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2000년 6월 13일 여기는 평양입니다.
그 날 아침 꼭두새벽부터 나는 분주했다. 한 순대집 촬영을 하는데 순대 속 만드는 걸 찍으려면 일찌감치 설쳐대야 했기 때문이다. 그 순대집 이름은 ‘알래스카 순대’였다. 아마 지금 을지로 4가쯤에 남아 있을 것이다. 순대집에 웬 알래스카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이 많을 텐데, 무엇이 유래였는지는 몰라도 각 도에 미국의 지명을 붙여 별칭으로 부르는 때가 있었는데... 그때 함경도가 알래스카로 불리웠다. 평안도는 텍사스였다. 그래서 5.16 후 경상도 군 인맥들이 이북 출신의 군 인맥들을 제거할 때 ‘알래스카 토벌’이니 ‘텍사스 토벌’이니 부르곤 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경상도는 과연 뭐라고 불리웠을까? 요즘 경상도 사람들 하는 거 보면 60년대 앨라배마나 미시시피 주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각설하고, 그렇게 일찍 서둘러 도착한 순대집에서는 게으른 PD 기다려주지 않은 채 속만들기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정작 알래스카 순대, 즉 함경도 순대를 만드는 건 꽤나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 쓰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조금 의아해서 물으니 “여기서 일한 게 30년인데 전라도 사람이라고 함경도 순대 못만드나?” 라는 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허기사 종종 이런 일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냉면집 을밀대의 주인장은 우렁우렁한 경상도 사투리로 나를 당혹케 하셨었다. “피난 나와서 대구서 컸는데 우얍니까. 고향은 평양이지만도.”
하지만 알래스카 순대에서 음식 만드는 분들은 주인이 아니었다. 음식은 손 놓고 물러났지만 그 집의 주인은 좀 이따 점잖게 등장하셨다. 혼자가 아니었다.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였다. 그리고 그분들 모두는 화사한 꽃단장을 하고 화장까지 흐드러지게 하셨다. 말투를 보아하니 이북 분들이었다.
왜들 이렇게 가꾸고들 오셨냐고 호들갑을 떨며 물으니 주인 할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꽃단장하고 왔지.”“에고 뭐 방송 출연한다고 꽃단장까지......하하”“예끼 여보쇼. 방송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오늘 대통령 평양 가는 날이잖아. 간만에 이북 친구들 보기로 했다구.”
그날은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을 떠나 역사적인 평양 방문길에 나선 날이었다. 아차 그렇구나. 아침에 뉴스를 질리도록 보고 나왔지만 일하는 가운데 나는 정말로 깜박 그 날을 잊고 있었다. 무슨 빅스타 여배우가 포토라인에 서듯, 아주 잠깐 촬영에 응해 준 뒤 주인 할머니와 그 친구들은 TV삼매경에 빠져 버렸다. 나도
하릴없이 TV를 지켜볼 밖에 없었다.
TV 화면에는 이미 평양 순안공항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탄 특별기의 기체도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뭐라뭐라 계속 말했지만 식당 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귓전에는 그저 흘러내릴 뿐 모든 관심은 비행기 문에 쏠려 있었다. 이윽고 김대중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작은 탄성이 이는 가운데 대통령은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감회를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면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트랩 아래 북녘 땅을 돌아봤다.
여기는 북한이었다. 전쟁 이후 처음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에 도착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침묵의 감회는 ‘오욕의 세월’을 그 어떤 웅변보다도 뜨겁게 사람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이 트랩 아래에 나타났다. 김정일이다! 그는 이런 직설적인 환영사를 하게 된다. “대통령께서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평양에 오셨습니다. 전방에서는 군인들이 총부리를 맞대고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나갈 판인데, 대통령께서는 인민군 명예의장대 사열까지 받으셨습니다. 이건 보통 모순이 아닙니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께서 왜 방북했는지, 김 위원장이 왜 승낙했는지 의문들이 대단합니다. 2박 3일 동안 우리가 대답해줘야 합니다."
마침내 트랩을 내려온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았을 때 식당에선 작은 박수 소리와 순간적인 흐느낌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았던 롯데 호텔에 설치된 프레스 센터에서는 천 명이 넘는 내외신 기자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근처 인쇄 골목에서도 환호까지는 분명히 아니었으나 벅찬 가슴이 전해지는 박수 소리가 들려 왔다.
