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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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1일 박왕자씨 살해 사건 - 종북이 싫은 이유
외모를 극복하기 위해 연기력을 무기로 하는 배우들이 많지만, 장동건도 정반대의 견지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무슨 역을 맡던 형광등 천 개의 아우라가 비치는 외모 때문에 그는 오히려 고민이 많았었다고 했다. 그래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같은 영화에서는 조연도 마다 않고 출연했고 그 외 영화에서도 그 눈짓 하나로 여자를 홀리는 로맨틱 가이보다는 그 외모에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 험한 역할도 많이 했다. <친구>의 깡패나 <해안선>의 초병이나. 영화 <해안선>에서 해병대원 장동건은 군사보호지역에서 사랑을 나누던 연인에게 사격을 가해 남자를 죽인다. 그는 경계근무에 철저한 사병으로 표창을 받고 포상휴가를 받지만 그사건은 두고두고 그를 정신적으로 괴롭히게 된다.
부산 태종대나 송정의 해안가에는 "한 마리 잡자."라는 구호가 걸려 있었고, "한 마리 잡으면 헬기 타고 고향 앞으로." 라는 해설이 딸려 있었다. '한 마리'란 다름아닌 침투하는 간첩이었고,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고 쏘아 죽이고 헬기 타고 고향 가면 되는 발판일 뿐이었다. 영화 <해안선>이 드러내고자 한 것도 물론 적이긴 하지만 그 적을 '한 마리'에 비유하는 폭력성에 대한 고발일 것이다. 군사보호지역에 허락 없이 뛰어들어 얼쩡대다가 초병의 수하에 대답도 않고 후다닥 도망가는 인간이란 더더욱 마땅히 죽여야 할 짐승인지도 모른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외아들 하나 둔 평범하디 평범한 50대 주부가 동창들과 함께 금강산 구경을 왔다가 새벽 일출을 보겠다며 어둑어둑한 해안으로 나갔다가 모래 언덕 정도로만 막아 놨던 민간인 출입 경계선을 넘었고 북한 초병의 수하에 놀라 도망하다가 총격을 맞고 숨졌다. 바로 박왕자씨 사건이다. 적어도 북한 초병에게 모래밭을 뒤뚱뒤뚱 뛰어 도망가는 50대 여인은 '한 마리'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놓치기보다는 사살하는 것이 낫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다. 정조준으로 등짝을 명중시킬 정도면 그렇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 상황의 재연은 서술하지 않겠다. 그러나 민간인통제구역을 설정하는 것은 통제하는 쪽의 권리이자 의무다. 즉 철조망이든 철책선이든 민간인이 손쉽게 넘기 어려운 장벽을 설치하든지, 여러 경로로 경고를 발하여 민간인들이 통제를 어기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당연하게도 남한 관광객들이 득실대던 금강산 인근에서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을 공지하고 물리적인 차단선을 설정해야 하는 의무가 가장 크게 지워지는 것은 바로 조선 인민군이다. 만약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철책선 하나 없는 군사보호구역에서 들어간 민간인이 사살됐다면, 초병은 휴가를 갈지언정 그 관리 책임을 진 장교는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정부간 합의에 따라 자국의 기업이 관광 시설을 설치하고, 자국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 남한 정부가 사건의 진상과 책임 소재를 밝히라고 요구할 권리는 단호하게 '있다'.
그러나 자칭 일부 진보 진영은 이 상식을 어긴다. 한국진보연대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은 북의 땅으로 남과 북이 정해진 기준을 잘 따라야 한다..... 사망하신 분과 관련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지만 남북이 이 일로 잘잘못을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즉 이 말을 풀어 쓰면 이렇다. "죽은 사람은 안됐지만 누가 거기 들어가래? 그냥 넘어가자." 한국진보연대는 이어 공식 성명에서 "박왕자 여사의 영전에 삼가 애도의 마음을 드리고...... 이 사건은 남북 화해 협력에 추가적인 장애를 조성한 점에서 하루 속히 전향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진상이 규명되고 재발방지대책이 세워져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을 읊은 뒤에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여 남북관계 경색을 추구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국민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라 주장하는 널뛰기를 한다.
북한이 남한의 공동 조사 제안을 거부하고, 심지어 "터놓고 말하여 군사통제구역 안에 불법침입한 그가 죽음을 당하였으니 말이지 (생포했다면) 우리로서는 알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는 식으로 고인을 이상한 쪽으로 몰아갈 때 심지어 자칭 진보 진영 일부에서는 고인의 남편이 전직 경찰이었음을 들먹이며 야릇한 냄새를 피우는 이들마저 있었다. '진상규명'을 입에 달면서도 그들이 원하는 진상은 북한의 발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남측의 공동조사를 거절하는 북한을 '규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급기야 북한은 남측의 제의를 거절한 채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고 남한 인력을 추방한다. 즉 금강산 문을 닫아 건 것은 북한이었다.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불행한 현실의 책임은 남북이 반반으로 짊어져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남쪽의 책임에 대해서는 청산유수가 흐르지만 북쪽의 책임에 대해서 문제의 '일부' 진보 진영이 일언반구나마 언급한 적은 없다. 그저 박왕자씨는 안됐지만 죽을 곳을 찾아 들어갔을 뿐이며, 전 민주노동당 간부 최규엽이 "인터넷에서 퍼서 인용한" 주장처럼, "(초병의 경고나 명령에) 불응, 도주 시에는 발포 및 사살이 규칙"일 뿐이었다. 북한군 초병은 결국 한 마리를 잡은 것이다.
북한은 "책임은 전적으로 남측에 있으며, 사과를 받을 쪽은 남한이 아니라 북조선"이라고 우겼다. 이 후안무치함에 대해서도 일부 진보 진영은 단 한 마디를 하지 못한다. 과실이 명백하긴 하지만, 고의성은 없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여중생의 원통함에 대해서는 군 부대 철책선을 뜯고 미군 부대에 뛰어들 만큼 용맹하던 그 용기는 결코 북쪽에 대해서는 발휘되지 못한다. 그들에게 박왕자씨는 "들어가지 못할 곳을 찾아들었다가 총맞아 죽은 사람"일 뿐인 것이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그랬고, 이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진보'가 아니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거기에 필요한 것은 남과 북 정권 모두의 전향적인 태도다. 북한이 끝까지 "박왕자 책임론"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남한 정부가 무슨 면목으로 관광객을 북으로 실어보낼 수 있단 말인가. 2008년 7월 11일 한 여인이 열 일곱 살의 여군 (자주민보 보도대로라면)에 의해 등이 꿰뚫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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