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79년 7월 17일 정의구현사제단 “오원춘 양심선언” 폭로
요즘 '오원춘'을 검색하면 온통 얼마 전 수원에서 여성을 강간 살해하고 시체를 훼손한 조선족 오원춘 밖에 뜨지 않지만 진짜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오원춘은 따로 있다. 1979년 7월 17일 정의구현사제단은 오원춘 납치 폭행 사건과 관련한 오원춘의 양심선언을 발표한다.그럼 오원춘은 대체 누구였을까. 그는 과거 중부고속도로나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리기... 전만 해도 한국의 '오지'로 불리우던 경북 북부의 영양군 청기면에 살던 평범한 농부였다. 그의 평범한 삶에 파장을 일으킨 것은 관에서 심기를 권장했던 시마바라라는 품종의 감자였다.
관에서 시키는 일이니 망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던 터라 농민들은 저마다 시마바라 감자를 심었으나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야 묵찌빠를 하든 수확을 하든 할 텐데, 이놈의 시마바라인지 시바마라인지의 감자는 싹을 도통 틔우지 못한 것이다. 영양군 전체 감자 농사가 망쪼가 들고 말았다. 억울하긴 해도 별 수 없지 않냐고 포기한 농민들도 있었지만 가톨릭 농민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농민들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무책임한 정부와 농협에 감자를 먹이며 피해 보상을 요구했는데 그 선봉에 섰던 사람이 오원춘이라는 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7백만원이라는 피해 보상을 받는데 성공했다.
사건은 이 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오원춘이 바쁜 농사철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날 행방불명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행방불명은 영양천주교회의 야외미사에 오원춘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확인된 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작 교회가 오원춘의 고백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게 된 것은 그가 어딘가로부터 돌아온 지 수십일이 지난 뒤였다. 그의 토로는 충격적이었다. 5월 5일 영양 버스 터미널에서 정체 모를 남자들에게 납치된 후 울릉도까지 끌려다니며 무수한 폭행과 협박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양심선언으로 남긴다.
“본인은 79년 5월5일 영양 버스 정류장에서 정체불명의 두 사람으로부터 납치당해 안동을 거쳐 포항 모건물(포항제철 부근 잿빛 건물) 안에서 이유 모를 폭행을 당하고(체제에 반대하는 놈은 그냥 둘 수 없다며 폭행하였음) 울릉도까지 15일 동안 강제 격리된 상태에서 불안한 날들을 보낸 사실이 있어, 이를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구성한 조사단과 농민회 조사단, 본당신부님께 하느님께 받은 양심에 의해 진술한 바 있습니다. 이 사실은 차후에 어떠한 일 있어도 ‘사실’이며, 만약 번복된다면 이는 외부적 압력이나 위협에 의한 강제적 결과일 것입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농민들과 함께 일하려는 나의 동료 형제들에게 또 다시 쏟아질지도 모르는 폭력과 압력 밑에서 주여! 작은 저희들을 지켜주소서. 영양 천주교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아래서. 1979년 7월5일”.
다행인 것은 당시 천주교 안동교구 주교가 두봉이었다는 것이다.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유신 정권에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지학순 주교를 지지했다. “(…)지 주교님 사건은 한국 교회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교회가 쇄신되어야 하고 사회 안에서 빛의 역할을 해야 되겠다는 것을 우리 많은 이가 절감하게 되었다.
일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사제들이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나서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현 시국에 관련된 운동에만 국한되어서도 안되고 앞으로도 꾸준히 오래 지속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 주변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휘하에 있던 천주교 안동교구는 이 말도 안되는 납치 사건을 그냥 넘어가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는 작업에 나선다. 1979년 7월 17일 오원춘 사건은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제작된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문건을 통해 전국적으로 폭로되기에 이른다. 전국이 발칵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얼치기 소설 쓰기의 명수였던 경찰은 매우 엉뚱한 방식으로 이에 대응한다. 현장검증을 이유로 오원춘을 유인해 빼돌리더니 그를 매우 쳐서 증언을 번복시킨 뒤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이사이자 경북 영양군 청기면 분회장인 오원춘은 그해 5월5일부터 21일까지 포항 울릉도 등지를 개인적으로 여행했음에도 불구, 모기관원에게 납치돼 폭행 감금 또는 감시받았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급기야 경찰은 오원춘은 물론 안동교구의 신부까지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한다. 최고의 쇼는 검사의 사무실에서, 심지어 교도소에서 증인들(?)까지 불러서 벌인 오원춘의 ’자백‘이었다.
