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6월 11일 가스배달원의 실종
대망의 아시안게임이 코앞에 다가와 있던 1986년 6월 11일 인천 모처에서 부리부리한.눈매의 대공계 형사들이 누군가를 잡아챘다. 평범한 가스배달원 신호수는 도대체 대공계 형사들이 왜 나를 잡으러 왔는지 영문을 몰라했지만 서울 서부경찰서까지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이유는 그가 살던 이전 집의 장판 밑에서 불온삐라가 대다수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새로 이사온 사람이 도배하다가 그것들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해서 113을 돌려버린 것이다
그러나 신호수는 불온분자나 이른바 의식화학생과는 거리가 멀어도 삼수갑산만큼 먼 평범하고 뭉툭한 가스배달원이었다. 그리고 그 삐라를 모으도록 장려한 것은 그가 방위병으로 복무했던 군부대였다. 부대에서는 불온삐라를 모아오면 특별휴가 제도를 주는 제도를 시행 중이었던 것이다. 즉 그 삐라들은 휴가 타먹고 남은 잔여물들이었다. 쓰레기를 치우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뿐 대공혐의점은 없었다. 경찰도 그를 인정했다.
"세 시간만에 훈방했다니까요. 부대 동료가 와서 증언을 하는데 뭐 딱 아니더라고. 애가 길을 몰라서 헤매는 것 같아서 서울역까지 바래다 주기까지 했어요 인천 가라고."
그런데 이 말에는 많은 거짓말이 숨어 있었다. 일단 동료 경찰이 신호수가 세시간만에 훈방된 게 아니라 서부서에 3일 동안 머물러 있던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던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그 일대에 오래 살았던 신호수가 서울역을 찾아 헤맸다는 이야기였다. 대한민국 경찰이 연행자 에스코트할만큼 친절한 시대도 아니었고 말이다. 6월 11일 연행된 뒤 당일 풀려났건 며칠 조사받았건 불온분자는 전혀 아니었던 노동자 신호수는 자신의 일터로 돌아오지 않았다. 천만뜻밖 엉뚱한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서울에서 천리 밖 그의 고향인.여수 돌산의 대미산의 한 동굴에서 목을 맨 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결론내렸지만 그것이 자살이라면 풀어야 할 미스테리는 버뮤다 삼각지대의 그것보다 더 많았다. 경찰은 "신호수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 끝을 묶은 후 동굴 천장 부근의 바위틈에 끼워 빠지지 않게 하고 목을 매 자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최초 목격자였던 당시 방위병의 말에 따르면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사건 직후) 현장 검증에 참석하라고 하여 경찰들과 함께 동굴에 갔다. 그러면서 경찰이 나에게 발견 당시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이후 경찰들은 내가 목격한 것처럼 신호수의 자살 자세를 재현하고자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실패의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동굴 천정에 접근하는 일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다리를 대거나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근접할 수 없는 곳에 신호수는 하늘로 날아오른 듯 접근을 했고 자신의 옷을 벗어서 바위틈에 묶는 수고까지 한 후 목을 맨 것이다. 서울에서 여수까지 그 천리길에 목을 맬 나무 하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구태여 고향의 산자락에 와서 서커스하듯이 동굴로 기어올라가서 목을 매야 했을까.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의 허리띠였다. 그 허리띠는 신호수의 몸과 팔을 묶고 있었다. 행여나 자신이 목을 매단 뒤에도 두 손이 자유로와서 목 아래 손가락을 넣고 숨을 연장할까 두려웠던 것일까, 인류가 목매달아 자살하는 방법을 깨달은 이후 스스로 결박을 하고서 목숨을 끊는 예는 들어 본 적도 없거니와 그 좁은 동굴 안에서 허리띠 풀어 자신의 몸과 팔을 결박한 남자가 어떻게 목을 매어 죽는 아크로바틱한 재주를 부린단 말인가. 하지만 자살이었다. 방위 마치고 평범한 가스배달원 노릇으로 생계를 유지해가던 한 젊은이는 급작스런 연행 뒤 행방을 감추었다가 마치 귀신처럼 사람들 앞에 발가벗은 시체로 돌아왔다. 자살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군대에서 시체로 돌아오고, 엄마하고 농담하며 웃던 청년이 다음날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쌕쌕거리던 날이 일상이던 시절이다. 그 시대에 신호수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끌려갔고 짓밟히고 얼러지는 가운데 목숨을 잃거나 정신줄을 놓거나 안팎으로 곪아서 진물을 흘리면서 시들어 갔다. 지금도 전 재산 29만원인 그 시대의 최고 책임자가 거액의 육사 발전 기금을 내놓고 그 댓가(?)로 대한민국 육군 예비 장교들로부터 사열을 받는 세상을 신호수가 지켜본다면 그는 어떤 심경이 될까.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수십 년 동안 억울함을 호소하며 진상을 밝혀 줄 것을 애끓게 호소하는 그 아버지가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재연하며 어떻게 사람이 이 상태에서 목을 맬 수 있냐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서 이른바 열사도 하다못해 운동권 동지도 아니었던 평범한 노동자 신호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진은 아버지가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재연하며 그 '자살'의 불합리성을 호소하는 장면.
