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7월 16일 인류 최초의 핵폭발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서 남쪽 193km 거리의 앨러머고도 공군 기지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탄은 과학장비로 둘러싸인 강철탑 위에서 폭발했는데 그곳에서 9km 떨어진 벙커 안에서는 과학자들과 몇몇 고위인사가 원격 감시장치로 폭발광경을 초조한 낯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폭탄이 터지자 강렬한 섬광이 미명을 밝혔고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면서 골짜기를 울려 귀가 멀 듯한 폭음으로 번졌다. 하늘을 찌르는 불기둥이 치솟았고, 버섯 모양 구름은 1만 2000m 상공까지 뒤덮었다. 강철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폭심 주변의 모래는 녹아서 유리가루처럼 변해 버렸다.
이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면서 이 폭탄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오펜하이머 박사는 이렇게 외쳤다.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 즉 "세상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또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만든 폭탄에 빙의된 듯 인도의 서사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고도 한다.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이노라." 인류가 발명한 무기 가운데 인류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죽음의 신, 지구를 통째로 파괴해 버릴 수 있는 세상의 파괴자가 등장한 것이다. 원자폭탄이었다.
미국의 과학자들이 핵분열과정을 군사목적에 이용하기 위한 연구계획을 짜기 시작한 것은 1939년부터였다. 이 연구에 참가한 이들 가운데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나찌와 파시스트들을 피해 온 망명 과학자들이었다. 우선 엔리코 페르미.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후 유태인이었던 아내에 대한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이고 후일 연구 과정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만든다.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망명자였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나찌가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지 모른다.”는 서한을 보내 (후일 그는 이 결정을 몹시도 후회했다지만) 미국 정부의 본격적인 원자탄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민간 기관에서 담당하던 핵폭탄 개발 연구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에는 육군부의 소관이 됐다. 그것은 이 프로젝트가 필요로 하는 연구 시설과 실험 부지를 만족시키려면 육군 공병단의 개입이 없으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1942년 6월에 공병단의 맨해튼 관구가 먼저 그 건설사업 책임을 맡았으며(초기 연구가 맨해튼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에 주로 이뤄졌기 때문인데), 그래서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암호명은 ‘맨하탄 계획’이 된다.
철저한 보안과 감시 속에 진행된 원자폭탄 연구가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 정부는 또 하나의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유럽에서 망명 온 학자들이 큰 힘이 되고 있었던 바, 유럽에는 그들만큼이나 유능한 과학자들이 숱하게 남아 있으며 그들 역시 그들의 조국을 위하여 진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쪽의 과학자들을 독려함과 동시에 저쪽의 핵융합 연구에 대한 정보를 얻고, 부득이할 경우 그 개발에 필요한 두뇌들을 제거할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때 활약한 미국인 중의 하나가 모 버그다. 그는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선수였다.
솔직히 그는 야구에서는 큰 빛을 못 본 선수였다. 프로야구단에 입단하긴 했지만 유격수를 했다가 포수를 했다가 포지션도 왔다갔다 했고 주전포수가 된 다음에는 부상을 입어 주전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쪽으로 천부적인 재질이 있었다. 그는 언어의 천재였다. 프린스턴 대학 시절 그는 무려 10개 국어를 배웠고 말할 줄 알았다. 그가 베이브루스와 함께 올스타팀에 들어 일본에 갔을 때 그는 일본어를 말할 줄 아는 진귀한 미국인으로서 일본의 곳곳을 촬영하고 돌아왔다. 일본과의 전쟁이 터지자 호기심으로 찍었던 그 자료 화면들은 고스란히 일본의 지형 지물을 파악하는데 쓰인다.
OSS(CIA의 전신)는 이 영민한 인물을 프로야구 포수로 썩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를 설득하여 스파이로 유럽에 잠입시킨다. 임무는 좀 무시무시했다. 독일 원자폭탄 개발의 주도자라 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에게 접근하여 원자폭탄 연구 진전 상황을 알아내고 만약에 원자폭탄이 개발이 임박했다면 하이젠베르크를 죽이는 것이었다. 야구공 대신 권총과 청산가리를 들고 하이젠베르크에게 접근했지만 그가 얻은 정보는 아직 원자폭탄 개발로부터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고 하이젠베르크는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고 이 모 버그도 살인의 업을 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하이젠베르크가 전쟁 후에 자신은 고의로 태업을 해서 원폭 제작을 지연시켰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가 정말로 그랬는지는 저승의 염라대왕도 궁금해 했을 일이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면 자칫하면 모 버그는 독일의 원자폭탄 생산을 재촉하는 암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원폭 계획은 일본에서도 진행 중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이 흥남 앞바다에서 소규모 핵실험을 했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된 바 있고,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흥남 비료공장을 비롯한 흥남 일원이 특별히 미 공군의 집중 폭격 대상이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인류는 자신의 목을 내려칠 수 있는 시퍼런 칼을 갈아 머리맡 천정에 달아매려고 노력했고 누가 빨리 달아매는가 경주를 했다. 그 경주 끝에 1945년 7월 16일 거대한 섬광과 버섯구름의 위용으로 원자폭탄이 태어났다. 그리고 첫 번째 이름 ‘꼬마’는 히로시마를 집어삼켰고 두 번째 ‘뚱뚱이’는 나가사키를 폐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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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서 남쪽 193km 거리의 앨러머고도 공군 기지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탄은 과학장비로 둘러싸인 강철탑 위에서 폭발했는데 그곳에서 9km 떨어진 벙커 안에서는 과학자들과 몇몇 고위인사가 원격 감시장치로 폭발광경을 초조한 낯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폭탄이 터지자 강렬한 섬광이 미명을 밝혔고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면서 골짜기를 울려 귀가 멀 듯한 폭음으로 번졌다. 하늘을 찌르는 불기둥이 치솟았고, 버섯 모양 구름은 1만 2000m 상공까지 뒤덮었다. 강철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폭심 주변의 모래는 녹아서 유리가루처럼 변해 버렸다.
