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76년 7월 28일 당산 대지진
고 리영희 선생이 쓰신 <우상과 이성> 중 ‘두 개의 사건’이라는 글이 있다. 이는 1976년 7월 28일 새벽 중국 하북성의 공업도시 당산시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던 대지진과 한 해 뒤의 7월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대정전 사태 이후 두 나라 국민들이 보여 준 태도의 대비를 주요 골자로 한 글이다. 리영희 선생이 인용한 중국 주재 일본 대사의 글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1976년 7월 28일 당산 대지진
고 리영희 선생이 쓰신 <우상과 이성> 중 ‘두 개의 사건’이라는 글이 있다. 이는 1976년 7월 28일 새벽 중국 하북성의 공업도시 당산시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던 대지진과 한 해 뒤의 7월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대정전 사태 이후 두 나라 국민들이 보여 준 태도의 대비를 주요 골자로 한 글이다. 리영희 선생이 인용한 중국 주재 일본 대사의 글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 “일본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관동대지진의 몇 배의 피해를 입은 당산 시민들은 정부가 지급한 천막 속에서, 혈육을 잃고 모든 재화를 상실한 채 계속 흔들리는 땅 위에서 닥쳐올 재난에 직면해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서나 질서정연하게 행동하고 있었으며, 난동이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남을 해치려는 거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가족의 안위를 뒤로 하고 모두 뛰어나가 힘을 합쳐 그 대책 작업에 몰두했다.”
리영희 선생은 세계 유수의 강대국이자 부자 나라 뉴욕에서 대정전이 일어났을 때 “천만 시민이 예외없이 오직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천만 가지의 행동을 했음”을 지적하면서, 체포자만 2만 명이 넘었고 약탈당한 상점이 수만 곳을 상회한 그 악몽의 밤을 당산과 결부시켜 이야기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추정하고 계셨다. “소유의 양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필요한 재화를 적은대로 고루 소유하고 있다는 현실 조건은 도덕,심리적으로 사회적 인간애의 조건이 된다는 논리적 귀납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외람되게도 나는 리영희 교수님의 글에 찬성하지 않는다. 당산 대지진 현장에서 일본 대사가 보았던 것이 진실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리영희 교수님의 ‘필요한 재화가 적은 대로 고루 소유하고 있는’ 사회의 긍정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당산 대지진을 다루는 중국 정부의 태도는 전혀 도덕적이지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인간적이지도 못했기 때문이며, 그 일면에 어떤 추악한 진실들이 가려졌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당산대지진은 글자 그대로 참혹한 20세기 최악의 참사 중 하나였다. 일본 관동대지진이 점심 시간에 발생하여 밥 짓던 불이 온 시내를 화염에 휩싸이게 했다면, 당산 대지진은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에 엄습했다. 지진이 지속된 시간은 10초에 불과했지만 50㎢ 면적에 걸쳐 수십 만채의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면서 수많은 주민들이 생매장됐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지 않아 또 여진이 덮쳤는데 이는 광산을 통째로 붕괴시켜 1만 명이 넘는 광부들의 집단 무덤을 만들고 말았다.
당산 시민들이 질서를 지키고 서로의 안위를 돌보며 지진을 이겨내는 와중에 정부가 한 일 중의 하나는 철저한 보도 통제였다. 하북성 혁명위원회는 당시 지진으로 인해 65만5천명이 숨지고 77만9천명이 부상했다고 밝혔지만 이후 중국 정부는 사망자수를 24만2천419명으로 수정했다. 그나마 이런 수치가 공개된 것은 3년이나 지난 후였다. 하북성의 통계가 왜 틀렸으며 정부의 수치가 정확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24만 운운의 수치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어느 기자의 끈질긴 집념 때문이었다. 신화통신 탕산 대지진 현장취재 기자였던 쉬쉐장(徐學江)이 그였다.
그는 1979년 11월 다롄에서 열린 중국지진학회 창립대회를 취재하러 갔다가 회의 마지막 날 ‘정확한’ 사망자 수를 알게 됐다. 그는 창립대회 비서장을 맡은 국가지진국 과학연구처 처장에게 기사화에 대한 허가를 끈질기게 요청한 끝에 허가를 받고 기사를 송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희생자 수를 국가 기밀로 취급했고 “자력재건”을 이유로 외부로부터의 도움도 거부했다. “서로 서로 돕고 서로의 안위를 챙긴” 일반 인민들과는 별도로, 사람의 목숨보다는 당과 사회주의 조국의 명예에 더 관심을 두었던 중국 공산당과 희생자 수치조차 비밀로 했던 관료주의는 오히려 “천만 시민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천만 가지 행동을 했던” 미국 뉴욕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했고 실제로 빼앗아 가지 않았던가.
