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5년 11월 27일 40년 절교의 시작
... 60년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프로레슬링이었다. 지금은 한 물이 아니라 두 물 세 물이 간 이름이지만 6-70년대 프로레슬링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애들은 김일의 박치기를 보기 위해 TV 있는 집 아이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아양을 떨었고, 만화 가게에 “여건부 (이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 있으려나) 출전 ‘레쓰링’ 경기”가 나붙는 날이면 어른들까지 만화 가게를 가득 메웠다.
전쟁 때 황해도에서 피난나온 한 청년은 우연히 일본의 프로 레슬링을 다룬 영화를 보게 된다. 안 그래도 체육관에서 레슬링으로 체력을 다지던 그는 영화 속에서 자기가 갈 길을 발견한다. 일본으로 가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지켜보며 노하우를 어림잡은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국내 최초의 프로레슬러가 된다. 부산 지역에서 서울로 진출한 프로레슬링은 공전의 히트를 쳤고 황해도 피난민 청년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산파이자 대부가 된다. 그 이름이 장영철이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날렵한 드롭킥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레슬러
그런데 그렇게 승승장구 잘 나가던 장영철에게 강력한 신흥 세력이 등장한다. 신흥 세력이라기보다는 선진(?) 세력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최고봉 역도산의 제자 김일이 입국한 것이다. 흥행에는 성공하고 있었지만 여러모로 미숙하고 일본 프로레슬링의 화려한 기술과 경기 운영에 비하면 조악했던 국내 레슬링계에 김일의 출현은 야릇한 긴장의 대결 구도를 가져왔다. 개척자를 자임하는 토종 국내파와 ‘선진문물’을 등에 업은 해외파의 대결은 레슬링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던 중 1965년 11월 27일 운명적인 사건이 터진다.
5개국 친선 레슬링 대회가 열렸고, 김일의 메인 게임에 앞서 장영철은 일본의 오쿠마와 3전 2선승제의 시합을 치르고 있었다. 경기 중 오쿠마가 장영철에게 ‘새우 꺾기’를 시도했다. 허리를 꺾는 위험한 공격에 장영철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매트를 두드렸다. 이는 항복 표시로 경기가 중단되어야 했는데 어쩐 일인지 오쿠마는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고 여기서 사단이 났다. 링 사이드에 포진해 있던 장영철의 제자들이 링 위로 튀어 올라가 오쿠마를 집단 폭행한 것이다. 그들은 (김일이 불러온) 오쿠마가 장영철의 허리를 꺾어 버릴 심산이라고 보았고, 이는 김일측의 장영철 제거 음모라고 믿었다.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장영철이 한 말을 상당한 파장을 가져왔다. “오쿠마가 각본대로 하지 않고 (김일의 지시를 받아) 이기려고 했다.”는 증언을 했는데 이것이 경찰과 언론을 거치면서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장영철이 선언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기실 프로레슬링은 예나 지금이나 ‘쇼’다. 위험한 쇼다. 100 킬로그램의 거구가 로프 위에 올라가 매트에 쓰러진 이를 향해 점프해서 실제로 내려찍는다면 경기마다 송장이 나올 것이다. 사전의 각본과 공격의 조율에 따라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프로레슬링이었다.
사실이야 어쨌든,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장영철이 선언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귀국한 지 몇 달도 안된 김일에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장영철은 다음날 김일에게 도전장을 던졌으나 김일은 “일본 3류한테 지는 선수가 나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쳤다. 아울러 “이런 물의를 일으키면서까지 한국에서 레슬링을 하고 싶지 않다.”고까지 했다. 한국 프로레슬링을 개척한 황해도 장사 장영철과 전라도 고흥 장사 김일 두 거한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교환하며 가없이 멀어지게 된다. 그 뒤 장영철 측의 선수가 김일 라인에 침투하여 선수를 빼내려 했다는 일종의 프락치(?) 파동 등을 거치면서 증오는 시멘트로 굳어 버렸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2006년 김해의 어느 병원에 휠체어를 탄 노인이 방문한다. 한때 130킬로그램을 넘던 거구였지만 지금은 몰라보게 초췌해진 박치기 왕 김일이었다. 그의 방문 대상은 역시 100킬로그램의 당당한 레슬러였지만 현재는 미음으로 연명하고 있는 장영철이었다.
