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강기훈씨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의 무죄를 요구하며 작년 꺼 다시.
1906년 7월 12일 “드레퓌스 무죄!”
...
1894년 프랑스 정보 요원이 누군가가 독일 무관에게 보내는 기밀 문서를 훔쳐 내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정보국의 수사관들은 눈에 불을 켜고 스파이를 찾은 끝에 범인을 잡아냈는데 근거는 그 필체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체 말고도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는 빌어먹을 유태인이었다. 간첩과 필체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참모 본부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 증거를 공개할 수는 없다."면서 보다 확실한 증거의 공개를 요청하는 이들의 요청을 무시했다. 나아가 "이것은 너무나 민감한 군사 기밀이기 때문에 만일 공개할 경우 독일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협박했다. 드레퓌스 대위는 자신이 무죄임을 열심히 항변했지만 종신징역을 선고받고 훗날 ‘빠삐용’의 무대가 되는 악명 높은 기아나의 유형지로 끌려간다. 그 이후 드레퓌스의 생이 그려내는 드라마의 주요 배역들을 읊어 보자.
조르쥬 피카르 중령. 그는 스파이 사건을 조사 중 어처구니없는 진실을 접하게 된다. 드레퓌스는 죄가 없고 문제의 필체가 또 다른 장교 에스테라지 소령의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 그는 용감하게 에스테라지 체포와 드레퓌스의 재심을 상관에게 요구하지만 완전무결하게 거부당하고 튀니지로 좌천된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을 외부에 전파함으로써 프랑스의 양심을 지킨다. 이 사실은 변호사를 거쳐 상원 의원에게까지 흘러들어가지만 그들은 이 사건을 폭로할 용기가 없었다. 반유태주의 물결이 거센 상황에서 드레퓌스 편을 드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자살 행위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드레퓌스 구명에 나선다. 그 부인은 남편이 법정에 출된 증거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또 다시 드레퓌스의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리는 가운데 초지일관 프랑스 군부 편을 들던 극우 신문 르 마탱이 뜻밖의 사고를 친다. 드레퓌스의 죄상을 공개한답시고 일찍이 드레퓌스의 필적이라 규정되었던 문제의 서류를 대문짝만하게 실어버린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필체의 주인은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 진짜 간첩으로서 간첩질로 얻은 돈으로 과부나 꼬셔 재미를 보고 다니던 저질 인간. 르마탱에 자신의 필적이 공개됐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반유태인 선전에 열을 올리며 턱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유태인 하나쯤에 그랑드 아르메 (대 육군- 프랑스 육군의 호칭)의 명예를 저버릴 수 없었던 참모본부도 그의 편이었다. 에스테라지는 법정에서 깨끗한 무죄 판결로 그 무고함(?)을 인증받는다. 하지만 기세등등한 에스테라지와 프랑스 군부 앞에 강력한 상대역이 등장한다.
에밀 졸라. 이 말도 안되는 꼬락서니에 그는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폭발하듯 써내린 그의 고발문은 일거에 수십 만 명이 읽었다. 동시에 그는 반유태 정서를 지닌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의 과녁이 된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재차 말합니다. 진실이 행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진실이 땅 속에 묻히면 끝내는 더 무섭게 폭발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 버릴 것입니다!” 졸라는 절규한다.
프랑스 육군 나리들. 드레퓌스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고 피카르 중령의 목숨을 건 항변을 무시하고 그를 군사기밀유출죄로 체포했다가 튀지니로 보내 버리고, 에밀 졸라마저 군 모독죄로 잡아들이려 했던 그들은 에밀 졸라의 고발 이후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안 에스테라지가 국외로 튀어 버렸음에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드레퓌스에게 “지금까지의 고생을 참작하여” 종신징역을 10년 형으로 감해주는 그야말로 대!!단한 관용을 베푼다. 드레퓌스의 기가 막히고 졸라의 코가 막혔으리라.
알프레드 드레퓌스. 독일과의 접경 지역에 살면서 군인으로서 프랑스에 봉사하리라 결심했던 유태인 장교, 그는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내 피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나는 외칠 것이오. 나는 죄가 없다고.” 그는 악마의 섬에서의 유형 생활을 꿋꿋이 버티며 군인으로서 누명과의 전쟁을 성실히 감내해 냈다.
