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4년 7월 18일 서강대 바콩시스코 납시다
...
서강대 총장을 꽤 오래 한 박홍이라는 신부님이 계시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 이름은 그를 익히 아는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그냥 신문지상에서 그 이름을 봤던 이들에게 이 신부님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대학생들의 사회참여는 당연한 일!"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캠퍼스에서 대학생들과 어울려 막걸리잔을 나누던 '괴짜'였고 군 복무 시절 간첩을 잡았다고 회식을 벌이던 부대원들 앞에서 "동족을 죽여놓고 무슨......"이라고 결기를 세우다가 몰매를 맞은 일을 회상하기도 하던 열혈 신부님이었다. 그런데 91년 5월 그 지옥같은 분신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이름은 매우 비장하게 그러나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전민련 간부였던 김기설이 분신자살한 몇 시간 후 그는 이런 발언을 한다.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를 올린다.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하며 죽음 앞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세력들의 정체를 깨닫도록 식별의 지혜를 베푸소서”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 블랙리스트를 들고 오늘은 네가 기름 끼얹고 내일은 네가 신나 뿌려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지만, 그 발언 가운데 가장 큰 함정은 그의 말 속에 파여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는 실체가 없으나 영적으로는 충만한 그의 영감은 보수 언론과 검찰에게는 복음과도 같았다. 당장 박홍의 발언과 기도는 김기설을 죽도록 꼬드긴(?), 그리고 유서까지 써 준 누군가를 잡아들이려는 검찰의 기민함으로 이어졌고, 언론들은 연일 '죽음의 세력'에 대해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91년 5월이 몸서리쳐지게 싫고, 그때 젊은이들의 전염병같은 분신 사태를 막지 못하고 장례식 참석하기만 바빴던 왕년의 '민민운동 진영'의 실책도 추궁되어야 마땅하다고 보지만 박홍은 파울도 장외파울을 치고 있었다.
그때 자신에게 집중된 매스컴의 플래쉬가 그리웠던 탓일까. 그 뒤로 심심찮게 레드 바이러스니 뭐니 하면서 자신의 극우적 성향을 커밍아웃해가던 그가 마침내 대형사고를 친다. 1994년 7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대학총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엄숙하게 선언한다.
"대학 안에 생각보다 주사파가 깊이 침투해 있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사회주의로동자청년동맹)과 김정일이 있다."는 것이 피를 토하는 그의 고발이었다. 하늘을 찌르는 준엄함과 델 것 같은 열렬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여전히 구체성이 부족했다. 주사파는 밖에서 침투한 것이 아니라 대학 내에서 자랐고, 사노맹은 주사파를 맹렬히 공격하던 이들이었으며, 사노맹이 사로청과 연결된 것은 '사노' 두 글자의 유사성의 이유 외에는 찾아볼 길이 없는 것이다. 4월 흑싸리껍데기로 7월 멧돼지를 먹을 기세였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인걸. 그의 주사파 파노라마는 이후 장엄하게 펼쳐졌다. 한 기자가 '증거'를 묻자 "증거고 나발이고....."라고 부르짖은 것은 그 신호탄에 불과했다.
야당에 주사파 750명이 암약하고 숫자까지 들이밀었다가 야당이 눈에 불을 켜고 항의하자 이번엔 여당에도 포함된 숫자라고 말을 바꿨다. 그러자 팔짱 끼며 콧노래 부르던 검찰이 이건 또 뭐야 박홍을 소환했지만 검찰마저 "새로운 사실이 없다."고 돌려 보냈지만 그래도 박홍 총장은 주사파 탈춤을 추었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추임새에 신들이 났다. 어느 전향한 주사파인지는 모르지만 난데없이 워드로 찍힌 주사파의 참회 편지를 들고 읽으며 그는 신파극을 연출한다. 제자의 슬픈 고백에 눈물 흘리는 교수의 애틋함은 그 몇 분 후 헐크의 광폭함으로 변신한다. 서강대학생들이 총장 퇴진을 요구한 데 대해 "이런 똥파리같은 놈들이! 아들이 애비더러 나가란다고 아버지가 나가는 것 봤어?"
