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6년 7월 19일 월드컵 사상 최고의 기적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이 기적을 일구었다고 하지만, 역대 월드컵 사상 최고의 이변을 얘기할 때 아시아의 이 나라 축구팀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그 월드컵에 출전하기 불과 13년 전까지 전쟁을 치렀으며 그 나라를 폭격하던 적국의 비행사들이 “더 이상 폭격할 곳이 없다.”고 그냥 복귀할 만큼 참혹한 전화(戰禍)를 겪었다. “그 나...라는 석기 시대로 돌아갔다.”는 것이 적국의 공군 지휘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런 참상 속에서 그들은 기적적인 전후 복구를 이루고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축구팀도 그에 덩달아 강세를 보였다.
평균 신장 165센티미터 그러니까 나보다도 더 키가 더 작은 선수가 태반인 축구팀이었지만 전원이 100미터를 11초에 끊는다고 할만큼 재빨랐고 군 특수부대와 함께 훈련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체력적으로도 뛰어났다. 그들이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자 그들의 동포이되 철천지원수로 지내던 나라의 축구팀은 지레 겁을 먹고 출전을 포기한다. FIFA가 벌금까지 매겼지만 차라리 벌금을 내면 냈지 저쪽에 깨질 수는 없다고 여길 정도였으니 보탤 설명이 없다. 마침내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만나게 된 팀은 호주였다.
호주팀은 작달막한 체구의 황인종 선수들을 조금은 우습게 보았지만 중립국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2연전에서 그 높은 콧대가 작신작신 부러지고 만다. 이 공포의 아시아 대표는 호주를 6대1 3대 1로 KO시켰던 것이다. 아시아를 대표하여 월드컵에 나가게 된 나라의 이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1966년 영국 월드컵에 나가게 된다.
냉전의 차가움이 가시지 않았던 시기, 북한은 주최국 영국으로부터 많은 수모를 겪는다. 영국은 애초에 북한이 예선에서 나가 떨어지기를 바랐다. 저 적성국 (영국은 6.25 때 미군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보낸 나라) 팀에게 비자를 내 주는 것도 좀 껄쩍지근한데 쟤네들 인공기가 버젓이 휘날리고 국가도 연주해 줘야 하느냐. 하지만 FIFA 규정상 정치적인 이유로 출전팀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고, 몇 가지 조건을 건다. 국기 게양은 허용하되 국가는 결선 개막전과 결승전에만 연주한다는 식으로 피해갔고 정식국명도 DPRK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신 North Korea를 쓰도록 했다. 북한은 이를 다 받아들인다. 적어도 이때의 북한은 21세기에 “태극기는 죽어도 평양에 못 내건다.”고 고집 피우는 벽창호가 아니었다.
북한이 속한 조에는 소련, 칠레가 끼어 있었고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가 버티고 있었다. 공산주의 종주국이라 그랬는지 북한은 소련에게 맥없이 깨진다. 소련 팀의 전설적인 수문장 야신에게서 한 골도 뺏어내지 못하고 3대0으로 지고, 칠레에게도 끌려가다가 1대1로 비긴다. 종료 직전 박승진이 25미터 중거리슛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것만 해도 기적이었지만 남은 것은 이탈리아였다. 월드컵 두 번 우승에 빛나는 이탈리아의 기세 좋은 푸른빛 유니폼 앞에 북한 선수들의 작은 키는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세계 최고의 수비수라 할 파게티를 비롯해서 북한 선수들에는 댈 것도 아닌 으리으리한 이름들이 그라운드를 수놓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거세게 몰아부쳤지만 북한 선수들은 의외로 끈질기게 저항했다. 특히 골키퍼 리창명은 곡예 수준의 선방으로 이탈리아의 슛을 막아 냈다. 자료화면을 보면 리창명은 신들린 것처럼 공을 쳐내고 받아 안으며 골문을 사수한다. 그리고 북한 선수들은 점프를 할 때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서로의 점프를 조력하는 ‘사다리전법’으로 이탈리아의 제공권에 도전했고 빠른 공격으로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를 노렸다. 그러던 중 행운이 찾아왔다. 이탈리아 선수 하나가 박승진에게 험악한 태클을 걸었는데 정작 박승진은 말짱하고 본인이 다리를 접질려 실려 나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선수 교체의 규칙이 없었다. 즉 이탈리아는 11대 10으로 싸워야 했던 것.
