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도 비슷한 얘길 했지만...
산하의 오역
1905년 7월 29일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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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5년 7월 29일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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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태프트 밀약’이라면 웬만큼 국사 교과서 충실히 들여다 본 이들은 대부분 다 안다. 이는 미국의 육군 장관 태프트가 일본을 방문하여 가쓰라 다로 일본 수상과 밀담을 나눈 끝에 합의한 일종의 외교 각서다. 이 밀약은 1924년 미국의 외교사학자 데넷이 그 전문을 공개할 때까지 비밀 속에 파묻혀 있게 된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내용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어떤 공세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는 점, 둘째 일본측의 일본,영국,미국을 잇는 비공식 동맹 제안에 대해 태프트는 미국이 의회의 승인 없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또 일본측은 “결국 러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대한제국에 있다.”면서 대한제국이 또 (일본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나라들과 조약이나 협정을 맺어 러일전쟁 전과 같은 복잡한 상황을 만들 수 있기에 이를 타개할 확실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쉽게 정리하면, “일본은 필리핀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미국 니들이 지지든 볶든 맘대로 하고, 한국 얘네들은 동양 평화를 깨는 골칫거리이므로 일본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밀약 내용이 미국 수뇌부에 전달됐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 2차대전 당시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아닌 그 아저씨뻘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부통령이던 시절, 이미 친구에게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길 바란다. 그러면 일본은 러시아를 저지하게 될 것이고, 일본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했던 그는 태프트의 밀약을 이런 말로 지지한다. “우리의 입장이 이보다 더 정확히 언급될 수는 없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는 우매하고 게으르고 더러운 나라라는 편견을, 일본에 대해서는 확고한 호의를 품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 때 북경을 포위한 의화단을 분쇄하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일본군의 활약에 감명받은 바 있었으며, 러시아의 대항마로서 미국의 국익을 지켜줄 맹방으로서 일본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는 이런 핀잔을 남긴다.
“우정이란 자신을 지킬 힘을 지닌 상대끼리 가능한 것이다. 한국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이 얄미운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얼마 전 엉뚱한 코미디 영화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박물관은 살아 있다>란 영화에서 등장한 기마상의 주인공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거기서 그 기마상은 인디언 처녀에게 연정을 품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감독의 목을 치겠다고 그 칼을 내뻗고 말을 달렸을 것이다. 그는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에 백인우월주의자였다. 그에게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우매한 황인종들의 나라로서 백인에 가까울 정도로 우수한 일본인들에게 먹히든 말든 상관이 없는 나라였다. 고종 황제는 끝까지 미국의 우정에 기대를 걸고 루스벨트의 조카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거국적인 환영을 벌이며 미국에 호의를 보이지만 외사랑도 그런 외사랑이 없었다.
대한제국 정부도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움직임 중의 하나는 ‘영세 중립국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고종 황제는 강대국들이 그 평화와 독립을 보장하는 영세 중립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을 꿈꾸었고 실제로 다양한 방면으로 모색했다. 하지만 내치의 개혁이 답보 상태에다가 스스로를 지킬 무력이 미미한 나라의 영세 중립을 보장할 강대국은 없었다. 고종 황제가 러일전쟁 직전 이탈리아 국왕에게 보낸 친서는 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근래에 극동의 만주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한다는 소문과 나라 간에 시끄러운 기미가 있으니…(중략) 우리나라는 국외의 문제에 대해서 중립을 보전할 것입니다."
러일전쟁이 터지기 직전, 고종 황제는 한 번 더 중립국 선언을 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거침없이 상륙했고 제멋대로 조선인들을 징발하여 군수품을 실어나르게 했다. 실질적 무력이나 외교적 수완이 없는 선언은 그야말로 여름밤 개구리 소리만큼도 세상을 깨우지 못했다. 루스벨트는 이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고, “자신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하는 나라”로서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위해 일본에게 먹히든 말든 상관 없는 나라로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종 황제가 끝까지 믿으려고 발버둥치고 수 차례 밀서까지 보내며 지원을 호소했던 미국은 1905년 7월 29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을 공깃돌로 삼았다.