예전에 일어난 사건이 쌍둥이처럼 후일 재구성되는 것을 평행이론이라고 한다던가. 19세기 말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은 일란성 쌍둥이 아니 흡사 분신처럼 20세기 말 한국에서 재연된다. 바로 ‘유서 대필 사건’이다. 갱 영화에서 자살을 강요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제 손으로 자신의 유서를 쓰는 모습도 못봤던 것일까. 대한민국의 꼴통 나으리들은 유서는 엉뚱한 이가 쓰고 죽기는 딴 사람이 죽는 기상천외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반유태주의에 미쳤던 프랑스 우익을 빼닮은 박홍이 잇따른 분신 뒤에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분위기를 잡았고, 국과수의 필적 전문가 김형영은 에스테라지같이 거짓말을 일삼으며 필적의 주인을 분신자살한 김기설의 친구 강기훈으로 지목한다. 에스테라지와 마찬가지로 저질이었던 이 인간은 후일 돈 받고 감정을 하다가 쇠고랑을 찬다.
김형영 국과수 문서감정팀장이 돈 받고 허위 감정을 해 왔던 사건에 대한 수사는 신속하게 시작해서 정확한 기간 내에 시침 뚝으로 끝났다. “돈은 받았으나 허위 감정은 없었다.”는 것. 그래서 그의 감정은 2심 3심 내내 명확한 증거로 채택됐다. 그 와중에 검찰은 한겨레신문이 감정을 의뢰한 사설 감정원을 압수수색했고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을 막았다. 프랑스 육군 나리들이 지하에서 보고 감탄해 마지않을 추진력이었다. 이 가공할 억지에 판결로서 마침표를 찍은 대법원 판사들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노무현 탄핵 때 4천만이 그 얼굴을 지켜봤던 윤영철이 그다. 판결문도 좀 컨닝해 두자. “적극적 정신적 방법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자살의 동인과 명분을 주어 자살을 도운 것이 명백하므로 자살방조죄가 성립된다"
이왕 이름 나온 김에 ‘그랑드 아르메’ 프랑스 육군의 꼴통들의 높은 콧대를 작신작신 부러뜨릴 대한 건아의 이름들을 들먹여 보자. 강신욱 사건 당시 서울 지검 강력부장.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유서 대필 재심 권고가 나오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넌센스다. 특정 단체가 자기 입맛에 맞는 결론을 얻으려고 하면 안 된다" 가히 “그 동안 고생했으니 종신 징역은 말고 10년만 살아라.”던 프랑스 육군 재판부의 발전적 환생이 아닌가. 당시 남기춘 검사. "당시 증거물로 제출되지도 않았던 김기설의 필적을 가져다 감정한 뒤 이것이 옛날 감정 결과와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수사와 재판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변한다. 에스테라지의 필적을 갖고 와서 이놈이 범인라고 부르짖는 피카르 중령에게 “입 닥쳐.”를 부르짖던 프랑스 장성은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더욱 우수한 인재로 거듭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드레퓌스 강기훈은 91년 당시 이렇게 피를 토하며 잡혀 갔었다. “무고한 개인이 권력의 힘에 의해 끝내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된다면 그런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신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이쯤 되면 평행 이론을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평행 이론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다른 것도 있다. 1906년 7월 12일 105년 전의 바로 오늘 드레퓌스 대위는 지긋지긋한 스파이 혐의로부터 자유로움을 프랑스 대법원으로부터 인정받는다. 그리고 열흘 뒤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소령 계급장과 레종 도뇌르 훈장을 휘감고 아들을 앞세운 무개차를 타고 부대 문을 나선다. 그 순간 수십만의 군중들은 환호했다. 그 군중 앞에서 드레퓌스가 외쳤다. “프랑스 만세! 진실 만세!” 얼마나 감동스러웠으랴. 하지만 아직 우리의 드레퓌스, 상상도 할 수 없는 죄목으로 인생의 황금기에 녹물을 부어야 했던 강기훈은 아직 대한민국 만세, 진실 만세로부터 멀다. 우리에게 에밀 졸라가 없어서일까. 피카르 중령이 없어서일까. 또 이렇게 보면 평행 이론은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보수라면,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자라면 강기훈 앞에서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가 겪은 고통에 공감해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스스로 맹세해야 한다. 강기훈은 한국의 수구 꼴통 세력이 만들어낸 극악한 장난의 희생양이었다. 드레퓌스는 폼나는 스파이라도 됐다. 하지만 강기훈은 친구가 죽는데 유서까지 대신 써 주는 미친 놈으로 20년을 보냈다. 1992년 7월 24일도 아울러 기억하자. 강기훈이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은 날이다. 우리는 언제쯤 되어야 대한민국 만세 진실 만세를 부르짖을 수 있을까. 언제쯤 되어야 자연인 강기훈에게 우리가 눈이 어두웠노라고, 아니 뒤집혔었노라고 국가가 사과하고 그 세월에 대해 보상할 수 있을까.