이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면서 이 폭탄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오펜하이머 박사는 이렇게 외쳤다.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 즉 "세상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또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만든 폭탄에 빙의된 듯 인도의 서사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고도 한다.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이노라." 인류가 발명한 무기 가운데 인류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죽음의 신, 지구를 통째로 파괴해 버릴 수 있는 세상의 파괴자가 등장한 것이다. 원자폭탄이었다.
미국의 과학자들이 핵분열과정을 군사목적에 이용하기 위한 연구계획을 짜기 시작한 것은 1939년부터였다. 이 연구에 참가한 이들 가운데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나찌와 파시스트들을 피해 온 망명 과학자들이었다. 우선 엔리코 페르미.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후 유태인이었던 아내에 대한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이고 후일 연구 과정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만든다.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망명자였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나찌가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지 모른다.”는 서한을 보내 (후일 그는 이 결정을 몹시도 후회했다지만) 미국 정부의 본격적인 원자탄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민간 기관에서 담당하던 핵폭탄 개발 연구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에는 육군부의 소관이 됐다. 그것은 이 프로젝트가 필요로 하는 연구 시설과 실험 부지를 만족시키려면 육군 공병단의 개입이 없으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1942년 6월에 공병단의 맨해튼 관구가 먼저 그 건설사업 책임을 맡았으며(초기 연구가 맨해튼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에 주로 이뤄졌기 때문인데), 그래서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암호명은 ‘맨하탄 계획’이 된다.
철저한 보안과 감시 속에 진행된 원자폭탄 연구가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 정부는 또 하나의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유럽에서 망명 온 학자들이 큰 힘이 되고 있었던 바, 유럽에는 그들만큼이나 유능한 과학자들이 숱하게 남아 있으며 그들 역시 그들의 조국을 위하여 진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쪽의 과학자들을 독려함과 동시에 저쪽의 핵융합 연구에 대한 정보를 얻고, 부득이할 경우 그 개발에 필요한 두뇌들을 제거할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때 활약한 미국인 중의 하나가 모 버그다. 그는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선수였다.
솔직히 그는 야구에서는 큰 빛을 못 본 선수였다. 프로야구단에 입단하긴 했지만 유격수를 했다가 포수를 했다가 포지션도 왔다갔다 했고 주전포수가 된 다음에는 부상을 입어 주전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쪽으로 천부적인 재질이 있었다. 그는 언어의 천재였다. 프린스턴 대학 시절 그는 무려 10개 국어를 배웠고 말할 줄 알았다. 그가 베이브루스와 함께 올스타팀에 들어 일본에 갔을 때 그는 일본어를 말할 줄 아는 진귀한 미국인으로서 일본의 곳곳을 촬영하고 돌아왔다. 일본과의 전쟁이 터지자 호기심으로 찍었던 그 자료 화면들은 고스란히 일본의 지형 지물을 파악하는데 쓰인다.
OSS(CIA의 전신)는 이 영민한 인물을 프로야구 포수로 썩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를 설득하여 스파이로 유럽에 잠입시킨다. 임무는 좀 무시무시했다. 독일 원자폭탄 개발의 주도자라 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에게 접근하여 원자폭탄 연구 진전 상황을 알아내고 만약에 원자폭탄이 개발이 임박했다면 하이젠베르크를 죽이는 것이었다. 야구공 대신 권총과 청산가리를 들고 하이젠베르크에게 접근했지만 그가 얻은 정보는 아직 원자폭탄 개발로부터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고 하이젠베르크는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고 이 모 버그도 살인의 업을 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하이젠베르크가 전쟁 후에 자신은 고의로 태업을 해서 원폭 제작을 지연시켰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가 정말로 그랬는지는 저승의 염라대왕도 궁금해 했을 일이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면 자칫하면 모 버그는 독일의 원자폭탄 생산을 재촉하는 암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원폭 계획은 일본에서도 진행 중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이 흥남 앞바다에서 소규모 핵실험을 했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된 바 있고,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흥남 비료공장을 비롯한 흥남 일원이 특별히 미 공군의 집중 폭격 대상이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인류는 자신의 목을 내려칠 수 있는 시퍼런 칼을 갈아 머리맡 천정에 달아매려고 노력했고 누가 빨리 달아매는가 경주를 했다. 그 경주 끝에 1945년 7월 16일 거대한 섬광과 버섯구름의 위용으로 원자폭탄이 태어났다. 그리고 첫 번째 이름 ‘꼬마’는 히로시마를 집어삼켰고 두 번째 ‘뚱뚱이’는 나가사키를 폐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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