평화와 독립은 소망과 선언만으로는 오지 않는다
첫째,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어떤 공세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는 점, 둘째 일본측의 일본,영국,미국을 잇는 비공식 동맹 제안에 대해 태프트는 미국이 의회의 승인 없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또 일본측은 “결국 러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대한제국에 있다.”면서 대한제국이 또 (일본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나라들과 조약이나 협정을 맺어 러일전쟁 전과 같은 복잡한 상황을 만들 수 있기에 이를 타개할 확실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쉽게 정리하면, “일본은 필리핀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미국 니들이 지지든 볶든 맘대로 하고, 한국 얘네들은 동양 평화를 깨는 골칫거리이므로 일본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밀약 내용이 미국 수뇌부에 전달됐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 2차대전 당시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아닌 그 아저씨뻘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부통령이던 시절, 이미 친구에게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길 바란다. 그러면 일본은 러시아를 저지하게 될 것이고, 일본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했던 그는 태프트의 밀약을 이런 말로 지지한다. “우리의 입장이 이보다 더 정확히 언급될 수는 없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는 우매하고 게으르고 더러운 나라라는 편견을, 일본에 대해서는 확고한 호의를 품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 때 북경을 포위한 의화단을 분쇄하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일본군의 활약에 감명받은 바 있었으며, 러시아의 대항마로서 미국의 국익을 지켜줄 맹방으로서 일본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는 이런 핀잔을 남긴다.
“우정이란 자신을 지킬 힘을 지닌 상대끼리 가능한 것이다. 한국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이 얄미운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얼마 전 엉뚱한 코미디 영화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박물관은 살아 있다>란 영화에서 등장한 기마상의 주인공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거기서 그 기마상은 인디언 처녀에게 연정을 품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감독의 목을 치겠다고 그 칼을 내뻗고 말을 달렸을 것이다. 그는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에 백인우월주의자였다. 그에게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우매한 황인종들의 나라로서 백인에 가까울 정도로 우수한 일본인들에게 먹히든 말든 상관이 없는 나라였다. 고종 황제는 끝까지 미국의 우정에 기대를 걸고 루스벨트의 조카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거국적인 환영을 벌이며 미국에 호의를 보이지만 외사랑도 그런 외사랑이 없었다.
대한제국 정부도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움직임 중의 하나는 ‘영세 중립국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고종 황제는 강대국들이 그 평화와 독립을 보장하는 영세 중립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을 꿈꾸었고 실제로 다양한 방면으로 모색했다. 하지만 내치의 개혁이 답보 상태에다가 스스로를 지킬 무력이 미미한 나라의 영세 중립을 보장할 강대국은 없었다. 고종 황제가 러일전쟁 직전 이탈리아 국왕에게 보낸 친서는 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근래에 극동의 만주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한다는 소문과 나라 간에 시끄러운 기미가 있으니…(중략) 우리나라는 국외의 문제에 대해서 중립을 보전할 것입니다."
러일전쟁이 터지기 직전, 고종 황제는 한 번 더 중립국 선언을 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거침없이 상륙했고 제멋대로 조선인들을 징발하여 군수품을 실어나르게 했다. 실질적 무력이나 외교적 수완이 없는 선언은 그야말로 여름밤 개구리 소리만큼도 세상을 깨우지 못했다. 루스벨트는 이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고, “자신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하는 나라”로서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위해 일본에게 먹히든 말든 상관 없는 나라로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종 황제가 끝까지 믿으려고 발버둥치고 수 차례 밀서까지 보내며 지원을 호소했던 미국은 1905년 7월 29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을 공깃돌로 삼았다.
평화와 독립은 소망과 선언만으로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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