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76년 7월 27일 다나까 가꾸에이와 동경지검특수부
일본의 역사에서는 귀족이나 사무라이 등 웬만큼 번듯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 말짱 평민이나 그 이하 계급으로서 최고 권력자에 오른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근대화 이후로도 정치인은 그렇고 그런 집안끼리 나눠먹고 물려먹는 직업 중의 하나였고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서는 그 범주에 끼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평민 가운데 최고 권력자에 등극한 대표적인 사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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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7월 27일 다나까 가꾸에이와 동경지검특수부
일본의 역사에서는 귀족이나 사무라이 등 웬만큼 번듯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 말짱 평민이나 그 이하 계급으로서 최고 권력자에 오른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근대화 이후로도 정치인은 그렇고 그런 집안끼리 나눠먹고 물려먹는 직업 중의 하나였고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서는 그 범주에 끼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평민 가운데 최고 권력자에 등극한 대표적인 사례 ...
가운데 두 명이 풍신수길, 즉 도요도미 히데요시와 다나까 가꾸에이 수상이라고 들었다. 다나까 가꾸에이는 그 성부터 평민스럽다. 다나까는 메이지 유신 이후 평민도 성을 갖게 되면서 닥치는 대로 붙여진 '밭 가운데'(田中)의 흔한 성 아닌가.
고등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으로 혈혈단신 상경해 실업계 및 정치계에서 성공을 거둔 다나까는 곧잘 역시 서민 출신으로서 일본을 호령하는 태합까지 올랐던 도요도미 히데요시에 곧잘 비교됐다고 한다. “현재의 태합”이나 “서민 재상”으로 불리우며 취임 직후에는 지지율이 70% 전후를 당시에는 지지율이 70% 전후를 기록했다고 한다. 2000년 아사히 신문에서 조사한 1000년 이후 일본 역사상 정치적 리더 선호도 조사에서도 당당 4위를 기록한 바 있으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일도 열정적으로 했고, 업적도 적잖이 남겼지만 일본 내 금권 정치의 막전막후 실력자로서 해악도 꽤 끼친 양면을 가진 그에게는 재미 있는 별명이 있었다. '컴퓨터를 단 불도저'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바로 우리 가카께오서 스스로를 평가하시며 썼던 그 표현이다. 황공하옵게도 '컴도저'라는 말의 지적소유권은 가카에게 있지 않다.
이 인기 높은 서민 재상, 현재의 태합 전하 다나까 가꾸에이, 수상을 물러난 뒤에도 막강한 파벌의 거두로서 일본을 주무르던 그가 1976년 7월 27일 거꾸러진다. 그의 목을 통타하여 말 아래로 떨어뜨린 상대방 기사는 동경지검특수부라는 이름의 검찰 조직이었다. 애초에 시작은 미국의 록히드사였다. 록히드사는 자사의 항공기를 팔기 위하여 일본과 유럽 각국 등 미국의 우방의 정치인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는데 이것이 점차 마각을 드러내는 바람에 여러 나라의 정계가 쑥대밭이 됐던 것이다. 가장 큰 쑥대밭은 일본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이 쑥대밭은 가꾼 주체(?)가 바로 동경지검특수부였던 것이다.
"만약 이 수사에 실패한다면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 때까지 적어도 10년은 걸릴 것이다." 수사에 착수했던 동경지검 특수부의 한 검사의 각오다. (책 "동경지검특수부" 중에서 - 일본 검사들의 말은 거기에서 따온다) 드라마 <추격자>에서 "검사는 검사받으며 일한다고 해서 검사"라는 명대사가 나오지만 적어도 동경지검 특수부는 그 누구에게도 숙제검사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현 수상이 "수사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느냐?"고 애타게 물었을 때에도 마흔 셋의 검사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답한다. "총리대신 각하. 안되겠습니다."
이런 깡다구는 평검사들의 용기도 용기려니와 상층부의 완강한 방어막으로부터 기인한 바 컸다. 검찰총장 후세 다께시는 이렇게 외친다. "모든 책임은 내가진다. 당신들 (수사 검사들)은 사표 쓸 걱정 같은 건 하지도 마라." 기자들에게 촌지 이벤트나 벌이고 위에서 하명한 수사를 검사들의 밥그릇에 덜렁덜렁 놓아 주는 것이 주임무인 어느 나라 검찰총장과는 그 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검사들도 단순한 정의감을 넘어서서 일종의 위기감 섞인 사명감으로 자신들의 목을 좌우할 수도 있는 거악의 스캔들에 맞섰다. " 특정한 피해자가 없는 독직사전을 적발되지 않더라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지만 그것이 만연하면 국가자체가 붕괴한다." - 가와이 노부따로 특수부장.