“죽기 전에는 한 번 봐야겠다.”는 것이 김일의 의지였고, 장영철은 “이렇게 오실 줄이야 꿈에도 몰랐습니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감격스러워했다. 둘은 그때에야 나이를 확인한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걸로 아는데 몇 살이십니까?”(장영철) “나 일흔 여덟이오.” (김일). 둘이 서로를 안 지 41년이었지만 그제야 ‘민증’을 까고 있으니 그 세월이 미루어 짐작이 간다. 김일 역시 “후배가 먼저 찾지 않는데 내가 찾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라고 고백했지만 김일은 얄팍한 자존심을 버리고 장영철의 손을 먼저 잡았다. 그리고 병실을 울린 것은 41년만의 사과 비슷한 장영철의 말이었다. “제가 철이.....없었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힘차게 일어서자고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로부터 머지않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뜬다. 하지만 둘은 저승길에 버겁고 거추장스러울 큰 짐 하나씩을 버리고 갔다. 1965년 11월 27일 링 위의 난장판으로 시작된 41년의 포한이 그것이다. 의미 없는 자존심 폐기하고, 먼 길 헤치고 장영철의 손을 잡아 준 그날, 김일은 그 레슬링 인생에서 안토니오 이노끼에게 퍼부은 박치기 이후 가장 통쾌하고 감동적인 ‘박치기’를 성공시켰다. 41년의 절교와 오해의 세월을 매트 위에 누인 것이다.
한 해가 간다. 누구에게든 크건 작건 “1965년 11월 27일”은 존재하고 경우에 따라 장영철이 되기도 하고 김일이 되기도 하는 오해의 틈바구니가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이 해가 가기 전, 장영철의 멋진 드롭킥과 김일의 가공할 박치기로 날려 버리는 얼친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다.
1965년 11월 27일 40년 절교의 시작
... 60년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프로레슬링이었다. 지금은 한 물이 아니라 두 물 세 물이 간 이름이지만 6-70년대 프로레슬링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애들은 김일의 박치기를 보기 위해 TV 있는 집 아이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아양을 떨었고, 만화 가게에 “여건부 (이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 있으려나) 출전 ‘레쓰링’ 경기”가 나붙는 날이면 어른들까지 만화 가게를 가득 메웠다.
전쟁 때 황해도에서 피난나온 한 청년은 우연히 일본의 프로 레슬링을 다룬 영화를 보게 된다. 안 그래도 체육관에서 레슬링으로 체력을 다지던 그는 영화 속에서 자기가 갈 길을 발견한다. 일본으로 가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지켜보며 노하우를 어림잡은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국내 최초의 프로레슬러가 된다. 부산 지역에서 서울로 진출한 프로레슬링은 공전의 히트를 쳤고 황해도 피난민 청년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산파이자 대부가 된다. 그 이름이 장영철이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날렵한 드롭킥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레슬러
그런데 그렇게 승승장구 잘 나가던 장영철에게 강력한 신흥 세력이 등장한다. 신흥 세력이라기보다는 선진(?) 세력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최고봉 역도산의 제자 김일이 입국한 것이다. 흥행에는 성공하고 있었지만 여러모로 미숙하고 일본 프로레슬링의 화려한 기술과 경기 운영에 비하면 조악했던 국내 레슬링계에 김일의 출현은 야릇한 긴장의 대결 구도를 가져왔다. 개척자를 자임하는 토종 국내파와 ‘선진문물’을 등에 업은 해외파의 대결은 레슬링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던 중 1965년 11월 27일 운명적인 사건이 터진다.
