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44년 6월 6일 D데이, 카파의 손도 떨렸다
세상 일은 우연의 연속이다. 하지만 1944년 봄 영국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 사령부는 도저히 우연이라고는 보기 힘든 사안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바야흐로 도버 해협을 건너 유럽 대륙 본토에서 제 2전선을 일구려는 야심찬 계획이 착착 진행 중이었는데 난데없는 신문 단어 퍼즐 퀴즈가 문제였다. 레너드 도우라는 교사가 출제한 데일리 텔레그래프 신문의 ...단어 퍼즐의 답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들이 5주 연속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유타(미국의 주)” “오마하”(미국 지명) “넵튠” “오버로드” 등이었다. 이 이름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요긴하게 쓰일 비밀명이었고 ‘오버로드’(대왕)은 숫제 작전명이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었다. 독일의 스파이가 작전 상황 일체를 신문 퍼즐을 통해 유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막상 도우를 심문한 이들은 이 사태가 기막힌 우연의 연속이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평범하고 샌님같은 이과 교사였던 도우에게는 아무런 혐의점도 없었고, 자신에게 들이닥친 수사관들 앞에서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우연이었던 것이다.
독일은 남프랑스에서 덴마크에 이르는 3840킬로미터라는 엄청난 길이의 해변에 ‘대서양 장벽’을 쌓아두고 있었다. 상륙방해 구조물과 지뢰, 포대, 기관총 기지로 무장한 이 대서양 장벽 건설을 주도한 인물은 사막의 여우 롬멜이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로 온다. 그들이 상륙한 후 24시간이 아군에게나 그들에게나 승패를 좌우하는 기나긴 하루가 될 것이다.가장 긴 날이.”라고 훈시한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1944년 6월 6일 문제의 가장 긴 날, 제 위치게 없었다. 하필이면 아내의 생일이 6월 5일이어서 휴가를 받아 독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우연.
1944년 6월 4일, 연합군은 수십 년만에 최악이라는 날씨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악천후가 계속되었고 이는 상륙을 감행하는데 필수적인 공중 지원과 함포 사격을 불가능하게 했다. 날이 갈수록 치밀한 롬멜의 대서양 방벽은 더 탄탄해질 것이었고, 기밀 유지도 어려울 게 뻔했다. 그때 무뚝뚝한 표정의 영국 공군 대령 스태그가 복음을 가지고 왔다. “한랭전선이 갑자기 발달해서 남쪽으로 뻗고 있습니다. 이 전선이 지나간 후 6월 5일 오후부터 6일까지는 날씨가 괜찮겠습니다. 그 뒤 다시 날씨가 나빠질 겁니다.” 그런데 이 보고를 받을 때는 허리케인급의 돌풍과 빗줄기가 사령부를 때리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이 몽고메리 영국군 원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루 반의 시간에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것은 섰다판같은 도박이었다. 몽고메리는 간단하게 답한다. “저같으면 고(Go) 하지요.” 아이젠하워 역시 결의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것 밖에는 없다.” 1944년 6월 6일의 D데이는 이렇게 날씨 때문에 정해졌다. 매우 결정적인 우연.