88년부터 94년까지의 모든 대학 총학생회장이 주사파였다고 우기거나 주사파가 3만 명이 넘는다고 고함을 지르거나, 대학 교수 중에도 북한 돈 받고 공부한 놈이 있다고 발악을 하거나 그의 모든 주장에는 '구체성'이 없었다. 로만 칼라를 입은 신부라는 신분이 그의 진실의 근거였을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주사파가 많이 있었다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되, 그들은 그의 착각대로 바이러스도 아니고 어디에서 침투한 이들도 아닌, 사상의 자유 속에서 그들의 논리를 펴고 공박당할 권리가 있는 공화국의 시민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깡그리 무시했다. 그저 그에게 주사파는 몇만인지 몇천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없애야 할 마귀들이었던 것이다. 마치 "죽여라 하나님은 그 백성을 알아보신다,."고 외쳤던 유럽 중세의 사제처럼 말이다.
한 기자가 끈질기게 물었다. " 주사파의 배후에 사노맹이 있다는 증거를....... " 그러자 박홍 신부는 특유의 제스추어를 취하며 신부로서는 차마 못할 말을 내뱉는다. "아 답답하네.. 사노맹이건 주사파건 살모사와 코브라의 차이예요. 같은 독사들이라니까...." 그때 나는 이 말을 들으며 60년대 미국의 인권 운동이 한창일때 한 흑인 주일학교에서 폭탄이 폭발 , 수 명의 흑인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당시 KKK단의 대변인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그 거사를 한 것이 누구이든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우리가 방울뱀을 죽이는데 새끼와 어미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 적어도 박홍은 그 순간 신부가 아니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죄인을 사랑하러 오신" 예수의 종도 아니었다. 그저 매스컵의 헹가레에 도취되어 "무슨일을 하는지 모르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모지리에 불과했다.
세상에는 많은 모지리가 있다. 박홍처럼 4월 흑싸리건 7월 멧돼지건 그놈이 그놈일 뿐인 모지리도 있고, 자신들을 비판하면 다 박홍같은 놈이라고 우기는 모지리도 있다. 사실 그 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 모지리들을 치유하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고 강화하는 일 뿐이리라. 남의 머리 속의 사고방식과 그걸 표현한 것 가지고 국가가 어떻게 된다고 우기는 이들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징치할 수 있어야, 사고가 마비된 채 "국민이 아니라 당원을 바라봐야 한다."는 정치인이나 선거판에 방북해서는 김정일 장군님을 부르짖고서는 그걸 통일을 위한 위대한 행동이라 부르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1994년 7월 18일 박홍은 주사파라는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고 우겼다. 그리고 그 유령은 유령이 아니라 피가 돌고 살이 따뜻한 인간들이었다. 또 그 유령(?)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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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18일 서강대 바콩시스코 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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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총장을 꽤 오래 한 박홍이라는 신부님이 계시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 이름은 그를 익히 아는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그냥 신문지상에서 그 이름을 봤던 이들에게 이 신부님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대학생들의 사회참여는 당연한 일!"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캠퍼스에서 대학생들과 어울려 막걸리잔을 나누던 '괴짜'였고 군 복무 시절 간첩을 잡았다고 회식을 벌이던 부대원들 앞에서 "동족을 죽여놓고 무슨......"이라고 결기를 세우다가 몰매를 맞은 일을 회상하기도 하던 열혈 신부님이었다. 그런데 91년 5월 그 지옥같은 분신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이름은 매우 비장하게 그러나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전민련 간부였던 김기설이 분신자살한 몇 시간 후 그는 이런 발언을 한다.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를 올린다.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하며 죽음 앞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세력들의 정체를 깨닫도록 식별의 지혜를 베푸소서”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 블랙리스트를 들고 오늘은 네가 기름 끼얹고 내일은 네가 신나 뿌려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지만, 그 발언 가운데 가장 큰 함정은 그의 말 속에 파여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는 실체가 없으나 영적으로는 충만한 그의 영감은 보수 언론과 검찰에게는 복음과도 같았다. 당장 박홍의 발언과 기도는 김기설을 죽도록 꼬드긴(?), 그리고 유서까지 써 준 누군가를 잡아들이려는 검찰의 기민함으로 이어졌고, 언론들은 연일 '죽음의 세력'에 대해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91년 5월이 몸서리쳐지게 싫고, 그때 젊은이들의 전염병같은 분신 사태를 막지 못하고 장례식 참석하기만 바빴던 왕년의 '민민운동 진영'의 실책도 추궁되어야 마땅하다고 보지만 박홍은 파울도 장외파울을 치고 있었다.
그때 자신에게 집중된 매스컴의 플래쉬가 그리웠던 탓일까. 그 뒤로 심심찮게 레드 바이러스니 뭐니 하면서 자신의 극우적 성향을 커밍아웃해가던 그가 마침내 대형사고를 친다. 1994년 7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대학총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엄숙하게 선언한다.
