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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6.10 하와이 망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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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9년 6월 10일 하와이 망언 사건

자유당 정권이 그 말로를 향해 열심히 치닫고 있던 1959년의 초여름, 온 장안을 달구는 뜨거운 화제 하나가 터져 나왔다. 이름하여 '하와이 필화 사건'. 제목부터 야리꾸리한 '야담과 실화'라는 잡지가 있었다. 1959년 초 이 잡지는 "서울 시내 처녀 60퍼센트도 안된다."는 뚱딴지같은 기사를 실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끝에 폐간 처리되는데 몇 달 뒤 '야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잡지를 내게 된다. 그런데 이 '야화'가 야심차게 기획한 것이 한국 사회의 10대 풍조의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것이었는데 그 두 번째로 기획된 것이 얄궂고 저열하게도 전라도의 '하와이 근성'이라는 주제였다. 여기에 대한 '시'(是) 즉, 긍정의 편에서 쓰여진 글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글쓴이는 조영암이라는 강원도 출신의 시인(?)이었다. 뭐하던 작자이고 무슨 시를 끄적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글은 독랄했고 저열했다. "전라도 개땅쇠는 간휼과 배신의 표상이며.... 전라도 출신들은 우선 인류권에서 제외해야겠고, 동료권에서 제외해야 겠고, 친구에서 제명해야겠기에..... 전라도놈은 송충이나 그 이하의 해충... 전라도 사람은 신용이 없고 의리가 없으며 잔꾀가 많아 깊이 사귈 수 없다. 사회 각층에서 말썽을 일으킨 부류는 모두 전라도 사람이 대부분이며, 군대에서 탈영한 군인도 이곳 출신이 거의 차지하고 있다......"

독일인이 유태인을 비하하는 표현보다도, 일본인이 조센징을 멸시하는 것보다 더한 표현이버젓이 만인환시의 잡지에 실렸던 것이다. 이러고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당장 전라도 출신의 서울 시민들 가운데 성미 급한 이는 잡지사를 찾아 멱살을 쥐었다. 전북일보는 사설을 통해 조영암의 악질적인 호남 비하를 규탄했고 전북 도지사는 6백만 전라도민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개탄했고 전남과 전북 도의회 역시 물 끓듯 들고 일어났다. 호남 출신 민의원들은 여야 구분 없이 일치 단결하여 공보실장을 출석시켜놓고 “야화”가 지방파당과 민족분열을 조장하여 이적행위를 하는 악덕배라고 지적하고 “하와이 근성 시비”에 대한 공보부의 책임소홀을 지적하며 엄중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공보부는 1959년 6월 10일 월간잡지 “야화”에 대한 판매금지를 즉시 내리고, 판매 금지가 내리게 된 이유는 이 잡지 7월호에 기재된 소위 “하와이 근성 시비”라는 제목하에 전라도민을 가리켜 “개땅쇠” 또는 “간휼과 배신의 표상”이라는 글이 지나치게 저속한 것으로서 사회 도의를 추락시키고 미풍양속을 저해하고 사회의 평온을 문란케 하였다고 지적 판매 금지를 내렸다. 이름하여 '하와이 필화' 사건이다. 필화라는 표현도 무색하고 과분한 '망언' 내지는 '망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

이 사건이 말해 주는 사실은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 이후 이른바 영남 정권이 판을 치기 이전에도 심각할이만큼의 호남 차별 정서, 즉 '정서적 호남 포위망'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와 이후 정권들이 호남에 대한 차별 기제를 가동했고 그 정서를 조직적으로 이용하고 확산시키고 자신들의 야욕의 제물로 삼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도 호남 사람들에 대한 정신병적인 편견은 존재했던 것이다.

가끔은 궁금해지기도 한다. 도대체 저 편견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와이'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왜 하와이인가. 일설에 따르면 미군정이 편의상 조선의 행정구역에 미국의 지명을 붙였고 평안도는 텍사스, 함경도는 알래스카, 전라도는 하와이 등으로 불렀던 바 그 잔재라고도 하고, 악의적인 얘기에 따르면 2차대전 중 미국의 하와이 병정들이 "머리는 좋지만 탈영을 잘했던" 바, 그 기질을 그대로 빼닮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6.25 때 사단 편제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단이라 할 한국군 1사단의 주력이 호남 출신들이었다는 것은 백선엽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그 외에도 조영암이라는 자칭 시인이 들먹인 모든 내용들은 그 근거가 없는 카더라 방송 내지는 내맘대로 보도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그 태반은 바로 일본인들이 조센징에게 퍼붓던 욕설이기도 했다. 조센징들은 믿을 수 없고, 뒤통수를 잘 치며, 범죄의 온상이며, 앞에서는 설설 기어도 뒤에서는 돌을 들고 있는, 지진 나면 우물에 독이나 푸는 군상들이었던 것이다.

조센징 전체가 감당해야 했던 편견이 해방 후 그 겨레 가운데에는 유독 호남에만 집중되었는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갑오농민전쟁과 일제의 남한대토벌 (황현에 따르면 호남평야에서부터 땅끝마을 해남까지 쓸어내리고 쓸어올리며 의병을 토벌했던), 그리고 일제와 조선인 지주들의 탐학에 내몰려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인구가 가장 많은 도였으며, 전통적 유대가 강했던 각 지역 사람들에게 일종의 '이방인'으로 그 편견을 굳힌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단정하기엔 그 편견의 정신병적 상태가 너무나 심각하고 완고하다.

6월 10일은 대개 벅찬 가슴으로 기억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입증한 6월 평화 혁명의 시작일이고, 민주주의 앞에서 광주 시민과 부산 시민과 서울 시민이 하나가 되어 군부독재자에게 저항했던 날이다. 그렇게 자부심으로 빛나야 할 날에, 그리고 87년 6월로부터 25년이 지난 요즘에도, 나는 조영암 따위의 시러베아들이 지녔던 정서와 망상이 그 자랑찬 공화국의 시민들 사이에 온존하고 있음에 소스라칠 때가 있다. 1959년 조영암보다 더한 억지로, 그 표현보다 더 지독한 비하가 이뤄지고 있고 우리의 아이들까지도 그 말을 어디선가 들어올 때 나는 문득 암담해진다. 아직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려면 멀었다. 참고로 조영암과 잡지 책임자는 처음에는 2년, 대법원에서는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때는 그런 말에 대해서 단죄라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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