북한이나 쿠바나 기타 나라들의 국민들의 탁월한 도덕성과 헌신성, 탐욕의 부재 등을 예찬하는 기사나 기록을 볼 때 나는 기실 당산 대지진이 떠오른다. 엑스레이 기계가 낡아서 방사선이 새 나오는 상황에서 의사가 목숨을 걸고 방사선에 노출되어 가며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는 감동적인 기사를 보면서, 그런 의사를 길러낸 그 사회의 도덕성(?)보다는 엑스레이 기계 하나 구비하지 못해 의사와 환자들의 생명을 동시에 위협하면서 그 의사의 헌신을 선전하는 시스템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히게 되는 바로 그 이치로, 나는 당산대지진에서 일어났던 중국 인민들의 미덕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들의 희생을 국가 기밀로 숨긴 추악한 이들에 대한 경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세계 유수의 강대국이자 부자 나라 뉴욕에서 대정전이 일어났을 때 “천만 시민이 예외없이 오직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천만 가지의 행동을 했음”을 지적하면서, 체포자만 2만 명이 넘었고 약탈당한 상점이 수만 곳을 상회한 그 악몽의 밤을 당산과 결부시켜 이야기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추정하고 계셨다. “소유의 양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필요한 재화를 적은대로 고루 소유하고 있다는 현실 조건은 도덕,심리적으로 사회적 인간애의 조건이 된다는 논리적 귀납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외람되게도 나는 리영희 교수님의 글에 찬성하지 않는다. 당산 대지진 현장에서 일본 대사가 보았던 것이 진실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리영희 교수님의 ‘필요한 재화가 적은 대로 고루 소유하고 있는’ 사회의 긍정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당산 대지진을 다루는 중국 정부의 태도는 전혀 도덕적이지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인간적이지도 못했기 때문이며, 그 일면에 어떤 추악한 진실들이 가려졌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당산대지진은 글자 그대로 참혹한 20세기 최악의 참사 중 하나였다. 일본 관동대지진이 점심 시간에 발생하여 밥 짓던 불이 온 시내를 화염에 휩싸이게 했다면, 당산 대지진은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에 엄습했다. 지진이 지속된 시간은 10초에 불과했지만 50㎢ 면적에 걸쳐 수십 만채의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면서 수많은 주민들이 생매장됐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지 않아 또 여진이 덮쳤는데 이는 광산을 통째로 붕괴시켜 1만 명이 넘는 광부들의 집단 무덤을 만들고 말았다.
당산 시민들이 질서를 지키고 서로의 안위를 돌보며 지진을 이겨내는 와중에 정부가 한 일 중의 하나는 철저한 보도 통제였다. 하북성 혁명위원회는 당시 지진으로 인해 65만5천명이 숨지고 77만9천명이 부상했다고 밝혔지만 이후 중국 정부는 사망자수를 24만2천419명으로 수정했다. 그나마 이런 수치가 공개된 것은 3년이나 지난 후였다. 하북성의 통계가 왜 틀렸으며 정부의 수치가 정확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24만 운운의 수치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어느 기자의 끈질긴 집념 때문이었다. 신화통신 탕산 대지진 현장취재 기자였던 쉬쉐장(徐學江)이 그였다.
그는 1979년 11월 다롄에서 열린 중국지진학회 창립대회를 취재하러 갔다가 회의 마지막 날 ‘정확한’ 사망자 수를 알게 됐다. 그는 창립대회 비서장을 맡은 국가지진국 과학연구처 처장에게 기사화에 대한 허가를 끈질기게 요청한 끝에 허가를 받고 기사를 송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희생자 수를 국가 기밀로 취급했고 “자력재건”을 이유로 외부로부터의 도움도 거부했다. “서로 서로 돕고 서로의 안위를 챙긴” 일반 인민들과는 별도로, 사람의 목숨보다는 당과 사회주의 조국의 명예에 더 관심을 두었던 중국 공산당과 희생자 수치조차 비밀로 했던 관료주의는 오히려 “천만 시민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천만 가지 행동을 했던” 미국 뉴욕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했고 실제로 빼앗아 가지 않았던가.
북한이나 쿠바나 기타 나라들의 국민들의 탁월한 도덕성과 헌신성, 탐욕의 부재 등을 예찬하는 기사나 기록을 볼 때 나는 기실 당산 대지진이 떠오른다. 엑스레이 기계가 낡아서 방사선이 새 나오는 상황에서 의사가 목숨을 걸고 방사선에 노출되어 가며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는 감동적인 기사를 보면서, 그런 의사를 길러낸 그 사회의 도덕성(?)보다는 엑스레이 기계 하나 구비하지 못해 의사와 환자들의 생명을 동시에 위협하면서 그 의사의 헌신을 선전하는 시스템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히게 되는 바로 그 이치로, 나는 당산대지진에서 일어났던 중국 인민들의 미덕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들의 희생을 국가 기밀로 숨긴 추악한 이들에 대한 경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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