강기훈씨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의 무죄를 요구하며 작년 꺼 다시.
1906년 7월 12일 “드레퓌스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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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프랑스 정보 요원이 누군가가 독일 무관에게 보내는 기밀 문서를 훔쳐 내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정보국의 수사관들은 눈에 불을 켜고 스파이를 찾은 끝에 범인을 잡아냈는데 근거는 그 필체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체 말고도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는 빌어먹을 유태인이었다. 간첩과 필체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참모 본부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 증거를 공개할 수는 없다."면서 보다 확실한 증거의 공개를 요청하는 이들의 요청을 무시했다. 나아가 "이것은 너무나 민감한 군사 기밀이기 때문에 만일 공개할 경우 독일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협박했다. 드레퓌스 대위는 자신이 무죄임을 열심히 항변했지만 종신징역을 선고받고 훗날 ‘빠삐용’의 무대가 되는 악명 높은 기아나의 유형지로 끌려간다. 그 이후 드레퓌스의 생이 그려내는 드라마의 주요 배역들을 읊어 보자.
조르쥬 피카르 중령. 그는 스파이 사건을 조사 중 어처구니없는 진실을 접하게 된다. 드레퓌스는 죄가 없고 문제의 필체가 또 다른 장교 에스테라지 소령의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 그는 용감하게 에스테라지 체포와 드레퓌스의 재심을 상관에게 요구하지만 완전무결하게 거부당하고 튀니지로 좌천된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을 외부에 전파함으로써 프랑스의 양심을 지킨다. 이 사실은 변호사를 거쳐 상원 의원에게까지 흘러들어가지만 그들은 이 사건을 폭로할 용기가 없었다. 반유태주의 물결이 거센 상황에서 드레퓌스 편을 드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자살 행위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드레퓌스 구명에 나선다. 그 부인은 남편이 법정에 출된 증거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또 다시 드레퓌스의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리는 가운데 초지일관 프랑스 군부 편을 들던 극우 신문 르 마탱이 뜻밖의 사고를 친다. 드레퓌스의 죄상을 공개한답시고 일찍이 드레퓌스의 필적이라 규정되었던 문제의 서류를 대문짝만하게 실어버린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필체의 주인은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 진짜 간첩으로서 간첩질로 얻은 돈으로 과부나 꼬셔 재미를 보고 다니던 저질 인간. 르마탱에 자신의 필적이 공개됐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반유태인 선전에 열을 올리며 턱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유태인 하나쯤에 그랑드 아르메 (대 육군- 프랑스 육군의 호칭)의 명예를 저버릴 수 없었던 참모본부도 그의 편이었다. 에스테라지는 법정에서 깨끗한 무죄 판결로 그 무고함(?)을 인증받는다. 하지만 기세등등한 에스테라지와 프랑스 군부 앞에 강력한 상대역이 등장한다.
에밀 졸라. 이 말도 안되는 꼬락서니에 그는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폭발하듯 써내린 그의 고발문은 일거에 수십 만 명이 읽었다. 동시에 그는 반유태 정서를 지닌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의 과녁이 된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재차 말합니다. 진실이 행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진실이 땅 속에 묻히면 끝내는 더 무섭게 폭발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 버릴 것입니다!” 졸라는 절규한다.
프랑스 육군 나리들. 드레퓌스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고 피카르 중령의 목숨을 건 항변을 무시하고 그를 군사기밀유출죄로 체포했다가 튀지니로 보내 버리고, 에밀 졸라마저 군 모독죄로 잡아들이려 했던 그들은 에밀 졸라의 고발 이후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안 에스테라지가 국외로 튀어 버렸음에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드레퓌스에게 “지금까지의 고생을 참작하여” 종신징역을 10년 형으로 감해주는 그야말로 대!!단한 관용을 베푼다. 드레퓌스의 기가 막히고 졸라의 코가 막혔으리라.
알프레드 드레퓌스. 독일과의 접경 지역에 살면서 군인으로서 프랑스에 봉사하리라 결심했던 유태인 장교, 그는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내 피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나는 외칠 것이오. 나는 죄가 없다고.” 그는 악마의 섬에서의 유형 생활을 꿋꿋이 버티며 군인으로서 누명과의 전쟁을 성실히 감내해 냈다.