마침내 북한에게 서광이 비쳤다. 전반 42분이었다. 헤딩으로 길게 넘어온 공을 박두익은 그대로 강하게 슛했고 기겁을 한 이탈리아 골키퍼 알베르토시의 사력을 다한 다이빙도 헛되이 공은 이탈리아 네트에 꽂혀 버린 것이다.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기적을 낳은 골이었다. 이탈리아는 노도와 같이 북한 수비를 휘몰아쳤지만 리창명 골키퍼는 그날 확실히 접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는 끝났다 1대0. 한 달 전 이탈리아의 복싱 챔피언 벤베누티는 남한에 가서 타이틀을 뺏기고 왔는데 이젠 북한팀이 이탈리아 축구대표팀을 눌렀다. 남과 북에 뺨맞고 걷어차인 이탈리아인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국회에서 그 패인이 다뤄지고 이탈리아 선수들은 썩은 토마토 세례를 받아야 했다.
8강전에서도 3대0으로 앞서나가다가 경기 운영 미스로 역전패했지만 이때의 북한은 정말로 당당했다. 영국 정부는 월드컵 기념 우표에서 인공기를 빼 버렸지만, 스탠드에서 양복을 입은 조선인민공화국 외교일꾼이 휘두른 인공기는 위풍당당했다. 자기 나라 정식 명칭도 사용하지 못했지만 북한이 예선을 치른 미들스버러 시민들은 이 기적의 코리아인들에게 환호했고 8강전 때에는 수천 명이 원정을 가서 ‘코리아’를 부르짖으며 응원했고 거창한 파티까지 열어주며 북한의 선전을 치하했다.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북한 선수들의 기념품 갖기에 혈안이 됐고, 인공기를 만들어 흔들었다. 덩치 큰 축구의 종갓집들에 기죽지 않고 이겼고 졌어도 당당했던 북한 선수들은 그야말로 매력덩어리였던 것이다.
월드컵 최대의 기적..... 북한이 이탈리아를 울린 날, 1966년 7월 19일이었다. 이날 한반도의 북부는 라디오 생중계를 들으며 뒤집어졌었다. 그로부터 36년 뒤 남한이 이탈리아를 물리쳤을 때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1966년 7월 19일 월드컵 사상 최고의 기적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이 기적을 일구었다고 하지만, 역대 월드컵 사상 최고의 이변을 얘기할 때 아시아의 이 나라 축구팀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그 월드컵에 출전하기 불과 13년 전까지 전쟁을 치렀으며 그 나라를 폭격하던 적국의 비행사들이 “더 이상 폭격할 곳이 없다.”고 그냥 복귀할 만큼 참혹한 전화(戰禍)를 겪었다. “그 나...라는 석기 시대로 돌아갔다.”는 것이 적국의 공군 지휘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런 참상 속에서 그들은 기적적인 전후 복구를 이루고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축구팀도 그에 덩달아 강세를 보였다.
평균 신장 165센티미터 그러니까 나보다도 더 키가 더 작은 선수가 태반인 축구팀이었지만 전원이 100미터를 11초에 끊는다고 할만큼 재빨랐고 군 특수부대와 함께 훈련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체력적으로도 뛰어났다. 그들이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자 그들의 동포이되 철천지원수로 지내던 나라의 축구팀은 지레 겁을 먹고 출전을 포기한다. FIFA가 벌금까지 매겼지만 차라리 벌금을 내면 냈지 저쪽에 깨질 수는 없다고 여길 정도였으니 보탤 설명이 없다. 마침내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만나게 된 팀은 호주였다.
호주팀은 작달막한 체구의 황인종 선수들을 조금은 우습게 보았지만 중립국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2연전에서 그 높은 콧대가 작신작신 부러지고 만다. 이 공포의 아시아 대표는 호주를 6대1 3대 1로 KO시켰던 것이다. 아시아를 대표하여 월드컵에 나가게 된 나라의 이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1966년 영국 월드컵에 나가게 된다.
