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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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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7.20 김사왕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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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내 인생의 명승부에서 슬쩍)

1980년 7월 20일 김사왕의 패배

1980년 7월 20일 성지곡 수원지 풀장에 가서 쿤타 킨테처럼 새까맣게 되어 집에 돌아온 이후 TV 앞에 붙박혔던 날이다. 그날은 김사왕이라는 복서가 WBA 페더급 챔피언 에우제비오 페드로사를 국내로 불러들여 한판 대결을 벌이는 날이었다.

...

그 즈음, 한국 복싱계에는 내로라 할 KO왕들이 많았다. 김태식이 루이스 이바라를 요즘 말로 ‘떡실신’시키고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었고 그 이름에서부터 도끼 같은 포스가 물씬 풍기는 박종팔의 주먹에 동양권 선수 태반이 거품을 문 채 나뒹굴었고, 스트레이트밖에 칠 줄 모르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으나 주먹 하나는 살인적이었던 미남 복서 최충일이 연속 KO 행진을 벌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김사왕은 그 철권들 가운데에서도 발군이었다. 그는 일종의 만화 주인공같은 캐릭터를 갖고 있었다.


그의 본명은 사왕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로복싱에서 왕이 되겠다는 뜻으로 그는 嗣王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고 했다. 자세히 알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치렁치렁한 문신이 그 몸을 휘감고 있었던 걸로 비추어 그의 과거가 해맑았다고는 보기 어렵다. 어찌 되었든 복싱 선수로서 그는 대단한 주먹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굉장한 맷집의 소유자였다. 실컷 두들겨 맞다가도 대수롭지 않게 씩 웃고서는 롱 훅 한 방으로 상대를 실신시키는 괴력의 소유자였고 그 해의 7월 20일까지 단 한 번도 다운된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상대를 몇회에 KO시키겠노라 예고를 하고 그 예고를 적중시키는 신통력(?)까지 선보였으니 이토록 만화같은 실존 인물도 찾기 어려우리라.


7월 20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김사왕이 도전장을 내민 이후 페드로사는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몇 번씩이나 일정을 미루었고 몇 개의 날짜가 허수로 흘러 버렸다. 그 사정은 짐작이 어렵지만 당시 언론은 페드로사가 김사왕의 주먹이 너무나 무서워서 피하는 것으로 분석했고 7월 20일 경기가 최종 결정되었을 때 만화가 김철호씨는 챔피언 김태식이 "사왕아 한 방에 보내 버려~" 라고 김사왕을 부추기는 가운데 "연기 금지! 7월 20일 경기할 것 - WBA"라는 벽보가 붙은 앞에서 페드로사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카툰을 그렸다. 더구나 알폰소 사모라 (홍수환에게 타이틀을 빼앗아 갔던)에게 단 6분을 견디지 못하고 벌벌 기었다는 페드로사의 유리턱까지 소문에 가세하니 완연히 '승리는 우리 것'이었다.

바야흐로 시꺼먼스 말라깽이 페드로사의 가냘픈 주먹을 툭툭 맞아 주다가 한 방에 안드로메다행 은하철도 999를 태워 버리고 로프에 올라서서 "내가 참피온이다"라고 부르짖는 호연지기를 보여 주기만 하면 되는 날이었다. 실제로 김사왕은 자주 그랬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김사왕의 몸짓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자신의 주먹과 깡다구에 대한 믿음, 기필고 사각의 링의 제왕이 되리라 이름까지 바꿔 버린 결의가 그의 몸에 실려 있었다. 문제는 그 자신감이 페드로사의 몸에 미치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당시의 열악한 현장 마이크와 부실한 14인치 TV의 오디오를 통해서도 김사왕의 스윙 소리가 들릴 정도였지만 그 무서운 스윙은 페드로사의 살갗조차 제대로 건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페드로사의 카운터 하나가 작렬했다. 김사왕의 턱이 돌아갈 정도로 강력한 펀치였는데 어 어 하는 웅성거림이 일기가 무섭게 김사왕이 두 팔을 번쩍 치켜들더니 심지어 한 번 쳐 보라는 듯 가드를 내리고 몸을 내미는 게 아닌가. 역시 김사왕!

"문제 없습니다 김사왕 선수~ 네 맷집도 세계 최강 아니겠습니까?"