5개국 친선 레슬링 대회가 열렸고, 김일의 메인 게임에 앞서 장영철은 일본의 오쿠마와 3전 2선승제의 시합을 치르고 있었다. 경기 중 오쿠마가 장영철에게 ‘새우 꺾기’를 시도했다. 허리를 꺾는 위험한 공격에 장영철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매트를 두드렸다. 이는 항복 표시로 경기가 중단되어야 했는데 어쩐 일인지 오쿠마는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고 여기서 사단이 났다. 링 사이드에 포진해 있던 장영철의 제자들이 링 위로 튀어 올라가 오쿠마를 집단 폭행한 것이다. 그들은 (김일이 불러온) 오쿠마가 장영철의 허리를 꺾어 버릴 심산이라고 보았고, 이는 김일측의 장영철 제거 음모라고 믿었다.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장영철이 한 말을 상당한 파장을 가져왔다. “오쿠마가 각본대로 하지 않고 (김일의 지시를 받아) 이기려고 했다.”는 증언을 했는데 이것이 경찰과 언론을 거치면서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장영철이 선언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기실 프로레슬링은 예나 지금이나 ‘쇼’다. 위험한 쇼다. 100 킬로그램의 거구가 로프 위에 올라가 매트에 쓰러진 이를 향해 점프해서 실제로 내려찍는다면 경기마다 송장이 나올 것이다. 사전의 각본과 공격의 조율에 따라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프로레슬링이었다.
사실이야 어쨌든,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장영철이 선언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귀국한 지 몇 달도 안된 김일에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장영철은 다음날 김일에게 도전장을 던졌으나 김일은 “일본 3류한테 지는 선수가 나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쳤다. 아울러 “이런 물의를 일으키면서까지 한국에서 레슬링을 하고 싶지 않다.”고까지 했다. 한국 프로레슬링을 개척한 황해도 장사 장영철과 전라도 고흥 장사 김일 두 거한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교환하며 가없이 멀어지게 된다. 그 뒤 장영철 측의 선수가 김일 라인에 침투하여 선수를 빼내려 했다는 일종의 프락치(?) 파동 등을 거치면서 증오는 시멘트로 굳어 버렸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2006년 김해의 어느 병원에 휠체어를 탄 노인이 방문한다. 한때 130킬로그램을 넘던 거구였지만 지금은 몰라보게 초췌해진 박치기 왕 김일이었다. 그의 방문 대상은 역시 100킬로그램의 당당한 레슬러였지만 현재는 미음으로 연명하고 있는 장영철이었다.
“죽기 전에는 한 번 봐야겠다.”는 것이 김일의 의지였고, 장영철은 “이렇게 오실 줄이야 꿈에도 몰랐습니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감격스러워했다. 둘은 그때에야 나이를 확인한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걸로 아는데 몇 살이십니까?”(장영철) “나 일흔 여덟이오.” (김일). 둘이 서로를 안 지 41년이었지만 그제야 ‘민증’을 까고 있으니 그 세월이 미루어 짐작이 간다. 김일 역시 “후배가 먼저 찾지 않는데 내가 찾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라고 고백했지만 김일은 얄팍한 자존심을 버리고 장영철의 손을 먼저 잡았다. 그리고 병실을 울린 것은 41년만의 사과 비슷한 장영철의 말이었다. “제가 철이.....없었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힘차게 일어서자고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로부터 머지않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뜬다. 하지만 둘은 저승길에 버겁고 거추장스러울 큰 짐 하나씩을 버리고 갔다. 1965년 11월 27일 링 위의 난장판으로 시작된 41년의 포한이 그것이다. 의미 없는 자존심 폐기하고, 먼 길 헤치고 장영철의 손을 잡아 준 그날, 김일은 그 레슬링 인생에서 안토니오 이노끼에게 퍼부은 박치기 이후 가장 통쾌하고 감동적인 ‘박치기’를 성공시켰다. 41년의 절교와 오해의 세월을 매트 위에 누인 것이다.
한 해가 간다. 누구에게든 크건 작건 “1965년 11월 27일”은 존재하고 경우에 따라 장영철이 되기도 하고 김일이 되기도 하는 오해의 틈바구니가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이 해가 가기 전, 장영철의 멋진 드롭킥과 김일의 가공할 박치기로 날려 버리는 얼친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