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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6.9 리디체의 에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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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2년 6월 9일 리디체의 에바

주말의 명화와 명화극장, 토요명화가 주말 밤 시간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던 시절, 가끔 ‘시청자 선정 추억의 명화’ 같은 기획이 내 또래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곤 했다. 비디오도 귀하고 동영상을 다운받을 인터넷선은 상상 속에서도 없었던 시절, 스크린 잡지 또는 김세원의 영화음악실에서나 그 내용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영화들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 기라성같은 영화 제목들 가운데 빠지지 않는 영화가 <새벽의 7인>이었다.

이 영화는 1942년 5월 일어났던 ‘프라하의 도살자’이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독일제국 보호관 (거의 총독)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영국에서 훈련받은 체코인 특공대가 잠입하여 내부의 빨치산들과 협조하여 하이드리히를 암살한 것이다. 집무실의 시계를 고치러 들어간 시계공이 하이드리히의 스케줄을 훔쳤고, 하녀가 그를 특공대에게 전달했고 특공대는 커브길에 스피드를 줄이는 것까지 계산한 잠복 끝에 하이드리히를 공격했고 그는 1주일 뒤 죽었다. 나찌 수뇌부들은 경악했다. 히믈러는 자식을 잃은 듯이 오열했고 괴벨스는 ‘대체가 불가능한 인물’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히틀러 역시 ‘강철의 심장’을 가졌던 하이드리히를 애도했다. 그리고 시작된 것은 체코인 대학살이었다.

그 와중에 빨치산 멤버가 리디체라는 작은 마을에 숨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리디체에 빨치산 멤버가 은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별 관계없었다. 이미 히틀러 총통은 하이드리히 1명의 목숨과 체코인 1만명의 목숨을 바꿀 것을 공언한 바 있었다. 그리고 1942년 6월 9일 베를린에서 하이드리히의 장례식이 끝난 몇 시간 뒤 리디체 마을에는 완전무장한 독일군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전부 끌어내어 수용한 뒤 이튼날부터 대학살을 시작했다. 173명의 남자와 10대 소년들을 사살하여 구덩이에 묻어 버리고 여자들은 수용소로 끌고 갔다. 마을은 불태워졌고 불도저로 땅을 고른 다음 나무와 농작물을 심었다.

학살을 면한 어린아이들 가운데 일부는 매우 특이한 경험을 해야 했다. 나찌의 의사들이 몰려들어 얼굴과 코의 길이를 재고 신체적 특징을 적었다. 그런 일을 당한 아이들의 공통점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다는 것, 즉 ‘아리안 족’의 특성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아이들이었다. 나찌들은 이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우수한 아리안 족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보았고, 그들을 교육원에 강제 수용한다. 독일 이름이 주어지고 독일어를 가르치고 독일 제복을 입혔다. 세뇌 또한 철저하여 아이들은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부모를 잃은 것으로 주입받았고, 교육에서 탈락한 아이들은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 중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 <이름을 빼앗긴 소녀 에바>(푸른나무)다. 리디체의 아이 중 하나인 밀레나는 몇 년 동안 감금된 채 교육을 받고 에바라는 독일 이름도 얻는다. 기나긴 교육 끝에 외출을 허락받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동포들로부터 “독일 악마년”이라고 불리우는 데에 충격을 받는다. 더 큰 충격은 수용소의 체코인 죄수들을 만날 때 일어났다.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그를 묻고자 했지만 그의 입밖으로 나오는 말은 독일어였지 체코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에바는 수용소장의 양녀로 입양되었고 독일인으로 살아가지만 전쟁 후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에바가 아닌 밀레나임을 밝히고 자신의 본래 터전으로 돌아간다. 수용소에서 말못할 고초를 겪고 몰라보게 변해버린 엄마를 만나고 그 손길을 느끼고서야 에바는 밀레나로 돌아간다.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 나왔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봤던 <이름을 빼앗긴 소녀 에바>가 준 기억은 꽤 선명하다. 악당들이 생각하는 것이란 항상 비슷하여 아르헨티나에서는 군부에 의해 ‘더러운 전쟁’이 벌어질 당시 희생자들의 자녀를 불임인 군 장교 부부에게 불하하듯 입양시켜 사회적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이란 무엇이 될까. 부모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시기, 부모와 형제의 원수에게 재롱을 떨면서 아양을 부리면서 동심을 형성해 갔던 그들에게 어린 시절이란 그 평생에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리디체의 에바, 아니 리디체의 밀레나에게 1942년 6월 9일은 어떤 날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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