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6년 7월 10일 구보 박태원 사망
나의 고등학교 국어 시간은 이상했다. 현대문학사를 배우면서 KAPF는 시험에 자주 나올만큼 중요한 문학단체였는데, 정작 KAPF의 문학 작품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잃어버린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한때 KAPF의 주도자였던 박영희의 회심 고백은 마르고 닳도록 인용되어 ‘박영희’는 아는데 그의 작품은 절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구인회’라는 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분명히 아홉 명의 문인들로 구성된 모임일 텐데 거기서 필요한 이름은 이상, 이효석, 김유정, 유치진 정도였다. 그 외 다른 이름들은 공부할 필요도 없었다. 시험에 안나오니까.
구인회는 그 이름대로 아홉 명의 회원은 지켜졌지만, 그 아홉 명이 꾸준했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발기인이었던 이종명, 김유영을 비롯해서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김기림이 구인회였고 이후 이종명 김유영, 그리고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효석이 탈퇴했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다. 그리고 그 뒤에 두 명이 탈퇴하면서 김유정이 처음으로 얼굴을 디밀게 된다. 원래 이 구인회는 경향문학 즉 요즘 말로 하면 참여 문학, 또는 이데올로기 문학에 반대하여 순수문학(?)을 주창하는 모임이었다. 그리고 구인회가 단체로서 영향을 미친 바는 적으나, 그 구성원 개개인이 쟁쟁한 문인들이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위치는 지대하다 하겠다.
구보 박태원도 그 중의 하나였다. 1930년 <신생>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는 반계몽, 반계급주의 입장에 서서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등의 소설로 명성을 얻는다. 이때 그 소설에 삽화를 그려 준 건 <오감도>의 작가 이상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박태원은 모더니즘적인 입장의 작가였고, 그 파격적인 문체로 이른바 속물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그려냈지만 계급적 각성이나 투쟁의 호소와는 거리가 있는 문학 세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과 분단의 소용돌이는 이 문재(文才)의 인생 또한 휘저어 놓았다.
그는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보도연맹원까지 됐다. 보도연맹원이란 “좌익활동을 했지만 그 과오를 늬우친 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조직이었지만 전쟁이 터진 뒤 그 조직원 명부가 그대로 학살자 리스트로 뒤바뀐 바로 그 이름이다. 하지만 워낙 빨리 서울이 함락된 터라 박태원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2남 3녀와 처를 놔두고 단신 월북한다. 딸 하나가 아버지의 뒤를 따라 북으로 갔지만 남은 가족들의 처지는 참담했다. 그 처는 인민군복을 빨래한 죄로 징역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 되는 남로당 숙청의 피바람은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대학교수로 잘 지냈지만 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4년간 평남 강서 지방의 한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는데 이때 영양실조로 인해 그 시력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입는다. 복권된 뒤 북한의 대표적 역사 소설인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등을 저술하는데 이미 이 2부를 쓸 때 그의 눈은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와 있었다. “이 병은 불치의 병일 뿐 아니라 오래지 않아 눈이 멀게 될 무서운 병이었다. 날이 갈수록 시야는 점점 좁아져 글자 한자를 보려고 해도 확대경을 가져와 대야만 했다. 그는 말없이 캄캄한 어둠속에 잠겨 또 밤이 오는 것도 모르면서 절망속에서 모대기었다(시달렸다). (부인 권영희) 거기다가 뇌졸중까지 찾아왔다. 가히 작가로서는 사형 선고였다.
하지만 무척이나 댄디했고 시니컬했던 구보 박태원은 오히려 그런 형편에서 그가 지녔던 문학혼의 최대치를 발휘한다. 반신불수 상황에서도 원고지 모양의 틀에서 손으로 작업하다가 그마저 안되자 구술로, 구술마저 안되었을 때에는 부인 권영희가 대신 써서 완성한 것이 <갑오농민전쟁>이다. 부인 권영희는 구인회 멤버 중의 하나인 정인택의 부인이었는데 정인택이 죽은 후 박태원의 옆에 있게 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 그 지난한 받아쓰기 과정에서 청력을 잃었다 한다.
그렇게 필사적인 문학 작품을 남긴 그가 1986년 7월 10일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가 남긴 후손들은 2006년 6월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특별상봉에서 마주하게 된다. 아버지를 따라 월북했던 큰딸 박설영이 남한에서 사는 남동생 재영과 만난 것이다.
이날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천변풍경’ 등으로 1930년대 문단을 풍미했던 구보 박태원씨(1909~86)의 둘째아들 재영씨가 초등학교 3학년때 헤어진 북측의 큰누나 설영씨(70)와 첫 행사인 단체상봉에서 해후했다. 그때 화제에 오른 인물이 영화 <괴물>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이었다. 그는 남한에 남은 박태원의 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북한의 설영씨는 자신의 조카가 이름을 드날리는 영화 감독이라는 것에 놀라와했고 그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마 그녀가 생전에 그 영화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자리에 박태원의 혼령이라도 있었다면 남과 북의 후손들의 어깨를 잡고 어여들 인사하거라 어여들..... 하며 혼자 흥겨워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의붓딸, 즉 권영희의 딸이자 친구 정인택의 딸이었던 정태은이 남긴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 중 한 대목에 따르면 박태원은 ‘주체 48년’(1959)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하니까. “일영아!, 재영아!, 소영아!, 은영아! 어디에 있느냐, 그리운 아이들아 ! 이름이라도 불러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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