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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1.28 최초의 사진신부 최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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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0년 11월 28일 최초의 사진 신부 최사라

안녕들 하시오. 나는 사라 최, 아니 최사라라고 합니다. 아마 많이들 낯설 거외다. 내 이름을 듣고 아 그 사람 하면서 무릎을 칠 사람은 천에 하나도 안될 테지요. 조금은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나는 남편을 사진으로 처음 만났소. 그때 남편은 태평양 건너 하와이에 있었고, 나는 망해버린 조선 땅에 있었지. 무슨 얘기인지 짐작하시겠지? 나는 사진을 보고 신랑을 정하고, 혈혈단신 태평양을 건너갔던 천 여 명의 사진신부 가운데 1호 사진 신부였어요. 1978년께였나 하와이 초대 이민들에게 왜 이곳에 왔느냐는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껏 살아남아 있던 사진 신부들은 이런 대답을 했었지요. “예수쟁이라고 놀림받는 것이 싫어서, 남자들 횡포 때문에, 시부모를 안 모실 것 같아서, 하와이에는 빗자루로 돈을 쓸기 때문에 그걸로 친정을 돕기 위해서......”

1910년 11월 28일 (12월 2일이라는 사람도 있더군) 내가 하와이에 발을 디뎠을 때 ‘남편’이 마중나와 있었지. 내 나이 스물 셋. 그 당시 풍습으로는 혼기를 놓친 과년한 처자였지만 신랑 얼굴을 보니 고개를 들 수가 없더군. 부끄러워서였냐고? 아니 너무 기가 막혀서 그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신랑 이내수는 나이 서른 여덟. 조혼 풍습 남아 있던 조선으로 따지자면 아버지와 딸이라고 해도 이상할 일이 없는 부부 아니었겠소. 그래도 나는 사진 신부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편이었고, 신랑은 신랑 후보군 가운데에서는 평균치였어요. 어떤 처자는 대놓고 신랑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소.

거기에다가 보내 준 사진은 대개 10년 전 사진이었거나 남의 좋은 차나 저택을 배경으로 멋들어지게 연출한 사진들이었으니 우리 사진 신부들 사이에 곡소리 드높은 것도 당연했지. 하지만 사기 당했다고 배 돌려 돌아가기에는 태평양은 너무나 넓었어요. 결혼을 강요당하다가 정신줄 놓아버린 사람도 있고, 악착같이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 오죽하면 박용만 선생(이승만과 라이벌 관계였던 하와이 한인들의 지도자)이 이런 글까지 썼을까. “본국 여자들이 하와이 한인의 인구가 번성함을 기뻐하지 않는 바가 아니로되 야만시대에 야만의 종자가 더 생기는 것은 원치 않는 바라. 그러므로 '국민보'는 인도(人道)를 유지하고 천리(天理)를 보호하기 위해 비록 하와이 한인이 종자가 끊어질 지라도 오늘날 현상은 그대로 보고 앉을 수 없노라." 하지만 어쩌겠소. 이것도 팔자이고, 감사해야 할 범사였던 것을.

그런데 우리 남편들은 어떻게 하와이로 오게 된 걸까요. 당시 하와이는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어요. 백인 노동자는 너무 비쌌고 중국, 일본인들도 세월이 감에 따라 미국 본토로 건너가거나 파업을 일으키거나 등등 호락호락하지 않게 됐기 때문에 하와이 농장주들은 유순한 ‘일꾼’들이 절실했지요. 이 사정을 안 것이 구한말 오래도록 미국 공사를 지냈던 알렌이었어요. 알렌은 휴가차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동력 부족을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고, 한국인들을 끌어댈 생각을 하게 돼요. 알렌은 고종 황제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다더군요.

“지금 백성들은 개국(開國)은 물론 진취(進就)를 원하고 있고 거기다 흉년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하와이로 보내서 척식사업과 신문화를 도입하도록 하는 게 현명한 선택입니다.” 마침 기근이다 전염병이다 골머리를 앓던 고종 황제도 귀가 솔깃해졌지요. 1902년 11월 최초의 공식적 이민단을 위한 ‘수민원’이 세워졌고 서울 부산 인천 진남포 원산 각지에서 이민을 모집하기 시작해요. 아마 내가 들은 것 이상으로 ‘지상낙원 하와이’에 대한 선전이 있었을 겁니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모집 끝에 100여명의 이민단이 하와이로 가는 배에 올라 1902년 1월 13일 (지금도 하와이 한인들의 기념일이야) 하와이에 상륙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우리 남편을 비롯한 한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설명하자면 몇일 밤을 새도 모자랄 거고, 초기 이민자 이홍기씨가 한 얘기로 대신하지요. “나는 4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새벽 5시에 일터로 나가서 5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하여 오후 4시 30분까지 일을 했다. 점심시간 30분이 고작 휴식시간이었다... 십장은 하와이말로 루나라 불렀는데 나의 십장은 독일인이었다. 루나(십장)는 우리를 마치 소나 말과 같이 그들을 채찍으로 다스렸다. 노동자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마치 죄수처럼 번호로 불렀다. 만일 그의 명령을 어기면 보통 뺨을 맞거나 사정없이 채찍으로 맞았다.” 
 
‘사진 결혼’은 그런 ‘사탕수수 노예’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자꾸만 사고를 치거나 도박에 빠지거나 해서 ‘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이었어요. 고종 황제에게 “개국과 진취” 운운했던 미국 공사 알렌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에게는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이랬어요.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라.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조선 사람들은 중국사람에 비하면 교육하기가 쉬운 족속이다.” 이 인내심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하고 오랜 복종의 습성 가진 노예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건 결국 짝이 없기 때문이었지. 그래서 또 한 번 사진 신부 열풍이 불었던 거고, 나를 비롯해 천여 명의 여자가 하와이로 건너가게 돼요. 망해버린 나라 대신 일본의 여권을 받아들고 나는 1910년 11월 28일 하와이에 상륙합니다.

그 뒤의 고생담은 굳이 주워섬기지 않겠어요. 딱 두 가지만 얘기하리다. 우선 하나는 미국 공사 알렌에 대한 괘씸한 마음입니다. 기근에 시달리는 나라에 와서는 ‘개국, 진취’ 따위의 말로 임금을 현혹하고, 태평양에 펼쳐진 황금빛의 미래를 설파하는 한편으로 제 동포들에게는 “얘네들 부려먹기 쉬운 애들이야. 복종이 체질화된 애들이라고.”라고 낄낄대는 이가 무슨 외교관이란 말이오. 허긴 누가 그러더군. 그런 것이 외교고 통상이라고. 앞에서는 부드러운 말만 하지만 뒤로는 주판알 퉁기는 건 동서고금의 이치라고. 어째 지금은 좀 나아졌소? 두 번째는 우리 자랑입니다. 우리 한인들 일당은 초기 기준 남자 67센트, 여자 50센트였소. 근근히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돈을 쪼개어 수십 년 동안 3백만 달러(추산)의 후원금을 모아서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었어요. 적어도 알렌은 그거 하나는 잘못 봤었지. 우리는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 쉬운 민족”은 아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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