보수적인 도시 안동의 목성동 성당에서 열린 기도회에는 김수환 추기경 이하 수백명이 참석했고 이들은 유신철폐를 부르짖으며 가두 촛불 시위를 감행했다. 반정부 시위에 사형까지 때릴 수 있는 긴급조치의 시대였다. 이어 열린 공판에서 오원춘은 변호사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검사만을 바라보며 공소사실을 시인했다. 공판 중 그는 계속 울었다. 변호사들은 서울에서 열차 타고 내려가 그를 변호하고 올라오곤 했는데 하루는 변호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황인철 변호사도 술에 취해 오원춘과 똑같이 기차에서 엉엉 울었다. “세상에 뭐 이런 일이 있단 말이냐.”
이 말도 안되는 기소와 재판 (오원춘에게 징역 2년 선고)은 몇 달 뒤 허무하게 끝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의 총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 오원춘은 풀려났다. 그는 그 후 고향에서 고문으로 어두워진 귀를 매만지고 불편해진 몸을 추스르면서 평범하게 농사 지으며 살았다. 그는 고추 농사를 지었는데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드높일 때가 있었다. 1988년 가을에 있었던 ‘고추시위’때였다. 당시 고추가격 폭락사태와 수매량 확대 문제를 놓고 농민들과 정부가 실랑이를 벌이던 무렵, 그는 치밀한 계획과 작전으로 영양군 농민들을 단결시키는데 성공했고, 거의 모든 영양 농민들이 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오원춘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에 경찰은 경끼를 일으켰고 영양이라는 고을이 생긴 이래 최대인지도 모를 병력을 투입, 대응에 나섰다. 이는 오원춘의 이름값이었고 그의 양심선언과 1979년 7월 17일 전국을 강타했던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가 역사의 샘에 일으킨 파문과도 같았다.
1979년 7월 17일 정의구현사제단 “오원춘 양심선언” 폭로
요즘 '오원춘'을 검색하면 온통 얼마 전 수원에서 여성을 강간 살해하고 시체를 훼손한 조선족 오원춘 밖에 뜨지 않지만 진짜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오원춘은 따로 있다. 1979년 7월 17일 정의구현사제단은 오원춘 납치 폭행 사건과 관련한 오원춘의 양심선언을 발표한다.그럼 오원춘은 대체 누구였을까. 그는 과거 중부고속도로나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리기... 전만 해도 한국의 '오지'로 불리우던 경북 북부의 영양군 청기면에 살던 평범한 농부였다. 그의 평범한 삶에 파장을 일으킨 것은 관에서 심기를 권장했던 시마바라라는 품종의 감자였다.
관에서 시키는 일이니 망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던 터라 농민들은 저마다 시마바라 감자를 심었으나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야 묵찌빠를 하든 수확을 하든 할 텐데, 이놈의 시마바라인지 시바마라인지의 감자는 싹을 도통 틔우지 못한 것이다. 영양군 전체 감자 농사가 망쪼가 들고 말았다. 억울하긴 해도 별 수 없지 않냐고 포기한 농민들도 있었지만 가톨릭 농민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농민들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무책임한 정부와 농협에 감자를 먹이며 피해 보상을 요구했는데 그 선봉에 섰던 사람이 오원춘이라는 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7백만원이라는 피해 보상을 받는데 성공했다.
사건은 이 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오원춘이 바쁜 농사철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날 행방불명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행방불명은 영양천주교회의 야외미사에 오원춘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확인된 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작 교회가 오원춘의 고백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게 된 것은 그가 어딘가로부터 돌아온 지 수십일이 지난 뒤였다. 그의 토로는 충격적이었다. 5월 5일 영양 버스 터미널에서 정체 모를 남자들에게 납치된 후 울릉도까지 끌려다니며 무수한 폭행과 협박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양심선언으로 남긴다.