식당 안 할머니들은 그제야 TV삼매경에서 벗어나서 대화를 시작했다. “저기 순안이 내 고향이야,”라고 말문을 연 할머니 한 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중매선 사람이 김일성 아버지야”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는 1894년생. 그가 내 앞에 앉은 할머니의 부모를 맺어 줄 때 그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아마 그 중신 선 다음 술 받아먹을 때 김일성 주석도 옷자락 잡고 칭얼대고 있진 않았을까. 혹시 김형직이 조직했다는 조선광복회 동료는 아니었을까. 어쨌건 신기했다. 김일성의 아버지와 그렇게 친숙한 관계였던 이가 내 앞에 있다니. 그런데 친구 할머니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야 그 얘기 나 오늘 처음 듣는데? 너 이때껀 그런 얘기 일절 없었지 않아?”“뭔 자랑이라고 그 얘기 하간. 오늘 같은 날이니까 하는 거지.”그렇게 별 것도 아닌 이야기도 또 어떻게 엮일지 몰랐던 세월, 가슴 속 깊이 숨겨두어야 했던 시절이 그날로 끝났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그 할머니는 자신이 들었던 김형직의 이야기, 강반석(김일성 주석의 어머니)의 기억까지도 신나게 허물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오후 나절이 됐을 때 주인 할머니가 주방에 들었다. 할머니는 벽에 걸린 대꼬챙이로 순대를 푹푹 찌르고 있었다. “이렇게 숨구멍을 내야 순대가 잘 삶겨요. 순대도 답답하면 복장이 터져서 풀어진다고.” 수십 년간 그런 숨구멍도 없이, 부모 형제 피붙이들과 완벽히 차단된 가마솥 안에서 터져나는 속을 다스려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는 맘 편히 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보다 하고 가슴 벅찬 날이 2000년 6월 13일이었지만, 그 숨구멍은 잔인하게 틀어막혔다. 그로부터 12년. 아마도 그날 알래스카 순대집을 메웠던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의 백발 노인들은 그 절반 이상이 터져나는 복장을 안으로 삭이며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왜 우리는 순대를 삶는 재주조차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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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13일 여기는 평양입니다.
그 날 아침 꼭두새벽부터 나는 분주했다. 한 순대집 촬영을 하는데 순대 속 만드는 걸 찍으려면 일찌감치 설쳐대야 했기 때문이다. 그 순대집 이름은 ‘알래스카 순대’였다. 아마 지금 을지로 4가쯤에 남아 있을 것이다. 순대집에 웬 알래스카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이 많을 텐데, 무엇이 유래였는지는 몰라도 각 도에 미국의 지명을 붙여 별칭으로 부르는 때가 있었는데... 그때 함경도가 알래스카로 불리웠다. 평안도는 텍사스였다. 그래서 5.16 후 경상도 군 인맥들이 이북 출신의 군 인맥들을 제거할 때 ‘알래스카 토벌’이니 ‘텍사스 토벌’이니 부르곤 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경상도는 과연 뭐라고 불리웠을까? 요즘 경상도 사람들 하는 거 보면 60년대 앨라배마나 미시시피 주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각설하고, 그렇게 일찍 서둘러 도착한 순대집에서는 게으른 PD 기다려주지 않은 채 속만들기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정작 알래스카 순대, 즉 함경도 순대를 만드는 건 꽤나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 쓰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조금 의아해서 물으니 “여기서 일한 게 30년인데 전라도 사람이라고 함경도 순대 못만드나?” 라는 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허기사 종종 이런 일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냉면집 을밀대의 주인장은 우렁우렁한 경상도 사투리로 나를 당혹케 하셨었다. “피난 나와서 대구서 컸는데 우얍니까. 고향은 평양이지만도.”
하지만 알래스카 순대에서 음식 만드는 분들은 주인이 아니었다. 음식은 손 놓고 물러났지만 그 집의 주인은 좀 이따 점잖게 등장하셨다. 혼자가 아니었다.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였다. 그리고 그분들 모두는 화사한 꽃단장을 하고 화장까지 흐드러지게 하셨다. 말투를 보아하니 이북 분들이었다.