tag : 산하의오역
대망의 아시안게임이 코앞에 다가와 있던 1986년 6월 11일 인천 모처에서 부리부리한.눈매의 대공계 형사들이 누군가를 잡아챘다. 평범한 가스배달원 신호수는 도대체 대공계 형사들이 왜 나를 잡으러 왔는지 영문을 몰라했지만 서울 서부경찰서까지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이유는 그가 살던 이전 집의 장판 밑에서 불온삐라가 대다수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새로 이사온 사람이 도배하다가 그것들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해서 113을 돌려버린 것이다
그러나 신호수는 불온분자나 이른바 의식화학생과는 거리가 멀어도 삼수갑산만큼 먼 평범하고 뭉툭한 가스배달원이었다. 그리고 그 삐라를 모으도록 장려한 것은 그가 방위병으로 복무했던 군부대였다. 부대에서는 불온삐라를 모아오면 특별휴가 제도를 주는 제도를 시행 중이었던 것이다. 즉 그 삐라들은 휴가 타먹고 남은 잔여물들이었다. 쓰레기를 치우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뿐 대공혐의점은 없었다. 경찰도 그를 인정했다.
"세 시간만에 훈방했다니까요. 부대 동료가 와서 증언을 하는데 뭐 딱 아니더라고. 애가 길을 몰라서 헤매는 것 같아서 서울역까지 바래다 주기까지 했어요 인천 가라고."
그런데 이 말에는 많은 거짓말이 숨어 있었다. 일단 동료 경찰이 신호수가 세시간만에 훈방된 게 아니라 서부서에 3일 동안 머물러 있던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던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그 일대에 오래 살았던 신호수가 서울역을 찾아 헤맸다는 이야기였다. 대한민국 경찰이 연행자 에스코트할만큼 친절한 시대도 아니었고 말이다. 6월 11일 연행된 뒤 당일 풀려났건 며칠 조사받았건 불온분자는 전혀 아니었던 노동자 신호수는 자신의 일터로 돌아오지 않았다. 천만뜻밖 엉뚱한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서울에서 천리 밖 그의 고향인.여수 돌산의 대미산의 한 동굴에서 목을 맨 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결론내렸지만 그것이 자살이라면 풀어야 할 미스테리는 버뮤다 삼각지대의 그것보다 더 많았다. 경찰은 "신호수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 끝을 묶은 후 동굴 천장 부근의 바위틈에 끼워 빠지지 않게 하고 목을 매 자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최초 목격자였던 당시 방위병의 말에 따르면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사건 직후) 현장 검증에 참석하라고 하여 경찰들과 함께 동굴에 갔다. 그러면서 경찰이 나에게 발견 당시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이후 경찰들은 내가 목격한 것처럼 신호수의 자살 자세를 재현하고자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실패의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동굴 천정에 접근하는 일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다리를 대거나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근접할 수 없는 곳에 신호수는 하늘로 날아오른 듯 접근을 했고 자신의 옷을 벗어서 바위틈에 묶는 수고까지 한 후 목을 맨 것이다. 서울에서 여수까지 그 천리길에 목을 맬 나무 하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구태여 고향의 산자락에 와서 서커스하듯이 동굴로 기어올라가서 목을 매야 했을까.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의 허리띠였다. 그 허리띠는 신호수의 몸과 팔을 묶고 있었다. 행여나 자신이 목을 매단 뒤에도 두 손이 자유로와서 목 아래 손가락을 넣고 숨을 연장할까 두려웠던 것일까, 인류가 목매달아 자살하는 방법을 깨달은 이후 스스로 결박을 하고서 목숨을 끊는 예는 들어 본 적도 없거니와 그 좁은 동굴 안에서 허리띠 풀어 자신의 몸과 팔을 결박한 남자가 어떻게 목을 매어 죽는 아크로바틱한 재주를 부린단 말인가. 하지만 자살이었다. 방위 마치고 평범한 가스배달원 노릇으로 생계를 유지해가던 한 젊은이는 급작스런 연행 뒤 행방을 감추었다가 마치 귀신처럼 사람들 앞에 발가벗은 시체로 돌아왔다. 자살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군대에서 시체로 돌아오고, 엄마하고 농담하며 웃던 청년이 다음날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쌕쌕거리던 날이 일상이던 시절이다. 그 시대에 신호수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끌려갔고 짓밟히고 얼러지는 가운데 목숨을 잃거나 정신줄을 놓거나 안팎으로 곪아서 진물을 흘리면서 시들어 갔다. 지금도 전 재산 29만원인 그 시대의 최고 책임자가 거액의 육사 발전 기금을 내놓고 그 댓가(?)로 대한민국 육군 예비 장교들로부터 사열을 받는 세상을 신호수가 지켜본다면 그는 어떤 심경이 될까.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수십 년 동안 억울함을 호소하며 진상을 밝혀 줄 것을 애끓게 호소하는 그 아버지가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재연하며 어떻게 사람이 이 상태에서 목을 맬 수 있냐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서 이른바 열사도 하다못해 운동권 동지도 아니었던 평범한 노동자 신호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진은 아버지가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재연하며 그 '자살'의 불합리성을 호소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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