔찍하게 틀릴 수 있는 건 그만이 아닐 것이다.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 없이 “그분이 해 주실 거야.”로 가거나 “우리는 기필코 승리하리라”는 대단한 각오로 뭉친 사람들 또한 “끔찍하게 틀릴”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통킹만 사건을 “미국의 조작”이나 “미국의 만행”으로 치부하고 미국을 욕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 그런데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오만과 맹신이 스스로를 그르치기 시작한 시발점이었다는 것 또한 잊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통킹만은 언제 누구에게든 되풀이될 수 있다.
See More8월 4일 미국 정부가 역시 매덕스 호와 다른 군함 터너조이 호가 또 공격을 받았다며 거품을 문 것이다. 그런데 사건 설명이 좀 이상했다. “실제적인 공격은 없었지만, 공격을 위한 수중음파탐지기와 무선 신호를 발견”하여 이에 대한 대응 공격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당시 해역에 북베트남 해군이 없었다는 보고가 뒤따랐지만 이는 깔끔하게 무시됐다. 사건 발생 16시간 뒤에야 “어뢰 비슷한 소리는 듣긴 했는데 어뢰는 발견 못했다,”는 보고가 전달됐으나 이미 존슨 대통령은 2001년의 9.11 당시의 CNN 처럼 “U.S under attack!"을 선언하고 있었다. ”이 구욱들이 두 번씩이나 미국을 공격하다니!“ 깐깐한 미국 의회도 뭘 잘못 먹었는지 만장일치로 대통령에게 "공격을 격퇴하고 더 이상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할 수 있는 권리를 헌납했다. 이로써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을 향해 멋진 포즈로 다이빙해 들어간다.
이 통킹만 사건 당시, 그리고 그 이전부터, 또 그 이후로도 오랫 동안 미국 군대와 전쟁의 사령탑은 로버트 맥나마라라는 양반이었다. 이 사람은 군인이 아니었다. 계량화된 수치를 신봉하는 통계학자였고 포드 자동차의 사장이었으며 국방장관보다는 재무부 장관을 내심 기대하던 책상물림이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비대해진 국방부를 통제할 인물로 그를 꼽았고 국방장관으로 입각시키게 된다.
2차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육군 항공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전 종전 후 육군 항공대가 기존의 B17 폭격기를 태평양으로 이동, 사용하고자 했을 때 그보다 신형 B29를 대량생산하여 전선에 투입하는 것이 효율적임을 수치를 통해 증명했다.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든 대공습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맥나마라의 계산에 의거하여 선택된 B29 편대에 의해 이뤄졌다. 이런 예에서 보듯, 맥나마라는 숫자로 모든 것을 파악하고, 또 그를 논리적 근거로 삼는 데에 특출한 사람이었다.
하다못해 조그마한 회사에서 회의를 해도 숫자를 들이미는 쪽이 이기거늘, 방대한 정보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명확한 숫자로 들이미는 맥나마라는 승승장구했다. 이 맥나마라의 계량화된 수치와 빈틈없는 계산은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반면에 어떠한 폐해를 불러왔고 그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가뜨렸는지는 블로거 최동석님의 포스팅인 http://mindprogram.co.kr/185 를 읽으시면 되겠다.
어쨌든 미국은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줄줄이 무너질 수 있다는 '도미노 이론‘에 따라 동남아에서 번져가는 공산주의를 근절하고자 했고 그 최전방은 분단된 베트남이었다. 그는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북베트남 폭격을 시작한다. 이후 그는 전쟁 내내 매일 폭격 출격 횟수, 퍼부은 폭탄의 양, 사살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수를 보고하라고 할 정도로 극성맞은 국방장관이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과 힘 앞에 북베트남은 곧 두 손을 들어야 했고, 미군들은 큰 상처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 발발 3년만에 그는 무려 50만 명이 넘는 미군을 베트남에 하염없이 쓸어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1996년 회고록에서 그는 통킹만 사건이 미국의 의도에 의해 조작된 사건임을 토로하면서, 자신의 실패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이것을 든다. “당시 우리들은 상대방에 대한 그릇된 판단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내셔널리즘의 힘을 과소평가하였다.”는 것이다. 수치로 계산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것, 인간의 열정과 의지와 정신력의 크기를 간과했다는 자기고백이었다. 사실 미군과 베트콩, 또는 북베트남군의 희생자 비율은 1대 150이 훨씬 넘었고 무슨 수치로든 미국은 질 수가 없는 전쟁을 했지만 졌고 베트남은 끝내 이겼다. 상처 뿐인 영광이었다 하더라도.
그런데 통킹만과 맥나마라의 사연들을 주욱 훑어보면서 홀연 나는 문득 요즘 우리에게, 특히 진보라 자처하고 그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절실한 건 ‘정신력’이 아니라 맥나마라의 능력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워낙 ‘정신승리’를 논하는 이들이 진보의 종가인양 행세하고 앉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승리의 신심과 불굴의 투지보다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객관화된 수치를 산출할 능력이 시급한 게 아닌가 하는 초조감이 드는 것이다. 맥나마라는 그의 회고록에서 “틀렸다. 끔찍하게 틀렸다.”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하지만 끔찍하게 틀릴 수 있는 건 그만이 아닐 것이다.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 없이 “그분이 해 주실 거야.”로 가거나 “우리는 기필코 승리하리라”는 대단한 각오로 뭉친 사람들 또한 “끔찍하게 틀릴”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통킹만 사건을 “미국의 조작”이나 “미국의 만행”으로 치부하고 미국을 욕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 그런데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오만과 맹신이 스스로를 그르치기 시작한 시발점이었다는 것 또한 잊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통킹만은 언제 누구에게든 되풀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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