그때 캐스터의 말이 그랬다. 맷집에도 세계 최강이 있을까? 그때 같이 TV를 보던 동네 아저씨가 그 말을 들으며 "매에는 장사 없는데 ....."라고 불안하게 한 마디 했다가 인민재판 수준의 다구리를 당했다. 재수없는 소리할 거면 나가 술이나 먹으라고 어른이고 애고 악을 썼다. 아직도 '승리는 우리의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출발은 불안한데 믿음은 커져만 갔다. 괜찮아 괜찮아 사왕이 쟤 원래 저래..... 불안해서 그랬을까. 우리는 그 믿음에 기대게 되었고 종국에는 기대가 현실을 왜곡시키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우리 일행 뿐이 아니었다. 이철원씨로 기억되는 캐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김사왕 선수, 저렇게 고전 끝에 역전시켰던 적이 많죠?"
"페드로사 선수 도망다니다 보니 지쳐 보이는데요......"
"김사왕 선수 원래 저럽니다 걱정 마십쇼." (해설자)

권투의 격언에 턱은 맞을수록 약해지고 복부는 맞을수록 강해진다는 말이 있는데 특히 김사왕은 복부가 강하기로 유명했다. 보디 공격을 받으면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를 부르짖기라도 하는 듯 배를 보란듯이 내밀고 들어가는 것도 몇 번 보았다. 이제는 맷집을 자랑할 게 아니라 주먹 자랑을 좀 보고 싶었는데 환장하게도 김사왕의 주먹은 페드로사의 유리턱에 단 한 번도 제대로 안착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김사왕의 불운 탓이 아니었다. 페드로사가 김사왕을 장난감 취급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도달한 것은 5라운드를 넘기면서부터였다. 지쳐 가는 것은 김사왕이었고 매맞으면 맞는대로 움찔움찔거리면서 제대로 아픈 시늉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8라운드. 페드로사의 한 방이 제대로 김사왕의 턱에 꽂혔고 김사왕이 몇 발자욱 물러섰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페드로사가 달려들자 김사왕 역시 지지 않으려는 듯 맞대응을 했는데 그 2초 뒤...... 김사왕은 배를 잡고 매트에 나뒹굴고 말았다. 거미의 독침에 맞아 버둥거리는 매미처럼 신이 내린 펀치와 맷집을 자랑하던 김사왕은 생애 첫 다운을 당하고 열 번 카운트를 누워서 들어야 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김사왕이 벌떡 일어나 파이트를 외친 후 페드로사를 때려눕히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끝이었다. 열이 아니라 스물을 세어도 일어나지 못했던 그의 늘어진 팔에 단호한 글씨로 새겨진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일심 (一心).

김사왕의 가장 큰 적은 승리의 신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맞아도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는 믿음만큼 강한 주먹이 어디 있으며 내 주먹이 제대로만 들어가면 누구를 이기지 못하랴 하는 호기만큼 든든한 빽이 어디 있으랴. 그 일심이 7월 20일 이전까지 김사왕을 만들었지만 결국 7월 20일 이후의 김사왕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김사왕은 그에게 승리의 쾌감을 안겨 주었던 방식을, 훗날 19차 방어까지 성공한 페더급 사상 가장 위대한 챔피언 에우제비오 페드로사에게 한치도 어김없이 적용할할만큼 한결같았고 결국 매우 혁신적인 모습으로 생애 첫 KO패를 당했던 것이다. 그것도 내가 지켜보았던 허다한 복싱 경기 가운데 최악으로 인상 깊은 참담함으로 점철된.......

재기할 능력이 충분한 선수였지만 그는 끝내 그 패배의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링 위에서 그만한 자신감을 보여 준 선수가 또 있었나 싶었던 김사왕은 버림받다시피 사람들의 이목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스포츠면이 아닌 사회면을 장식함으로써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토록 강력했던 그가, 승리를 향한 일심으로 가득했던 그가 , 80년대 식으로 표현하면 혁명적 낙관주의에 불타올랐던 그가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 미수에 그쳤던 것이다. 그가 사실은 심약한 선수라서였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단지 변하기 어려운 존재였을 뿐이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또 한 번 사회면을 장식했다. 사회에서 만나 믿고 의지하며 의형제까지 맺었다는 이의 손에 그만 살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승리의 기쁨은 사람을 단련시키기도 하지만 더욱 더 흔하게는 사람을 좁게 만든다. 승리의 기억은 달콤하지만 패배보다는 배우는 것이 적다. 그래서 승리에 대한 믿음은 그 믿음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을 때 자신의 목을 찌르는 칼이 된다. 얼굴 붓기 하나 없이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페드로사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던 김사왕을 추억하며, 또 7월 20일 이전의 그 가공할만큼 멋졌던 김사왕을 오버랩시키며, 나는 그 경기를 내 인생의 명승부 하나로 기록한다. 멋있어서가 아니라 신나서가 아니라 씁슬한 가르침을 매캐하게 전하는 경기여서다,. .

고 김사왕 선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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