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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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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6.12 한국형(?) 축구 영광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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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3년 6월 12일 한국형(?) 축구 세계 4강에 들다

1983년 즈음에 한국 축구팀이 세계 수준의 대회에서 8강 이상의 성적을 올린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길 바라렴” 하는 악담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54넌 스위스 월드컵에 나가 헝가리에게 9대0으로 짓밟히고 이후, 동경 올림픽에 출전했다가 이집트에게 10대 0으로 망신을 당한 이후, 한국 축구는 망신을 당할 본선 무대에 나설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그래도 혹시나? 티브이 앞으로 집결했다가 역시나 하며 자리를 박차기를 반복하고 있던 세월이었다. 세계의 벽이 높은지 낮은지 댈 것도 없이 아시아의 벽조차 안나푸르나였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한국 청소년 축구팀이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 출전하여 예선을 통과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약간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 그 출전은 어부지리 출전이었다. 원래 한국팀은 아시아 예선에서 북한에 패했고, 북한이 아시아의 대표선수로 출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중동 오일 달러의 위력으로 의심되는 심판의 편파 판정을 참지 못한 북한 팀 선수들과 임원들이 심판에게 ‘혁명적 본때’를 보여 준 사건으로 인해 북한을 대표하는 모든 축구팀이 2년간 국제 경기 출장정지를 당하는 바람에 대타 출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오랜 숙적 호주와, 세상에나 개최국 멕시코 (이 경기 정말 명승부였다)를 메다꽂고 당당 8강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1983년 6월 12일 벌어진 8강전의 상대는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였다. 우루과이! 우루과이가 어디라고 우리가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존재였던가, 7년 뒤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뿐 아니라 세계적인 스타로 이름 드높을 루벤 소사도 바로 그 팀에서 뛰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은 그야말로 신들린 듯이 뛰었다. 전반전이 얼마간 흘러가면서 우루과이 선수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고 한국 선수들의 몸에 넘치는 자신감이 화면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우루과이 문전을 위협하던 김종부가 통렬한 슛을 날렸다. 골키퍼가 가장 막기 어렵다는 무릎 아래 골문 모서리로 빨려 들어가던 공을 우루과이 골키퍼가 동물 같은 반사 신경을 발휘하여 펀칭해 냈을 때는 온 동네에 아이고 소리가 드높았지만 잠시 뒤 천둥 같은 함성이 작년의 촛불처럼 일렁였다. 멋진 다이빙 펀칭의 주인공이 우루과이 골키퍼가 아니라 수비수였던 것이다. 페널티킥이었다. 하지만 주장 노인우는 이 천금의 기회를 실축하고 만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했던 안정환은 “미친 듯이” 뛰었다고 술회한 바 있는데 83년의 노인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페널티킥을 못 넣은 그는 짖궂은 카메라에 계속 잡혔고 그때마다 푸르륵거리는 황소처럼 우루과이 선수들에게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그가 빚을 갚을 때가 왔다. 후반전이 시작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격적으로 나오던 우루과이 선수들 사이로 노인우가 우루과이 선수의 가랑이 사이를 뚫고 깊숙한 패스를 찔러 넣었고 그것이 신연호 선수에게 노마크 찬스로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신연호가 마침내 골을 넣었다. 요즘은 멋있게 “골!!!!~”을 외치지만 그때는 아나운서도 즐겨 “꼬링”이라고 발음했었다. 꼬링의 절규가 태평양을 건너올 듯 아나운서는 꼬링을 외쳤다. 아니 울부짖었다.


하지만 우루과이가 그렇게 쉽게 주저앉을 리는 없었다. 오히려 한 골을 먹은 후 우루과이는 더욱 공격적으로 나왔고 한국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남미 특유의 개인기는 눈에 띄게 둔해진 한국의 스피드를 눌렀고 결국 한 골을 먹고 말았다. 경기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실로 투명한 경기였다.


투명함의 의미는 이렇다. 구만 팔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경기이며, 위성을 통해 14인치 티브이로 전달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뼈와 뼈 부딪는 소리, 이따금 내지르는 독려의 고함까지도 유채화처럼 진하고 두텁게 펼쳐졌다.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고 보이지 않는 구석도 볼 수 있었던 경기였다. 우루과이가 개인돌파를 시도하면 한국은 패스웍으로 우루과이 수비를 위협했다. 연장전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 한국 축구사 사상 최대의 비운의 스트라이커 김종부가 골 라인을 치고 들어가다가 크로스를 올렸고 이것이 문전을 쇄도하던 신연호의 발에 맞고 우루과이 골키퍼가 처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데굴데굴 우루과이 골 네트의 품에 안겼다. 이날의 결승골이었다. 그리고 한국 축구는 그 역사를 새로 썼다. 30년 동안 월드컵 본선도 밟지 못한 나라가 세계 4강을 ‘쟁취’한 것이다.

이때 박종환 감독과 18인의 청소년 축구팀에는 ‘붉은 악마’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빨갱이가 됩시다’ (Be the Reds)의 붉은 악마의 유래가 된다. 이들이 보여준 빠르게 돌아가는 숏패스와 강인한 정신력은 ‘한국형 축구’라는 단어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선전분투와는 별도로 ‘한국형 축구’는 그 이후 그리 큰 빛을 발하지 못한다.


‘독사’라는 별명에서 보듯 무시무시한 스파르타 훈련을 시켰고 주먹질 (당시 훈련 과정을 촬영하던 카메라 앞에서도 박종환 감독은 선수에게 강력한 군밤을 매겼다)도 마다하지 않았던 박종환 감독의 카리스마는 때로 유효했지만 그가 대표팀 감독이 됐을 때, 최순호, 이태호, 변병주 등 정예 선수들이 “이럴려면 안한다.”고 반발하며 팀을 이탈케 하는 주요 원인이 됐던 것이다. 또 숏패스 위주의 ‘한국형’ 축구는 “길목만 지키면 자멸한다.”는 외국 감독의 비아냥 아래 ‘로봇 축구’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강력한 지도력과 물불을 가리지 않는 훈련을 통해 단기적 성과를 이뤄 내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 성과를 계승하고 진보시키고 체화하는 데에는 다른 패러다임의 리더쉽 또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한때의 성과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을 뿐이라는 것을 83년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의 붉은 악마들은 생생하게 보여 주게 된다. 차범근의 대를 이을 것이라는 대형 스트라이커 김종부가 자신의 의사와 학교측의 의사, 그리고 재벌 축구팀간의 각축 와중에 선수 자격마저 일정 기간 박탈당한 채 죽을 쑤고 지내다가 허망하게 은퇴해야 했던 것은 그 단면일 뿐이다. 결국 ‘한국형 축구’란 ‘한국형 민주주의’처럼 실체는 없으되 위세는 요란한 허명의 하나였다.

그래도 1983년 6월 12일 한국 청소년 축구팀이 보여 준 투혼은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생이었던 골키퍼 이문영은 공중볼을 잡다가 충돌하여 공을 안은 채 골라인 안쪽으로 넘어졌는데 벌떡 일어나 공을 골 에리어에 갖다 놓은 뒤에야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스스로 골라인 안쪽에 넘어졌다는 사실을 안 순간 그는 모든 고통을 잊고 발딱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역전골을 넣었을 때 골을 넣은 신연호에게 달려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골 세레모니조차 어렵도록 지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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