“본인은 79년 5월5일 영양 버스 정류장에서 정체불명의 두 사람으로부터 납치당해 안동을 거쳐 포항 모건물(포항제철 부근 잿빛 건물) 안에서 이유 모를 폭행을 당하고(체제에 반대하는 놈은 그냥 둘 수 없다며 폭행하였음) 울릉도까지 15일 동안 강제 격리된 상태에서 불안한 날들을 보낸 사실이 있어, 이를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구성한 조사단과 농민회 조사단, 본당신부님께 하느님께 받은 양심에 의해 진술한 바 있습니다. 이 사실은 차후에 어떠한 일 있어도 ‘사실’이며, 만약 번복된다면 이는 외부적 압력이나 위협에 의한 강제적 결과일 것입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농민들과 함께 일하려는 나의 동료 형제들에게 또 다시 쏟아질지도 모르는 폭력과 압력 밑에서 주여! 작은 저희들을 지켜주소서. 영양 천주교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아래서. 1979년 7월5일”.
다행인 것은 당시 천주교 안동교구 주교가 두봉이었다는 것이다.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유신 정권에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지학순 주교를 지지했다. “(…)지 주교님 사건은 한국 교회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교회가 쇄신되어야 하고 사회 안에서 빛의 역할을 해야 되겠다는 것을 우리 많은 이가 절감하게 되었다.
일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사제들이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나서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현 시국에 관련된 운동에만 국한되어서도 안되고 앞으로도 꾸준히 오래 지속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 주변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휘하에 있던 천주교 안동교구는 이 말도 안되는 납치 사건을 그냥 넘어가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는 작업에 나선다. 1979년 7월 17일 오원춘 사건은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제작된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문건을 통해 전국적으로 폭로되기에 이른다. 전국이 발칵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얼치기 소설 쓰기의 명수였던 경찰은 매우 엉뚱한 방식으로 이에 대응한다. 현장검증을 이유로 오원춘을 유인해 빼돌리더니 그를 매우 쳐서 증언을 번복시킨 뒤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이사이자 경북 영양군 청기면 분회장인 오원춘은 그해 5월5일부터 21일까지 포항 울릉도 등지를 개인적으로 여행했음에도 불구, 모기관원에게 납치돼 폭행 감금 또는 감시받았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급기야 경찰은 오원춘은 물론 안동교구의 신부까지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한다. 최고의 쇼는 검사의 사무실에서, 심지어 교도소에서 증인들(?)까지 불러서 벌인 오원춘의 ’자백‘이었다.
보수적인 도시 안동의 목성동 성당에서 열린 기도회에는 김수환 추기경 이하 수백명이 참석했고 이들은 유신철폐를 부르짖으며 가두 촛불 시위를 감행했다. 반정부 시위에 사형까지 때릴 수 있는 긴급조치의 시대였다. 이어 열린 공판에서 오원춘은 변호사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검사만을 바라보며 공소사실을 시인했다. 공판 중 그는 계속 울었다. 변호사들은 서울에서 열차 타고 내려가 그를 변호하고 올라오곤 했는데 하루는 변호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황인철 변호사도 술에 취해 오원춘과 똑같이 기차에서 엉엉 울었다. “세상에 뭐 이런 일이 있단 말이냐.”
이 말도 안되는 기소와 재판 (오원춘에게 징역 2년 선고)은 몇 달 뒤 허무하게 끝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의 총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 오원춘은 풀려났다. 그는 그 후 고향에서 고문으로 어두워진 귀를 매만지고 불편해진 몸을 추스르면서 평범하게 농사 지으며 살았다. 그는 고추 농사를 지었는데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드높일 때가 있었다. 1988년 가을에 있었던 ‘고추시위’때였다. 당시 고추가격 폭락사태와 수매량 확대 문제를 놓고 농민들과 정부가 실랑이를 벌이던 무렵, 그는 치밀한 계획과 작전으로 영양군 농민들을 단결시키는데 성공했고, 거의 모든 영양 농민들이 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오원춘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에 경찰은 경끼를 일으켰고 영양이라는 고을이 생긴 이래 최대인지도 모를 병력을 투입, 대응에 나섰다. 이는 오원춘의 이름값이었고 그의 양심선언과 1979년 7월 17일 전국을 강타했던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가 역사의 샘에 일으킨 파문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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