"대학 안에 생각보다 주사파가 깊이 침투해 있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사회주의로동자청년동맹)과 김정일이 있다."는 것이 피를 토하는 그의 고발이었다. 하늘을 찌르는 준엄함과 델 것 같은 열렬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여전히 구체성이 부족했다. 주사파는 밖에서 침투한 것이 아니라 대학 내에서 자랐고, 사노맹은 주사파를 맹렬히 공격하던 이들이었으며, 사노맹이 사로청과 연결된 것은 '사노' 두 글자의 유사성의 이유 외에는 찾아볼 길이 없는 것이다. 4월 흑싸리껍데기로 7월 멧돼지를 먹을 기세였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인걸. 그의 주사파 파노라마는 이후 장엄하게 펼쳐졌다. 한 기자가 '증거'를 묻자 "증거고 나발이고....."라고 부르짖은 것은 그 신호탄에 불과했다.
야당에 주사파 750명이 암약하고 숫자까지 들이밀었다가 야당이 눈에 불을 켜고 항의하자 이번엔 여당에도 포함된 숫자라고 말을 바꿨다. 그러자 팔짱 끼며 콧노래 부르던 검찰이 이건 또 뭐야 박홍을 소환했지만 검찰마저 "새로운 사실이 없다."고 돌려 보냈지만 그래도 박홍 총장은 주사파 탈춤을 추었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추임새에 신들이 났다. 어느 전향한 주사파인지는 모르지만 난데없이 워드로 찍힌 주사파의 참회 편지를 들고 읽으며 그는 신파극을 연출한다. 제자의 슬픈 고백에 눈물 흘리는 교수의 애틋함은 그 몇 분 후 헐크의 광폭함으로 변신한다. 서강대학생들이 총장 퇴진을 요구한 데 대해 "이런 똥파리같은 놈들이! 아들이 애비더러 나가란다고 아버지가 나가는 것 봤어?"
88년부터 94년까지의 모든 대학 총학생회장이 주사파였다고 우기거나 주사파가 3만 명이 넘는다고 고함을 지르거나, 대학 교수 중에도 북한 돈 받고 공부한 놈이 있다고 발악을 하거나 그의 모든 주장에는 '구체성'이 없었다. 로만 칼라를 입은 신부라는 신분이 그의 진실의 근거였을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주사파가 많이 있었다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되, 그들은 그의 착각대로 바이러스도 아니고 어디에서 침투한 이들도 아닌, 사상의 자유 속에서 그들의 논리를 펴고 공박당할 권리가 있는 공화국의 시민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깡그리 무시했다. 그저 그에게 주사파는 몇만인지 몇천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없애야 할 마귀들이었던 것이다. 마치 "죽여라 하나님은 그 백성을 알아보신다,."고 외쳤던 유럽 중세의 사제처럼 말이다.
한 기자가 끈질기게 물었다. " 주사파의 배후에 사노맹이 있다는 증거를....... " 그러자 박홍 신부는 특유의 제스추어를 취하며 신부로서는 차마 못할 말을 내뱉는다. "아 답답하네.. 사노맹이건 주사파건 살모사와 코브라의 차이예요. 같은 독사들이라니까...." 그때 나는 이 말을 들으며 60년대 미국의 인권 운동이 한창일때 한 흑인 주일학교에서 폭탄이 폭발 , 수 명의 흑인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당시 KKK단의 대변인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그 거사를 한 것이 누구이든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우리가 방울뱀을 죽이는데 새끼와 어미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 적어도 박홍은 그 순간 신부가 아니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죄인을 사랑하러 오신" 예수의 종도 아니었다. 그저 매스컵의 헹가레에 도취되어 "무슨일을 하는지 모르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모지리에 불과했다.
세상에는 많은 모지리가 있다. 박홍처럼 4월 흑싸리건 7월 멧돼지건 그놈이 그놈일 뿐인 모지리도 있고, 자신들을 비판하면 다 박홍같은 놈이라고 우기는 모지리도 있다. 사실 그 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 모지리들을 치유하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고 강화하는 일 뿐이리라. 남의 머리 속의 사고방식과 그걸 표현한 것 가지고 국가가 어떻게 된다고 우기는 이들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징치할 수 있어야, 사고가 마비된 채 "국민이 아니라 당원을 바라봐야 한다."는 정치인이나 선거판에 방북해서는 김정일 장군님을 부르짖고서는 그걸 통일을 위한 위대한 행동이라 부르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1994년 7월 18일 박홍은 주사파라는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고 우겼다. 그리고 그 유령은 유령이 아니라 피가 돌고 살이 따뜻한 인간들이었다. 또 그 유령(?)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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