예전에 일어난 사건이 쌍둥이처럼 후일 재구성되는 것을 평행이론이라고 한다던가. 19세기 말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은 일란성 쌍둥이 아니 흡사 분신처럼 20세기 말 한국에서 재연된다. 바로 ‘유서 대필 사건’이다. 갱 영화에서 자살을 강요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제 손으로 자신의 유서를 쓰는 모습도 못봤던 것일까. 대한민국의 꼴통 나으리들은 유서는 엉뚱한 이가 쓰고 죽기는 딴 사람이 죽는 기상천외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반유태주의에 미쳤던 프랑스 우익을 빼닮은 박홍이 잇따른 분신 뒤에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분위기를 잡았고, 국과수의 필적 전문가 김형영은 에스테라지같이 거짓말을 일삼으며 필적의 주인을 분신자살한 김기설의 친구 강기훈으로 지목한다. 에스테라지와 마찬가지로 저질이었던 이 인간은 후일 돈 받고 감정을 하다가 쇠고랑을 찬다.
김형영 국과수 문서감정팀장이 돈 받고 허위 감정을 해 왔던 사건에 대한 수사는 신속하게 시작해서 정확한 기간 내에 시침 뚝으로 끝났다. “돈은 받았으나 허위 감정은 없었다.”는 것. 그래서 그의 감정은 2심 3심 내내 명확한 증거로 채택됐다. 그 와중에 검찰은 한겨레신문이 감정을 의뢰한 사설 감정원을 압수수색했고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을 막았다. 프랑스 육군 나리들이 지하에서 보고 감탄해 마지않을 추진력이었다. 이 가공할 억지에 판결로서 마침표를 찍은 대법원 판사들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노무현 탄핵 때 4천만이 그 얼굴을 지켜봤던 윤영철이 그다. 판결문도 좀 컨닝해 두자. “적극적 정신적 방법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자살의 동인과 명분을 주어 자살을 도운 것이 명백하므로 자살방조죄가 성립된다"
이왕 이름 나온 김에 ‘그랑드 아르메’ 프랑스 육군의 꼴통들의 높은 콧대를 작신작신 부러뜨릴 대한 건아의 이름들을 들먹여 보자. 강신욱 사건 당시 서울 지검 강력부장.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유서 대필 재심 권고가 나오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넌센스다. 특정 단체가 자기 입맛에 맞는 결론을 얻으려고 하면 안 된다" 가히 “그 동안 고생했으니 종신 징역은 말고 10년만 살아라.”던 프랑스 육군 재판부의 발전적 환생이 아닌가. 당시 남기춘 검사. "당시 증거물로 제출되지도 않았던 김기설의 필적을 가져다 감정한 뒤 이것이 옛날 감정 결과와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수사와 재판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변한다. 에스테라지의 필적을 갖고 와서 이놈이 범인라고 부르짖는 피카르 중령에게 “입 닥쳐.”를 부르짖던 프랑스 장성은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더욱 우수한 인재로 거듭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드레퓌스 강기훈은 91년 당시 이렇게 피를 토하며 잡혀 갔었다. “무고한 개인이 권력의 힘에 의해 끝내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된다면 그런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신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이쯤 되면 평행 이론을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평행 이론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다른 것도 있다. 1906년 7월 12일 105년 전의 바로 오늘 드레퓌스 대위는 지긋지긋한 스파이 혐의로부터 자유로움을 프랑스 대법원으로부터 인정받는다. 그리고 열흘 뒤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소령 계급장과 레종 도뇌르 훈장을 휘감고 아들을 앞세운 무개차를 타고 부대 문을 나선다. 그 순간 수십만의 군중들은 환호했다. 그 군중 앞에서 드레퓌스가 외쳤다. “프랑스 만세! 진실 만세!” 얼마나 감동스러웠으랴. 하지만 아직 우리의 드레퓌스, 상상도 할 수 없는 죄목으로 인생의 황금기에 녹물을 부어야 했던 강기훈은 아직 대한민국 만세, 진실 만세로부터 멀다. 우리에게 에밀 졸라가 없어서일까. 피카르 중령이 없어서일까. 또 이렇게 보면 평행 이론은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보수라면,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자라면 강기훈 앞에서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가 겪은 고통에 공감해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스스로 맹세해야 한다. 강기훈은 한국의 수구 꼴통 세력이 만들어낸 극악한 장난의 희생양이었다. 드레퓌스는 폼나는 스파이라도 됐다. 하지만 강기훈은 친구가 죽는데 유서까지 대신 써 주는 미친 놈으로 20년을 보냈다. 1992년 7월 24일도 아울러 기억하자. 강기훈이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은 날이다. 우리는 언제쯤 되어야 대한민국 만세 진실 만세를 부르짖을 수 있을까. 언제쯤 되어야 자연인 강기훈에게 우리가 눈이 어두웠노라고, 아니 뒤집혔었노라고 국가가 사과하고 그 세월에 대해 보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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