앞서 언급한 유타, 오마하 등은 상륙지점에 대한 암호명이었다. 그 가운데 오마하 해변은 지형상 상륙하기에는 매우 껄끄러운 곳이었다. 대신에 수비병력은 허약하다고 평가됐는데 하필이면 상륙작전 1주일 전에 러시아 전선에서 날고 긴 사단이 배치되어 왔다. 오마하 해변은 삽시간에 피로 물들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그 유명한 전투 장면은 오마하 해변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런데 새벽에 상륙을 개시한 미군들 가운데에는 총 대신 카메라를 든 이가 하나 있었다. 로버트 카파라는 헝가리 출신의 종군 기자였다.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은 충분히 다가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기관총 세례에 픽픽 나가 떨어지는 병사들의 시신을 헤치면서 셔터를 눌러댔다. 최초의 상륙정에 타고 있었기에 그는 돌진하는 병사들의 등짝 뿐 아니라 악으로 깡으로 상륙하는 군인들의 얼굴까지도 앵글에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뭍에 닿지도 못하고 수천 명이 구멍 뚫린 송장이 되어 죽어가는 현장에서 어지간히 대담했던 그도 전쟁의 공포에 휩싸였다. “깊이 모를 공포가 머리를 얼어붙게 하고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카메라를 찍으려 했지만 찍을 수 없었다. 손의 떨림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되돌아서서 상륙하는 상륙주정을 향해 달렸다. 해안가 쪽을 돌아보려 했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상륙주정에 올라섰을 때 폭발이 일어나 그 배의 부관이 날아갔고 카파는 다시 해안가를 돌아보며 셔터를 누른다. 그렇게 100여 장의 사진을 찍고서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기가 막힌 현장 사진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하던 현상 기사가 필름을 서둘러 가열하는 바람에 그만 홀라당 타 버리고 말았다. 남은 건 열 장의 사진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러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직업 근성으로 시체가 된 사람들과 시체가 될 사람들 사이에서 찍은 긴박한 사진은 아쉬우나마 그렇게 세상에 남았다.
D데이, 카파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본다. 총알 하나가 삶과 죽음을 가르던 순간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카파의 초점 흔들린 사진을 통해서 기억된다. 오마하 해변을 향해 끈질기게 헤엄쳐 가는 얼굴 알아보기 힘든 미군은 과연 살아남았을까. 상륙방해 구조물 뒤에 온몸을 웅크린 채 소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는 살아서 모래사장을 밟았을까.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29사단 116연대 A중대는 훈련을 마친 후 197명이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사진 속의 96퍼센트가 상륙 후 10분 안에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거대한 작전의 캐터필러는 엉뚱한 우연과 필연의 의지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수많은 이들의 생명과 미래를 짓이기면서 역사 속을 느릿느릿 전진했다. 롬멜이 말한대로 1944년 6월 6일은 20세기에서 가장 긴 날 중의 하루였다
1944년 6월 6일 D데이, 카파의 손도 떨렸다
세상 일은 우연의 연속이다. 하지만 1944년 봄 영국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 사령부는 도저히 우연이라고는 보기 힘든 사안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바야흐로 도버 해협을 건너 유럽 대륙 본토에서 제 2전선을 일구려는 야심찬 계획이 착착 진행 중이었는데 난데없는 신문 단어 퍼즐 퀴즈가 문제였다. 레너드 도우라는 교사가 출제한 데일리 텔레그래프 신문의 ...단어 퍼즐의 답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들이 5주 연속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유타(미국의 주)” “오마하”(미국 지명) “넵튠” “오버로드” 등이었다. 이 이름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요긴하게 쓰일 비밀명이었고 ‘오버로드’(대왕)은 숫제 작전명이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었다. 독일의 스파이가 작전 상황 일체를 신문 퍼즐을 통해 유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막상 도우를 심문한 이들은 이 사태가 기막힌 우연의 연속이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평범하고 샌님같은 이과 교사였던 도우에게는 아무런 혐의점도 없었고, 자신에게 들이닥친 수사관들 앞에서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우연이었던 것이다.
독일은 남프랑스에서 덴마크에 이르는 3840킬로미터라는 엄청난 길이의 해변에 ‘대서양 장벽’을 쌓아두고 있었다. 상륙방해 구조물과 지뢰, 포대, 기관총 기지로 무장한 이 대서양 장벽 건설을 주도한 인물은 사막의 여우 롬멜이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로 온다. 그들이 상륙한 후 24시간이 아군에게나 그들에게나 승패를 좌우하는 기나긴 하루가 될 것이다.가장 긴 날이.”라고 훈시한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1944년 6월 6일 문제의 가장 긴 날, 제 위치게 없었다. 하필이면 아내의 생일이 6월 5일이어서 휴가를 받아 독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우연.