수사팀은 다나까가 용의자라는 사실을 체포 작전 전날 오후까지도 법무대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장관은 다나까 파벌에 속한 정치인이었지만 특수부의 서슬에 몰려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다나까는 수갑을 찬다. 공판 과정에서 있었던 유명한 일화. 뇌물을 준 업자를 대라는 공판 검사 홋타의 추궁에 "기억이 안난다." 신공으로 (이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맞서자 홋타는 이렇게 말하며 다나카의 뒤통수를 친다. "아까 하신 당신에게 유리하게 진실하신 것도 확실한 기억이 아니로군요." 순간 다나카는 만년필을 떨어뜨렸고, 그 소리는 폭음과 같았다고 한 평론가는 기록했다.
1976년 7월 27일 "정치는 돈과 머릿수로 하는 거야."(이런 당권파같은 놈!) 라며 일본 천지를 호령하던 전 수상 다나까 가꾸에이는 새파란 검사들이 내민 영장 앞에서 고개를 떨궈야 했다. 왜 한국에는 그런 검사가 없을까 탄식이 귀에 들린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아무렴 검찰청에 그런 사람이 없을까. 다음과 같이 격정을 토로한 검사도 있었다.
“(나는) 억울한 피해자와 함께 울어주고 성역없이 부정부패를 과감히 척결하는 검찰을 사랑한다. 그래서 정의롭지도 못하고 눈치를 슬슬 보면서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는 강한 검찰을 미워한다.” 가히 동경지검특수부 찜쪄먹을 기세다. 그는 또 고위공무원 구속 때 법무부장관의 승인 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할 정도로 강골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 은진수라고 한다. 가카의 남자로서 물방울 다이아몬드 등을 저축은행으로부터 받아처먹고 감옥에 갔다가 소리소문없이 가석방된 BBK 대책팀장 은진수. 그도 왕년엔 그랬다.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망치는 시스템이 문제고, 그 시스템을 '어쩔!' 하며 지켜보아온 우리가 문제다.
동경지검특수부도 좌절을 맛본 때가 있었다. 1954년 여당의 간사장을 체포하려 하자 법무대신이 지휘권을 행사하여 이를 가로막았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일본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 법무대신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그 뒤 법무대신의 검찰 개입은 금기시되었고 동경지검특수부는 1976년 7월 27일 다나까 가꾸에이, '현재의 태합'을 그 집에서 끌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 국민들이 할 몫이다.
고등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으로 혈혈단신 상경해 실업계 및 정치계에서 성공을 거둔 다나까는 곧잘 역시 서민 출신으로서 일본을 호령하는 태합까지 올랐던 도요도미 히데요시에 곧잘 비교됐다고 한다. “현재의 태합”이나 “서민 재상”으로 불리우며 취임 직후에는 지지율이 70% 전후를 당시에는 지지율이 70% 전후를 기록했다고 한다. 2000년 아사히 신문에서 조사한 1000년 이후 일본 역사상 정치적 리더 선호도 조사에서도 당당 4위를 기록한 바 있으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일도 열정적으로 했고, 업적도 적잖이 남겼지만 일본 내 금권 정치의 막전막후 실력자로서 해악도 꽤 끼친 양면을 가진 그에게는 재미 있는 별명이 있었다. '컴퓨터를 단 불도저'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바로 우리 가카께오서 스스로를 평가하시며 썼던 그 표현이다. 황공하옵게도 '컴도저'라는 말의 지적소유권은 가카에게 있지 않다.
이 인기 높은 서민 재상, 현재의 태합 전하 다나까 가꾸에이, 수상을 물러난 뒤에도 막강한 파벌의 거두로서 일본을 주무르던 그가 1976년 7월 27일 거꾸러진다. 그의 목을 통타하여 말 아래로 떨어뜨린 상대방 기사는 동경지검특수부라는 이름의 검찰 조직이었다. 애초에 시작은 미국의 록히드사였다. 록히드사는 자사의 항공기를 팔기 위하여 일본과 유럽 각국 등 미국의 우방의 정치인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는데 이것이 점차 마각을 드러내는 바람에 여러 나라의 정계가 쑥대밭이 됐던 것이다. 가장 큰 쑥대밭은 일본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이 쑥대밭은 가꾼 주체(?)가 바로 동경지검특수부였던 것이다.