왜들 이렇게 가꾸고들 오셨냐고 호들갑을 떨며 물으니 주인 할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꽃단장하고 왔지.”“에고 뭐 방송 출연한다고 꽃단장까지......하하”“예끼 여보쇼. 방송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오늘 대통령 평양 가는 날이잖아. 간만에 이북 친구들 보기로 했다구.”
그날은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을 떠나 역사적인 평양 방문길에 나선 날이었다. 아차 그렇구나. 아침에 뉴스를 질리도록 보고 나왔지만 일하는 가운데 나는 정말로 깜박 그 날을 잊고 있었다. 무슨 빅스타 여배우가 포토라인에 서듯, 아주 잠깐 촬영에 응해 준 뒤 주인 할머니와 그 친구들은 TV삼매경에 빠져 버렸다. 나도
하릴없이 TV를 지켜볼 밖에 없었다.
TV 화면에는 이미 평양 순안공항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탄 특별기의 기체도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뭐라뭐라 계속 말했지만 식당 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귓전에는 그저 흘러내릴 뿐 모든 관심은 비행기 문에 쏠려 있었다. 이윽고 김대중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작은 탄성이 이는 가운데 대통령은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감회를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면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트랩 아래 북녘 땅을 돌아봤다.
여기는 북한이었다. 전쟁 이후 처음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에 도착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침묵의 감회는 ‘오욕의 세월’을 그 어떤 웅변보다도 뜨겁게 사람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이 트랩 아래에 나타났다. 김정일이다! 그는 이런 직설적인 환영사를 하게 된다. “대통령께서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평양에 오셨습니다. 전방에서는 군인들이 총부리를 맞대고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나갈 판인데, 대통령께서는 인민군 명예의장대 사열까지 받으셨습니다. 이건 보통 모순이 아닙니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께서 왜 방북했는지, 김 위원장이 왜 승낙했는지 의문들이 대단합니다. 2박 3일 동안 우리가 대답해줘야 합니다."
마침내 트랩을 내려온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았을 때 식당에선 작은 박수 소리와 순간적인 흐느낌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았던 롯데 호텔에 설치된 프레스 센터에서는 천 명이 넘는 내외신 기자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근처 인쇄 골목에서도 환호까지는 분명히 아니었으나 벅찬 가슴이 전해지는 박수 소리가 들려 왔다.
식당 안 할머니들은 그제야 TV삼매경에서 벗어나서 대화를 시작했다. “저기 순안이 내 고향이야,”라고 말문을 연 할머니 한 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중매선 사람이 김일성 아버지야”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는 1894년생. 그가 내 앞에 앉은 할머니의 부모를 맺어 줄 때 그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아마 그 중신 선 다음 술 받아먹을 때 김일성 주석도 옷자락 잡고 칭얼대고 있진 않았을까. 혹시 김형직이 조직했다는 조선광복회 동료는 아니었을까. 어쨌건 신기했다. 김일성의 아버지와 그렇게 친숙한 관계였던 이가 내 앞에 있다니. 그런데 친구 할머니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야 그 얘기 나 오늘 처음 듣는데? 너 이때껀 그런 얘기 일절 없었지 않아?”“뭔 자랑이라고 그 얘기 하간. 오늘 같은 날이니까 하는 거지.”그렇게 별 것도 아닌 이야기도 또 어떻게 엮일지 몰랐던 세월, 가슴 속 깊이 숨겨두어야 했던 시절이 그날로 끝났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그 할머니는 자신이 들었던 김형직의 이야기, 강반석(김일성 주석의 어머니)의 기억까지도 신나게 허물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오후 나절이 됐을 때 주인 할머니가 주방에 들었다. 할머니는 벽에 걸린 대꼬챙이로 순대를 푹푹 찌르고 있었다. “이렇게 숨구멍을 내야 순대가 잘 삶겨요. 순대도 답답하면 복장이 터져서 풀어진다고.” 수십 년간 그런 숨구멍도 없이, 부모 형제 피붙이들과 완벽히 차단된 가마솥 안에서 터져나는 속을 다스려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는 맘 편히 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보다 하고 가슴 벅찬 날이 2000년 6월 13일이었지만, 그 숨구멍은 잔인하게 틀어막혔다. 그로부터 12년. 아마도 그날 알래스카 순대집을 메웠던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의 백발 노인들은 그 절반 이상이 터져나는 복장을 안으로 삭이며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왜 우리는 순대를 삶는 재주조차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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