1944년 6월 4일, 연합군은 수십 년만에 최악이라는 날씨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악천후가 계속되었고 이는 상륙을 감행하는데 필수적인 공중 지원과 함포 사격을 불가능하게 했다. 날이 갈수록 치밀한 롬멜의 대서양 방벽은 더 탄탄해질 것이었고, 기밀 유지도 어려울 게 뻔했다. 그때 무뚝뚝한 표정의 영국 공군 대령 스태그가 복음을 가지고 왔다. “한랭전선이 갑자기 발달해서 남쪽으로 뻗고 있습니다. 이 전선이 지나간 후 6월 5일 오후부터 6일까지는 날씨가 괜찮겠습니다. 그 뒤 다시 날씨가 나빠질 겁니다.” 그런데 이 보고를 받을 때는 허리케인급의 돌풍과 빗줄기가 사령부를 때리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이 몽고메리 영국군 원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루 반의 시간에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것은 섰다판같은 도박이었다. 몽고메리는 간단하게 답한다. “저같으면 고(Go) 하지요.” 아이젠하워 역시 결의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것 밖에는 없다.” 1944년 6월 6일의 D데이는 이렇게 날씨 때문에 정해졌다. 매우 결정적인 우연.
앞서 언급한 유타, 오마하 등은 상륙지점에 대한 암호명이었다. 그 가운데 오마하 해변은 지형상 상륙하기에는 매우 껄끄러운 곳이었다. 대신에 수비병력은 허약하다고 평가됐는데 하필이면 상륙작전 1주일 전에 러시아 전선에서 날고 긴 사단이 배치되어 왔다. 오마하 해변은 삽시간에 피로 물들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그 유명한 전투 장면은 오마하 해변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런데 새벽에 상륙을 개시한 미군들 가운데에는 총 대신 카메라를 든 이가 하나 있었다. 로버트 카파라는 헝가리 출신의 종군 기자였다.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은 충분히 다가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기관총 세례에 픽픽 나가 떨어지는 병사들의 시신을 헤치면서 셔터를 눌러댔다. 최초의 상륙정에 타고 있었기에 그는 돌진하는 병사들의 등짝 뿐 아니라 악으로 깡으로 상륙하는 군인들의 얼굴까지도 앵글에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뭍에 닿지도 못하고 수천 명이 구멍 뚫린 송장이 되어 죽어가는 현장에서 어지간히 대담했던 그도 전쟁의 공포에 휩싸였다. “깊이 모를 공포가 머리를 얼어붙게 하고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카메라를 찍으려 했지만 찍을 수 없었다. 손의 떨림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되돌아서서 상륙하는 상륙주정을 향해 달렸다. 해안가 쪽을 돌아보려 했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상륙주정에 올라섰을 때 폭발이 일어나 그 배의 부관이 날아갔고 카파는 다시 해안가를 돌아보며 셔터를 누른다. 그렇게 100여 장의 사진을 찍고서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기가 막힌 현장 사진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하던 현상 기사가 필름을 서둘러 가열하는 바람에 그만 홀라당 타 버리고 말았다. 남은 건 열 장의 사진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러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직업 근성으로 시체가 된 사람들과 시체가 될 사람들 사이에서 찍은 긴박한 사진은 아쉬우나마 그렇게 세상에 남았다.
D데이, 카파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본다. 총알 하나가 삶과 죽음을 가르던 순간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카파의 초점 흔들린 사진을 통해서 기억된다. 오마하 해변을 향해 끈질기게 헤엄쳐 가는 얼굴 알아보기 힘든 미군은 과연 살아남았을까. 상륙방해 구조물 뒤에 온몸을 웅크린 채 소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는 살아서 모래사장을 밟았을까.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29사단 116연대 A중대는 훈련을 마친 후 197명이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사진 속의 96퍼센트가 상륙 후 10분 안에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거대한 작전의 캐터필러는 엉뚱한 우연과 필연의 의지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수많은 이들의 생명과 미래를 짓이기면서 역사 속을 느릿느릿 전진했다. 롬멜이 말한대로 1944년 6월 6일은 20세기에서 가장 긴 날 중의 하루였다