"만약 이 수사에 실패한다면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 때까지 적어도 10년은 걸릴 것이다." 수사에 착수했던 동경지검 특수부의 한 검사의 각오다. (책 "동경지검특수부" 중에서 - 일본 검사들의 말은 거기에서 따온다) 드라마 <추격자>에서 "검사는 검사받으며 일한다고 해서 검사"라는 명대사가 나오지만 적어도 동경지검 특수부는 그 누구에게도 숙제검사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현 수상이 "수사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느냐?"고 애타게 물었을 때에도 마흔 셋의 검사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답한다. "총리대신 각하. 안되겠습니다."
이런 깡다구는 평검사들의 용기도 용기려니와 상층부의 완강한 방어막으로부터 기인한 바 컸다. 검찰총장 후세 다께시는 이렇게 외친다. "모든 책임은 내가진다. 당신들 (수사 검사들)은 사표 쓸 걱정 같은 건 하지도 마라." 기자들에게 촌지 이벤트나 벌이고 위에서 하명한 수사를 검사들의 밥그릇에 덜렁덜렁 놓아 주는 것이 주임무인 어느 나라 검찰총장과는 그 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검사들도 단순한 정의감을 넘어서서 일종의 위기감 섞인 사명감으로 자신들의 목을 좌우할 수도 있는 거악의 스캔들에 맞섰다. " 특정한 피해자가 없는 독직사전을 적발되지 않더라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지만 그것이 만연하면 국가자체가 붕괴한다." - 가와이 노부따로 특수부장.
수사팀은 다나까가 용의자라는 사실을 체포 작전 전날 오후까지도 법무대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장관은 다나까 파벌에 속한 정치인이었지만 특수부의 서슬에 몰려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다나까는 수갑을 찬다. 공판 과정에서 있었던 유명한 일화. 뇌물을 준 업자를 대라는 공판 검사 홋타의 추궁에 "기억이 안난다." 신공으로 (이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맞서자 홋타는 이렇게 말하며 다나카의 뒤통수를 친다. "아까 하신 당신에게 유리하게 진실하신 것도 확실한 기억이 아니로군요." 순간 다나카는 만년필을 떨어뜨렸고, 그 소리는 폭음과 같았다고 한 평론가는 기록했다.
1976년 7월 27일 "정치는 돈과 머릿수로 하는 거야."(이런 당권파같은 놈!) 라며 일본 천지를 호령하던 전 수상 다나까 가꾸에이는 새파란 검사들이 내민 영장 앞에서 고개를 떨궈야 했다. 왜 한국에는 그런 검사가 없을까 탄식이 귀에 들린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아무렴 검찰청에 그런 사람이 없을까. 다음과 같이 격정을 토로한 검사도 있었다.
“(나는) 억울한 피해자와 함께 울어주고 성역없이 부정부패를 과감히 척결하는 검찰을 사랑한다. 그래서 정의롭지도 못하고 눈치를 슬슬 보면서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는 강한 검찰을 미워한다.” 가히 동경지검특수부 찜쪄먹을 기세다. 그는 또 고위공무원 구속 때 법무부장관의 승인 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할 정도로 강골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 은진수라고 한다. 가카의 남자로서 물방울 다이아몬드 등을 저축은행으로부터 받아처먹고 감옥에 갔다가 소리소문없이 가석방된 BBK 대책팀장 은진수. 그도 왕년엔 그랬다.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망치는 시스템이 문제고, 그 시스템을 '어쩔!' 하며 지켜보아온 우리가 문제다.
동경지검특수부도 좌절을 맛본 때가 있었다. 1954년 여당의 간사장을 체포하려 하자 법무대신이 지휘권을 행사하여 이를 가로막았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일본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 법무대신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그 뒤 법무대신의 검찰 개입은 금기시되었고 동경지검특수부는 1976년 7월 27일 다나까 가꾸에이, '현재의 태합'을 그 집에서 끌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 국민들이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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