냉전의 차가움이 가시지 않았던 시기, 북한은 주최국 영국으로부터 많은 수모를 겪는다. 영국은 애초에 북한이 예선에서 나가 떨어지기를 바랐다. 저 적성국 (영국은 6.25 때 미군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보낸 나라) 팀에게 비자를 내 주는 것도 좀 껄쩍지근한데 쟤네들 인공기가 버젓이 휘날리고 국가도 연주해 줘야 하느냐. 하지만 FIFA 규정상 정치적인 이유로 출전팀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고, 몇 가지 조건을 건다. 국기 게양은 허용하되 국가는 결선 개막전과 결승전에만 연주한다는 식으로 피해갔고 정식국명도 DPRK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신 North Korea를 쓰도록 했다. 북한은 이를 다 받아들인다. 적어도 이때의 북한은 21세기에 “태극기는 죽어도 평양에 못 내건다.”고 고집 피우는 벽창호가 아니었다.
북한이 속한 조에는 소련, 칠레가 끼어 있었고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가 버티고 있었다. 공산주의 종주국이라 그랬는지 북한은 소련에게 맥없이 깨진다. 소련 팀의 전설적인 수문장 야신에게서 한 골도 뺏어내지 못하고 3대0으로 지고, 칠레에게도 끌려가다가 1대1로 비긴다. 종료 직전 박승진이 25미터 중거리슛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것만 해도 기적이었지만 남은 것은 이탈리아였다. 월드컵 두 번 우승에 빛나는 이탈리아의 기세 좋은 푸른빛 유니폼 앞에 북한 선수들의 작은 키는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세계 최고의 수비수라 할 파게티를 비롯해서 북한 선수들에는 댈 것도 아닌 으리으리한 이름들이 그라운드를 수놓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거세게 몰아부쳤지만 북한 선수들은 의외로 끈질기게 저항했다. 특히 골키퍼 리창명은 곡예 수준의 선방으로 이탈리아의 슛을 막아 냈다. 자료화면을 보면 리창명은 신들린 것처럼 공을 쳐내고 받아 안으며 골문을 사수한다. 그리고 북한 선수들은 점프를 할 때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서로의 점프를 조력하는 ‘사다리전법’으로 이탈리아의 제공권에 도전했고 빠른 공격으로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를 노렸다. 그러던 중 행운이 찾아왔다. 이탈리아 선수 하나가 박승진에게 험악한 태클을 걸었는데 정작 박승진은 말짱하고 본인이 다리를 접질려 실려 나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선수 교체의 규칙이 없었다. 즉 이탈리아는 11대 10으로 싸워야 했던 것.
마침내 북한에게 서광이 비쳤다. 전반 42분이었다. 헤딩으로 길게 넘어온 공을 박두익은 그대로 강하게 슛했고 기겁을 한 이탈리아 골키퍼 알베르토시의 사력을 다한 다이빙도 헛되이 공은 이탈리아 네트에 꽂혀 버린 것이다.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기적을 낳은 골이었다. 이탈리아는 노도와 같이 북한 수비를 휘몰아쳤지만 리창명 골키퍼는 그날 확실히 접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는 끝났다 1대0. 한 달 전 이탈리아의 복싱 챔피언 벤베누티는 남한에 가서 타이틀을 뺏기고 왔는데 이젠 북한팀이 이탈리아 축구대표팀을 눌렀다. 남과 북에 뺨맞고 걷어차인 이탈리아인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국회에서 그 패인이 다뤄지고 이탈리아 선수들은 썩은 토마토 세례를 받아야 했다.
8강전에서도 3대0으로 앞서나가다가 경기 운영 미스로 역전패했지만 이때의 북한은 정말로 당당했다. 영국 정부는 월드컵 기념 우표에서 인공기를 빼 버렸지만, 스탠드에서 양복을 입은 조선인민공화국 외교일꾼이 휘두른 인공기는 위풍당당했다. 자기 나라 정식 명칭도 사용하지 못했지만 북한이 예선을 치른 미들스버러 시민들은 이 기적의 코리아인들에게 환호했고 8강전 때에는 수천 명이 원정을 가서 ‘코리아’를 부르짖으며 응원했고 거창한 파티까지 열어주며 북한의 선전을 치하했다.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북한 선수들의 기념품 갖기에 혈안이 됐고, 인공기를 만들어 흔들었다. 덩치 큰 축구의 종갓집들에 기죽지 않고 이겼고 졌어도 당당했던 북한 선수들은 그야말로 매력덩어리였던 것이다.
월드컵 최대의 기적..... 북한이 이탈리아를 울린 날, 1966년 7월 19일이었다. 이날 한반도의 북부는 라디오 생중계를 들으며 뒤집어졌었다. 그로부터 36년 뒤 남한이 이탈리아를 물리쳤을 때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